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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느헤미야 05:06-13/ 고난의 때를 지 날 때 [느헤미야]
  • 조회 수: 328, 2018.04.18 15:43:49
  • 오늘날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은 참으로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국내적으로 경제가 어렵고, 국민들의 생활 형편이 좋지 못하다고, 여기 저기 한숨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얼어붙은 경제 회복은 IMF때 보다 더 힘들다라고 푸념까지 나오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정치가들이 국민들을 위한 정치에는 뒷전이고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당파싸움만 하는 모습을 보면서 국민들은 실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국내 사정뿐만 아니라 국외의 사정도 어렵습니다. 중국과 일본은 서로의 영토를 지키기 위한 명목으로 군비 강화를 하고 있고, 특히나 일본은 역사왜곡을 비롯해 계속해서 우경화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또한 북한의 핵개발과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군사적 도발은 우리나라를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위험한 국가로 불리우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국내외 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 나라와 이 민족을 바라볼 때, 저와 여러분들은 믿는 자들로써 해야할 일들은 과연 무엇일까요? 주전400년경, 그러니깐 지금으로부터 2400여년전 이스라엘 민족 역시도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어려움 이상의 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민족의 부흥을 꿈꾸고 있었지만 여러 어려움의 문제들에 직면하게 됩니다. 느헤미야라는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민족 재건의 역사적 소명을 가지고, 조국에 돌아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감당했지만, 그 역시도 여러 가지 어려움의 문제들을 만나면서 절망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과 느헤미야가 직면했던 절망적 위기는 본문에 의하면 3가지 요인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기근과 흉년 때문에 얻게 된 어려움이고, 그 다음은 과도한 세금 징수의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과도한 빚 문제였습니다. 3절과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가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저당 잡히고 이 흉년에 곡식을 얻자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서 왕에게 세금을 바쳤도다" 지금 3절에서 보면 흉년 때문에 먹을 곡식을 얻을 수 없다라고 이야기 하면서, 먹을 곡식을 위해서 자신들의 밭과 포도원과 집을 저당 잡힐 수 밖에 없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4절에 보면 이러한 흉년의 때에, 과도한 세금을 내기 위해서, 없는 재산에 빚까지 내서 세금을 받쳐야 한다라고 당시 상황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과도한 사채였습니다.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세금을 내기 위해서 전 재산을 팔아야 하는데, 그것도 모잘라 돈을 빌려써야만 했습니다.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된 자가 있고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도다 하더라" 그런데 이 돈을 빌려주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돌봐주여야할 민족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돈을 빌려주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이 지도자들 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일반 백성들에게 과도한 이자를 물게 해서, 그들이 파산에 이르기 까지 만든 것입니다. 결국 재산을 다 탕진해도 빚을 갚을 수 없자, 사람들은 자식들을 종으로 팔 수 밖게 없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백성들은 이러한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부르짖으며 절망과 낙심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역경의 때에 믿음의 지도자 느헤미야는 과연 이런 시대적인 고난을 어떻게 극복해 내었을까요? 여러 가지 위기를 겪고 있는 우리 민족과 우리 공동체가 이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서, 느헤미야에게 배울 수 있는 모습은 과연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일반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며, 과도한 빚 때문에 자식까지 종으로 팔아 넘길 수 밖에 없는 이런 시대적인 불안과 절망을 본 느헤미야가 제일 먼저 보여준 반응은 분노였습니다. 어쩌다 우리 민족이 이렇게 되었는가,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되었는가, 느헤미야는 가슴을 쳤습니다.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느헤미야의 분노는 의로운 분노였습니다. 성경은 결코 분노 그 자체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분노를 통제 못하면 죄가 될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 가운데 만연해 있는 죄악들과 부조리들을 보면서 분노하는 것은 거룩한 분노, 의로운 분노이며, 이것은 종종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중요한 에너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노하되 죄를 짓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분노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분노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피상적인 생각이 아닌 진지한 생각이었습니다. 7절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깊이 생각하고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높은 이자를 취하는도다 하고 대회를 열고 그들을 쳐서" 7절 앞부분을 보면 느헤미야가 '의로운 분노를 하며 깊이 생각했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새로 바뀐 우리 성경에는 깊이 생각하다라고 나와 있지만, 예전 성경에는 '중심에 계획을 하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즉 느헤미야는 단순히 분노만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이 문제와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 깊은 생각과 그 중심에 계획을 세웠다라는 것입니다.

    한 그리스도인 심리학자는 한국 사람들은 감정이 풍부하고 정서감이 깊다라는 것이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감정과 정서에 밀려 중요한 일을 그릇칠 때가 있을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정적인 면이 가지고 있는 약점을 조화롭게 균형을 잡기 위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사고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성경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사고하는 습관이' 필요한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지한 생각이 단순히 개인적인 생각을 뛰어넘어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생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위기의 상황가운데,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뜻은 무엇인가?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과 시련의 환경을 당하면 우와좌왕 합니다. 마음이 혼란스럽고 생각이 분주해집니다. 당장에 이일을 해결할 수 있는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찾기에 급급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달라야 합니다. 어떠한 위기와 어려움의 환경에 직면할 때, 제일 먼저 하나님을 생각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진지하게 찾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고통이 오거든 역경이 오거든 먼저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이 상황가운데 하나님이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시는 계획과, 나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뜻은 무엇인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러져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달라고 아뢰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역경의 환경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이 고난의 환경을 극복케 하시기 위해 나에게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시기를 원하시는가? 이 문제와 위기를 직면하는 하나님 백성들의 성경적 원리와 방법은 무엇인가?' 이를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죄를 직면하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모든 고난이 죄로 말미암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고난은 분명히 죄로 말미암은 것 일수가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민족의 고난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이 고난이 초래된 원인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원인이 백성들 가운데 만연한 죄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그 죄들을 직면하기로 했습니다. 이 죄의 표면적인 현상은 백성들 사이에 만연된 이자놀이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중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사채놀이를 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채놀이의 결과로 인간이 인간을 사고 파는 노예화의 현상까지 경험하게 됩니다. 겉으로 볼 때는 흉년과 가뭄이라는 자연적 재해가 있고, 또한 이방 나라의 왕이 물리는 과도한 세금이라는 외적 환경이 있었습니다.

    이를 악이용해서 이자 놀이를 하는 악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절망과 낙심에 이르게 된 까닭은 이러한 표면적인 이유 말고도 보다 더 깊은 곳에 원인이 있었습니다. 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행이 좋지 못하도다 우리의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할 것이 아니냐" 느헤미야가 잘못된 문제점들을 보며 분노를 했습니다. 이것은 의로운 분노였습니다. 이 의로운 분노 뒤에 느헤미야는 깊고 진지한 생각을 했습니다. 과연 이 문제의 원인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지금 해야할 일들이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할 것들은 무엇인가? 이 진지한 생각의 결과 느헤미야는 이 민족의 어려움들이, 이 민족의 위기가 죄로부터 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동하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 다라고 말하면서도, 전혀 하나님의 사람답게 행동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하지 못한 일들을 거리낌 없이 행했다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업신 여겼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돈을 빌려주는 행위 그 자체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고이율의 이자를 부과하여 어려운 이웃들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그것이 죄라고 지적하며 꾸짖는 것입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한 핏줄이요, 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은 지금 자신들의 형제 자매들에게 사채를 빌려주면서, 그들의 파산에 이르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이것을 죄라고 여기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백성들 앞에, 사람과 사람 앞에 지은 죄이기도 하지만, 한 발더나아가 하나님께 죄를 짓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말하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경험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형제 자매들에게, 그 긍휼과 자비를 베풀지 않고, 오히려 작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만드는 큰 범죄 였던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너희는 지금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있다. 너희 믿는 형제 자매들을 착취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도 잘못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잘못을 잘못으로 인정하는 용기가 중요한 것입니다. 옛날 독일(프러시아 제국) 매우 훌륭한 왕이 있었다고 합니다. (프레데릭 대왕)



    이왕은 아주 지혜롭고 경건한 믿음을 가진 왕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한번은 감옥을 방문해서 죄수들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무슨 죄로 들어 왔는가?”그러자 모두들 자신들은 억울하게 이곳에 들어왔다라고 말했습니다. 한 사람도 자신이 죄를 지어서, 잘못해서 들어왔다라고 말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오직 한 젊은 청년이 자기 죄를 시인하며 자기는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말하더랍니다. 그러자 이 왕은 이런 유명한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저 죄인을 밖으로 내보내어라. 그래서 이곳에 있는 자칭 순결하고 무죄한 분들에게 저 청년이 오염되지 않도록 하라."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자들을 의롭다 하시는 분이심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으로 죄를 인정하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용기인 것입니다. 성경이 다윗을 가르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그가 자기의 죄를 나단 선지자에게 지적 받았을 때, 왕의 보좌에서 내려와 “내가 과연 그 사람이라. 내가 범죄 하였다”고 고백할수 있었던 용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역경의 시간은 자기 성찰하고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는 중요한 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죄를 지적해 주신다면 우리는 정직하게 우리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빌며, 회개할 수 있는 그러한 용기와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께 서원하는 결심을 필요로 합니다.




    성경적으로 진정한 회개는 단순히 죄를 인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죄를 회개했으면 죄에서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떠남을 위해서,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약시대 에서부터 서원을 실천해온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신약성경은 헛된 맹세를 삼가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맹세나 서원자체의 무의미를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우리 시대에서는 이런 서원의 아름다운 전통이 회복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아직 한 번도 하나님 앞에 거룩한 서원을 한번도 못해본 분들이 있다라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에 문제가 없는지 한번 점검해 봐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고난의 시간, 역경의 시간을 지나면서 이 역경이 죄의 결과라고 깨달아 졌다면 이제야 말로 하나님 앞에 새로운 미래의 삶을 결심할 시간이 아닙니까? “하나님 저를 용서해 주신다면이제부터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라는 결심을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입에 발린 말로, 이 위기의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고백과 결심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성경에서 말하는 헛된 맹세이고, 하나님앞에 또다른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회개를 동반한 믿음의 서원과 참된 맹세는 하나님 앞에, 사람들 앞에 귀한 것들입니다. 지금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서원의 결심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제 10절에서 백성들에게 이제부터는 돈을 꾸어주되 이자 받기를 그만두기로 결심하라고 촉구합니다. 11절 에서는 이미 받은 분량 중에서 상당한 부분을 돌려보내라고 촉구합니다. 그리고 12절에서는 그것을 제사장 앞에서 공개적으로 맹세하라고 촉구합니다. 느헤미야가 이러한 서원과 맹세를 촉구하자 13절에서 백성들이 아멘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옷자락을 털며 이르기를 이 말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이 또한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털어 버리실지니 그는 곧 이렇게 털려서 빈손이 될지로다 하매 회중이 다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백성들이 그 말한 대로 행하였느니라"



    백성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앞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라고 서원과 맹세를 하겠다라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맹세와 서원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에서 벗어나, 다시 한 번 새롭게 나라와 민족을 변화시키는 소중한 계기로 삼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민족가운데, 우리 교회와 가정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이러한 거룩한 서원의 결심이 필요한 때가 아닙니까? 지금이야말로 저와 여러분의 삶가운데 주님을 향한 단호한 신앙의 맹세와 결심이 필요한 때가 아니십니까?

    지금으로부터 약200년 전 영국에서 폭력배 서클에 가입해 있던 17의 한 소년 있었습니다. 방탕을 일삼았던 그는 당시 유명한 조지 휘필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회개를 한 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지만, 다시 그는 세상에 빠져 방황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말하면서, 다시 방탕한 길로 빠져든 이 청년은 너무나도 괴로운 나머지 죄책감과 더불어 절망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주일, 그날도 술에 취에 방황을 하고 있었는데, 한 귀부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부인은 교회에 가는 도중이었는데, 이 청년을 보고 안쓰러운 마음에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부인의 복음을 듣고, 이 청년은, '사실 저는 교회를 다녔고, 한 때 신앙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부인은 이 소리를 듣고, '그럼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방황을 접고 어서 하나님의 품으로 나오세요'

    부인은 이 청년을 끌고 교회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예배시간 하나님께서는 이 청년에게 한량없는 은혜를 부어주셨고, 이 청년은 눈물로 회개하며 다시 주님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영국교회에는 예배시간후, 성도들 앞에 나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정통이 있었는데, 이 청년이 이 때 성도들 앞에 나와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와 함께 앞으로 주님을 위해 살겠다라는 믿음의 서원과 맹세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의 이름은 로버트 로빈슨으로서 훗날 아름다운 찬송시와 찬송가를 만든 유명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일이 있은 후 로빈슨은 자신이 체험한 은혜를 기억하면서 찬송가 시를 한편 쓰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참회하는 마음을 담아 쓴 이 신앙의 시는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28장 복음 근원 강림하사입니다.

    무엇보다 3절의 가사는 그가 방황하던 삶을 회개하고 예배당에 나와 신앙의 서원을 했던 때를 기억하며 지었던 시입니다. "주의 귀한 은혜 받고 일생 빚진 자되네 주의 은혜 사슬되사 나를 주께 매소서 우리 맘은 연약하여 범죄하기 쉬우니 하나님이 받으시고 천국인을 치소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맘은 연약하여 범죄 하기 너무나 쉽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은혜가 나에게 사슬로 되어 나를 메게 해야 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천국 인을 쳐주셔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 많은 죄를 지었고 방황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하나님이 죄에 빠진 그를 구원해 주시려고 은혜의 손길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 이제 일평생 그분만을 바라보며 살기를 서원합니다. 여러분 로버트 로빈슨의 서원, 그리고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의 고백과 서원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도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고난의 때를 지나고 있습니까? 역경의 때를 만나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을 뒤돌아 보면서, 이 고난과 역경 뒤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아뢰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잘못과 죄가 있다라면 정직히 회개하며, 이제부터 하나님만 바라며, 하나님만을 위해 살겠다라는 믿음의 서원과 결심을 하심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고난과 역경을 믿음으로 이겨내 실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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