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페이지
  • 느헤미야 06:01-16/ 하나님의 사명을 끝까지 이루는 삶 [느헤미야]
  • 조회 수: 532, 2018.04.18 15:46:52
  • 우리가 계획하고 진행하던 일들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그 원인은 크게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나의 잘못에 원인이 있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나의 잘못과 상관이 없는 경우입니다. 나의 잘못인 경우는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돌이키면 됩니다. 이것이 완벽한 문제 해결의 정답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것이 해결의 시작일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해결하기 힘든 문제는 내 잘못과 상관없이 우리가 계획하고 진행하는 일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나고 여러 반대에 부딪히는 경우입니다. 특히나 하나님의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나의 실수나 잘못과는 상관없이, 여러 가지 어려움과 반대의 문제들을 직면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적으로 이것을 사단의 방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일은 주로 사단의 방해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단의 존재를 가르쳐 대적 마귀라고 합니다. 마귀는 반대하는 자입니다. 마귀의 반대는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계획하고 진행할 때 더욱 강하게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느헤미야가 경험한 반대는 바로 이런 사단과 마귀에게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이런 방해와 반대를 넘어서서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 즉, 예루살렘 성을 쌓아 올리는 역사를 모두 끝마칠 수 있었습니다. 본문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성 역사가 오십이 일 만에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느헤미야가 사단의 모든 대적과 방해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사명을 성취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6절에 보면 ‘대적들이 모두 낙담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원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역이 성취된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와 함께 하심을 깨닫고, 원수와 대적들이 낙심하게 된 것입니다. 원수들과 대적들 까지도 하나님이 이일을 이루신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성취하게 하심도 그들 스스로 고백하며, 낙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렇게 모든 반대와 핍박이 있었음에도 이일을 이루어낸 느헤미야의 모습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은 것입니다.

    이 일은 인간 느헤미야의 행함이 아닌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느헤미야를 선택하시고, 그를 통해 일하심에는, 느헤미야 자신의 믿음의 삶과 결단의 모습도 귀하게 작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지만, 느헤미야의 믿음을 통해서, 그의 신앙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신 것입니다. 많은 악한 대적들이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지 못하도록 방해하였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런 방해와 반대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믿음과 신앙의 길을 걸어감에 있어서,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소명의 삶을 이루어 가는데 있어서, 느헤미야가 직면한 것과 같은 방해와 반대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교회역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악한 사단과 마귀들의 반대와 핍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오늘 본문의 내용과 교훈에 더욱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느헤미야가 원수와 대적들의 방해와 반대를 어떻게 극복함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온전히 감당했는지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일에 타협하려고 하는 자세를 조심해야 합니다.

    1절과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대적이 내가 성을 건축하여 그 퇴락한 곳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라”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코자 함이라”성벽을 재건하는 사역이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이제 성문만 만들어 달면, 이 사역은 끝이 납니다. 이때, 하나님 백성들의 원수들이 느헤미야와 대화를 시도합니다. ‘우리를 잠깐 보자. 우리랑 대화좀 하자’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의 사역을 방해하기 위하여 사단은 타협의 전략을 구사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원수들은 줄곧 말로 조롱하며 사기를 떨어뜨리려고 했고, 무력으로 방해해서 위협을 주려고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안통하자 이번에는 ‘우리가 서로 만나 이야기하자’고 타협의 의사를 전달한 것입니다. 사실 타협이라는 말은 무조건 나쁜 말은 아닙니다. 타협이란 말은 좋은 의미로도 사용될 수 도 있고, 상황에 따라서 나쁜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면, 모두에게 선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면, 우리는 건강한 타협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더라도, 정치계와 노동계의 갈등을 바라 볼 때, 서로가 너무 극단적으로 대립하여 정치와 산업계가 혼란스러울 때가 있지 않습니까?

    서로의 입장만 이야기 하면서 서로 극단적인 갈등과 대립을 보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럴 때 건강한 타협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동일한 목표 그리고 공동의 선을 나누기 위한 타협은 결코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타협이 악한 의도에서 시작되어 서로에게, 큰 피해의 결과를 초래한다라면, 이 타협은 잘못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는 타협이라면 이것은 용납될 수 없는 타협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적들의 타협안은 (산발랏, 도비야, 게셈) 궁극적으로 느헤미야를 넘어뜨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하고자 하는 타협안이었습니다. 즉 악한 의도에서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하나님의 사역을 중단시키려는 타협안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타협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행이 느헤미야는 이것을 분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2절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 느헤미야는 ‘실상은 나를 해코자 함이라’라고 말함으로 원수들의 궤계를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건강한 타협은 권장하되, 잘못된 타협은 삼가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건강하게 타협해야할 때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고, 잘못된 타협은 스스럼 없이 행한다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분별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한기총의 부정선거로 한국교회가 세상의 손가락질과 큰 지탄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한기총의 문제는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교회들이 힘을 합쳐, 영향력 있는 일을 하자는 의미에서 한기총이 설립됐는데, 나중에는 서로의 명예에 대한 욕심, 정치적인 이권에 대한 욕심 때문에 세상과 타협하고, 잘못된 사상과 타협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한기총의 분열이 가속화 된 가장 큰 문제중 하나는 건전하지 못한 교리를 가지고 있는 교회와 교단들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 뒤에는 많은 정치적인 이해와 금전적인 문제들도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한기총은 해체됐고, 한국교회는 또다시 분열의 아픔을 맞이했습니다. 요즘에는 한 기총이 해체되고, 중구난방식으로 많은 단체들이 생겨났습니다. 저마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단체라고 말은 하지만, 이러한 단체들 역시 명예욕과 정치적인 이해타산 관계 아래 생겨났기 때문에, 사실상 믿음직스럽지 못합니다.

    잘못된 타협에 대한 분별력이 없다면, 한국교회의 앞날은 어두울 수밖에 없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겨났습니까? 하지 말아야할 타협을 했기 때문입니다. 돈에 타협하고, 명예에 타협하고, 세상의 자랑과 타협하고, 개인의 안위 때문에 타협다가 결국 이렇게 된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만약 돈과 명예와 개인적 출세와 안위 때문에 타협을 했다면, 예루살렘 성벽 사역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분별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타협인지, 원치 않으시는 타협인지 분별하여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느헤미야의 분별력을 본받아. 하나님의 교회에 먹칠을 하고, 하나님의 사역에 지장을 초래하는 잘못된 타협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두 번째, 세상의 소문에 귀를 기울이면 안 됩니다.

    원수와 재적들의 두 번째 방해 전략은 중상모략, 즉 음해의 전략이었습니다. 대화를 시도하고 타협을 시도했지만, 분별력 있는 느헤미야는 이를 간파하고 타협을 거절했습니다. 5절과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산발랏이 다섯 번째는 그 종자의 손에 봉하지 않은 편지를 들려 내게 보내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가스무도 말하기를 네가 유다 사람들로 더불어 모반하려 하여 성을 건축한다 하나니 네가 그 말과 같이 왕이 되려 하는도다"

    원수들이 타협으로 안되자 이번에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는 느헤미야의 음해를 시도한 것입니다. 5절과 6절의 말씀이 내용이 무엇입니까? 느헤미야가 페르시아 왕에 대한 반역과 모반을 시도하고 그가 왕이 되려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랴"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아니 땐 굴뚝에도 연기가 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사단의 전략중 하나가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과 하나님의 사역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사단은 자주 거짓말을 퍼뜨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복음서에서(요8:44) 사단을 가르쳐 "저는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런 거짓의 도구가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가 거짓을 말하는 순간 우리는 사단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동네에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많은 헌담과 거짓말로 동네 사람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 돌아 다니던 이 청년이, 어느날 랍비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랍비에게 자기 같은 사람도 용서 받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랍비는 그에게 "정말 용서받기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렇다"고 하자 랍비는 "한줌의 새의 깃털을 주면서 이 깃털들을 마을 동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당신이 한번이라도 거짓말과 헌담을 한 일이 있는 이웃들의 집집마다 다니며 그 집 앞에 깃털을 한개씩 놓고 오라"고 합니다.

    그가 그렇게 하고 돌아 오자 이번엔 "다시 그 집들로 돌아가 그 깃털을 회수해 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청년이 다시 이웃 집들로 갔을 때는 깃털들이 이미 바람에 날아가 버린 후였습니다. 그가 힘없이 돌아와 “깃털 들이 모두 바람에 날아가버렸습니다.”라고 말하자 랍비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들을 용서하지만 당신이 온갖 비방과 헌담을 한 거짓말은 다시는 회수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충고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헌담과 비방, 거짓말의 도구가 되어 악한 마귀의 하수인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느헤미야처럼 온갖 거짓말과 음해의 대상이 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느헤미야는 오늘 본문에서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보내어 저에게 이르기를 너의 말한 바 이런 일은 없는 일이요 네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라 하였나니” 거짓으로 자신을 음해하려고 했던 원수에게 느헤미야는 사실을 밝힘이다. 우리는 여기서 느헤미야의 지혜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거짓 소문을 들을 때 취하는 행동은 두 가지입니다. ‘나는 그런 일이 없으니깐 상관없어. 그것에 대해 대답할 가치도 없어’ 이렇게 생각하면서 사실을 밝히지 않고 가만히 있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소문이 더 커지고 문제가 커질 때 비로서 사실을 밝히지만, 이미 많은 왜곡이 진행된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반대로 거짓 소문의 진상을 파헤지겠다고 과하게 행동하고, 진실이 변명처럼 들리게 되어 신뢰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너무 소극적으로도 접근하지 않았고, 반대로 너무 적극적으로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균형 있게 이일에 대해서 접근했습니다. 그는 사실을 밝힙니다. 그리고 그 이상 변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느헤미야의 모범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가 기도했다라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모든 진실을 아시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단순히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기도가 아니라 자기의 사명인 예루살렘 성 건축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을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8절에서 느헤미야는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라고 기도를 합니다. 느헤미야가 기도한 것은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존심 보다도 더 중요 일,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소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얼마나 멋진 기도입니까?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거짓 음해를 받고 계십니까? 진실을 말하고 사실을 밝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런 후 더 이상 그 일에 매달리지 마시고 모든 것들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소문에 귀를 기울이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모든 것들을 맡기시고, 우리는 우리의 소명을 끝까지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하셔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원수들의 타협의 유혹과 거짓말의 공격에 분별력 있고, 지혜롭게 대처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안위보다 하나님의 사명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에, 기도함으로 이 모든 것들을 극복해 내었습니다. 무엇보다 느헤미야는 말씀에 대한 순종과 경외함으로 자신에게 온 원수들의 반대를 극복해 내었습니다. 1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후에 므헤다벨의 손자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가 두문불출하기로 내가 그 집에 가니 저가 이르기를 저희가 너를 죽이러 올 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있고 그 문을 닫자 저희가 필연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하기로"

    지금 원수들은 스마야라는 거짓 선지자를 매수하여 거짓예언을 말하게 합니다. ‘너를 죽이려 하는 자들이 있으니 성전에 들어가 도피해 숨어 있으라’만약 느헤미야가 이 말을 듣고 성전에 도피하여 숨었으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예루살렘 성 역사는 중단될 것입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사역의 현장에서 도피한 비겁자로 소문날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역의 현장에서 우리를 떠나게 함으로 더 이상 하나님의 일이 진척되지 못하게 만드는 것, 이것 역시 사단의 전략이었습니다. 지금도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사명의 자리를 떠나도록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직분자의 자리, 봉사의 섬기는 자리에서 떠나고 싶은 유혹을 받으신 일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우리를 향한 사단의 공작일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지금 어떠한 사단과 원수들의 방해와 반대가 있으십니까? 느헤미야의 모습에서 이 반대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력 있는 타협과 지혜롭게 행동하고, 또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악한 마귀와 세상의 방해와 반대가 있더라도,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함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의 자리를 지키고, 그 일을 끝까지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번호  분류  제목  조회
notice 공지사항 94002
2103 느헤미야 328
2102 느헤미야 346
느헤미야 532
2100 느헤미야 417
2099 느헤미야 437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