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페이지
  • 느헤미야 11:01-02/ 순종함과 자원함의 소중함 [느헤미야]
  • 조회 수: 499, 2018.04.18 15:55:53
  • 오늘의 본문 느헤미야 11장과 이어지는 12장은 느헤미야와 백성들에 의해 예루살렘 성벽이 건축된 후 이 성을 지키고 관리하는 일꾼들을 세우는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당시 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예전처럼 회복되기 위해서, 한 나라로서의 기능을 온전히 실행하려면, 이제 이 수도인 예루살렘이 잘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느헤미야가 왕의 총애를 받으며 페르시아 왕궁에서 성공의 자리를 박차고 이곳에 온 이유, 그렇게도 심한 방해와 핍박에도 불구하고 끝가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이유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과 부흥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이제 그렇게도 고되 하던 성벽재건이 끝났습니다. 민족의 중심인 수도 예루살렘은 외형적으로 도시의 형태를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성벽을 재건하였지만 정작 그 안에서 살아갈 사람들이 너무나도 적었습니다. 느헤미야가 학개와 스가랴 선자지가 예언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하나님이 이 예루살렘을 부흥케 한다.’라는 말씀을 붙잡고, 예루살렘 성벽을 크고 넓게 재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먼저 자신을 비롯하여 민족의 지도자들을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와 살게 하였습니다. 지도자들이 솔선수범하여, 그동안 정들었던 집에서 나와, 새로운 보금자리인 예루살렘 성안으로 이사를 온 것입니다. 그런데 지도자들은 모두 이사를 왔는데, 아직까지도 일반백성들이 많이 부족하였습니다. 도시를 관리하고, 도시가 제 기능을 발휘하려면 일정 수준의 인구가 필요한데, 아직까지도 그 숫자가 채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첫 번째 방법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10분의 1의 사람들을 제비를 뽑아 예루살렘 성안으로 이주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어찌보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조금 강압적인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예루살렘성안으로 이사하기 싫은데, 지금 있는 집에 있고 싶은데’ 표를 잘못 뽑으면 어쩔 수 없이 이사를 가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스스로 자원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백 프로 스스로 원해서 하는 것입니다.우리는 이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 느헤미야의 지도력과 리더십에 대한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요, 그들의 부흥과 회복은 곧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이 예루살렘성의 재건과 회복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르 하나님의 성으로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 재건과 회복은 하나님의 사명과도 같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교회와 성도들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을 영접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 나라의 사람인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 백성들의 부흥을 위해서 노력했던 모습은, 오늘날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부흥과 회복을 위하여 노력하는 모습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을 회복하려는 모습은 오늘날 교회의 부흥과 회복을 위한 노력과도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 백성들의 부흥을 위해서 예루살렘 성에 행했던 일들은 오늘날 교회의 부흥과 하나님의 백성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사역을 감당하기 위하여 사용될 수 있는 모범적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예루살렘 성의 일꾼과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느헤미야가 사용한 두 가지 방법과 여기에 등장하는 두 종류의 사람들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오늘날 우리 교회와 성도가 배울 수 있는 교훈과 메시지는 무엇인지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제비에 뽑혀 예루살렘 성으로 이주한 사람들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십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가 사는 것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일에 먼저 모범을 보인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백성들은 조금 달랐습니다. 아마 지금까지 정들었던 고향이나, 힘들게 정착해서 자신들이 개척하고 가꾼 삶의 터전을 뒤로하고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힘들게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집을 손수 짓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이제 겨우 농사도 짓고, 가축도 키우며 이제 먹고 살만해졌습니다.




    자식들도 성장하여 함께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가꾸는 재미도 느낍니다. 그런데 갑자기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버리고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와 살라고 합니다. 백성들에게는 이러한 제의는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다시 고되고 힘든 개척의 삶을 시작해야 하는데, 누가 그렇게 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안으로 이주해올 사람들을 구했지만 넉넉한 숫자의 사람들을 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느헤미야는 반 강제적인 수단을 사용합니다. 물론 백성들 역시 하나님의 성이라고 불리우는 수도인 예루살렘이 재건되고, 회복되어야만 자신들의 민족이 부흥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았기에 느헤미야의 방법에 반대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10분의 1만 성안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10분의 9는 자신이 원래 살았던 곳에서 살 수 있었습니다. 제비 뽑기를 하면, 자신들이 뽑힐 확률은 10%로 였습니다. 한마디로 운이 나쁘면 예루살렘 성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적이고 신앙적인 생각은 아니지만 상당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10%로의 확률에 걸려 예루살렘 성안으로 이주해야 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들은 자신들이 정말로 운이 없었다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제비를 뽑혀 반 강제적으로 예루살렘으로 이주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부정적인 모습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면, 밝은 면도 존재합니다.

    긍정적인 면은 제비뽑기로 뽑힌 백성들의 십 분의 일이 아무런 불만도 없이 순종하는 마음으로 예루살렘 성으로 이주 했다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재개발 지역에 가면 이사를 안가겠다. 보상을 조금이라도 더 해달라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이 데모를 하는 장면이 뉴스에 가끔씩 등장합니다. 그들은 대부분 합당한 보상을 해주지 않으면 이곳을 떠나지 못하겠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러한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자신들의 의도한바가 아니었지만, 반강제적인 부분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사역을 위한 것이라면, 자신들의 불편함과 자신들의 아쉬움을 믿음으로 받아 들이겠다라는 것입니다.



    비록 스스로 자원하는 마음에서 하는 것이 아니지만, 억지로라도 순종하겠다라는 마음이 그들 가운데에는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도, 교회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스스로 자발적으로 참여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그러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교회의 사역자들이, 지도자들이 성도들을 지명하여, 직분을 맡기고, 교회의 봉사와 헌신의 자리에 앉힐 때가 있습니다. 어떤 성도님들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렇게 한다라고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일을 위해서 교회의 사역자들이 얼마나 고민하고 기도한 가운데 이런 선택을 했는지 아셔야 할 것입니다.



    느헤미야 역시 얼마나 많은 기도와 고민가운데 이런 선택을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내 기분과 의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백성이 당연히 책임지고 감당해야 할 의무이기 때문에, 여러분 억지로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물론 제일 좋은 것은 기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즐겁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발적인 순종도 소중하지만, 저는 억지로라도 순종하는 것도 소중하다라고 생각됩니다. 이들은 비록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소위 세상 말로 ‘운이 없어서’ 제비 뽑혀 왔지만, 이왕 이렇게 된거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겠다라는 결심을 했던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들은 잠언서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잠언 16장 3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16:33) 이 성경 말씀을 그들이 알았다라면, 그들이 제비를 뽑아, 선택된 것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운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작정하신 일이라는 것을 믿었을 것입니다. 사실 스스로 마음에 우러러 나와서 주의 일에 헌신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대부분 하나님의 하시라고 하니깐, 하나님의 명령이고 말씀이니깐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회에서도 자원하여 헌신하기 보다는 어쩔 수 없이 직분을 맡았으니깐, 구역이나 기관에서 하니깐, 어쩔 수 없이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하더라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한다라면, 그것 역시도 귀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내 마음 상태나 기분 상태, 내가 처해 있는 상황과 환경을 뛰어넘어서 당연히 해야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니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니깐,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이니깐, 그을 책임감을 가지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바라는 것은 이렇게 순종하는 마음이 나중에 자발적인 마음으로 변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순종했지만,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순종했지만, 그 마음이 점차 변하여 억지가 아닌 감사로, 어쩔 수 없음이 아닌 기쁨과 즐거움의 순종으로 변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두 번째, 스스로 자발적으로 자원한 사람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이주한다는 그 자체는 쉽지 않는 헌신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얼른 생각하면 도시에 사는 것이 더 좋을 듯 하지만 당시의 예루살렘 성은 아직 정리되지 못한 상태였고 생활에 필요한 여러 기반 시설들이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성안은 편리한 생활을 보장해 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또한 위기를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것을 시기하는 원수들과 이방민족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들이 제일 먼저 공격한다라면 어디를 공격하겠습니까? 예루살렘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보면 백성들에게 있어서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위험지대로 이사하는 것은 보통 헌신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과 부흥을 위해서 그들은 먼저 예루살렘에 살면서 그 장소를 보호하며 지켜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여러 가지 불편함과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주의 일에 힘쓰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본문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 감사한 것은 그 와중에 스스로 자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이러한 자원자들에게 축복을 빌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명으로 감당하는 일의 시작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소에 먼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역의 장소는 당사자에게 있어서 그리 좋은 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장소에 있기 위해서는 작던, 크던 당사자의 헌신과 포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역의 장소, 하나님의 원하시는 장소에만 있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사명과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북한 땅을 위해 기도하면서, 중국에서 선교사역을 하시는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주로 탈북민 들을 돕고, 조선족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제자 훈련을 하는 사역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이분이 하시는 말씀이 ‘선교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가장 먼저 선교지에 오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나라와 민족가운데, 선교사 본인이 먼저 와서 그 나라와 민족의 땅에서 본인이 먼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을 하는 것.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는 땅과 민족가운데, 선교사 본인이 먼저와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는 것, 그것이 선교의 시작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인생의 말년이 되면, 더 이상 나이를 먹고, 건강상의 이유로 선교를 할 수 없을 때가 되면, 북한 땅이 보이는 곳에서 살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매일매일 북한 땅을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기를 소원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땅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것 역시도 선교라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사역은 우선 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소,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에 내가 서 있는 것입니다. 내 사명의 장소, 내 부르심의 장소에 ‘아멘’으로 응답하고 그곳에 내가 서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하는 마음으로, 또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성이라고 불리 우는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사명의 장소,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소는 어디입니까? 제일 먼저는 우리 섬김의 교회요, 그리고 여러분의 가정일 것입니다. 그리고 섬김의 교회 안에서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의 자리, 하나님의 뜻이 있는 봉사와 헌신의 자리, 직분자의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그곳에 있으십니까? 2절에서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성인 예루살렘 성안에 거주하기로 자원하는 자를 축복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록 쉽지 않는 자리지만, 기분 내키지 않는 자리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리에 서기로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순종이 결심이 시간이 지나면서 감사의 결심, 기쁨과 즐거움의 순종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 우리 섬김의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원하고 계시는 사역의 자리, 우리를 향해 뜻이 있는 소명의 장소에 기쁨과 즐거움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서 있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번호  분류  제목  조회
notice 공지사항 93706
2098 느헤미야 463
2097 느헤미야 396
느헤미야 499
2095 느헤미야 520
2094 느헤미야 722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