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마태에게 큰 선물을 주신 것도 아니고 나사로처럼 죽은 자를 살리신 것도 아니고 죽을 병을 고쳐주신 것도 아닙니다. 다만, 마태의 집에서 같이 잡수셨습니다. 마태는 특별히 받은 것은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셔서 같이 잡수신 것만으로 아주 만족합니다.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마태가 받은 은혜입니다. 저가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은 내가 저와 함께 한다는 뜻이며, 저가 내 집에 오셨다는 것은 나도 그 분의 집에 초대되었다는 뜻입니다.
마태는 직업이 세리인데 그 당시 세리는 탈취자요, 폭행자로서 대표적인 죄인으로 취급되었습니다. 로마 정치가들에게 빌어 붙어서 알랑거리며 권세를 얻어 세금을 많이 포탈해 자기와 로마 정부가 나눠먹는 용납할 수 없는 죄인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이런 세속주의자의 타락적인 인간의 대표인 마태에게 "나를 좇으라" 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는 너무 감격했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예수님이 불렀다는 그 조건으로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엄청난 사랑을 받아들였기에 그는 자기 친구들과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나누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마태의 집에 예수님이 오시느냐였습니다. 만일 "그 곳은 안 된다. 네가 이리 오너라" 하셨다면 문제가 달라졌을 것인데 예수님은 이 집에 오셔서 그의 친구들과 함께 제자들과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물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모습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어찌 세리들과 함께 먹느냐고 힐난을 받았습니다.
갈라디아서 2:11에 보면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유대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벌떡 일어나 나왔다고 합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이 엄하게 책망했습니다. 그런데 세리의 집에 가서 메시야가 음식을 함께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큰 사건이었고 큰 타락이었습니다. 그러나 명예, 체통, 위신 등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랑은 이 집에 가서 그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제 예수님은 좋지 못한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죄인의 친구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리새인들이 비난할 때 대답하시기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죄인 편을 드셨습니다. 여러분,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는 필요하다고 하신 말씀, 얼마나 소중한 얘기입니까? 성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교만한 의인보다 겸손한 죄인을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도도한 바리새인들은 반갑지 않으셨고 비난받고 처절한 죄인인 마태의 집이 마음에 드셨습니다.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 받았을 때 예수님은 불편하셨고 마태의 집에서 오히려 위로를 받으셨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죄인을 의인 되게 하기 위하여 의인이 죄인 되신 그 뜻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귀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작은 정성을 그가 받으십니다. 이제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람에게 우리가 어떤 사랑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받은 그 사랑에 비해서 우리가 주는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이 사랑의 열매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 아버지 하나님, 의인도 아니면서 의인처럼 행세하고 죄인 중의 괴수이면서도 깨끗한 척하는 저희들, 그러기에 뜨거운 회개의 눈물도 없고 그러기에 주님 앞에 무릎도 꿇을 줄도 모르고 병들고도 의원을 찾을 줄 모르는 미련한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간구하오니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귀한 사랑을 깨닫고 우리의 적은 정성을 받으시는 주님, 회개의 눈물을 보시고 사죄의 은총을 베푸시며 우리의 영접에 응해주셔서 주님과 동행하고 주와 함께 살고, 주와 함께 먹고, 마시는 크신 기쁨이 있게 하여 주이옵소서. 그리고 이 은혜에 살고 이 은혜를 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