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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도행전 07:54-60/ 스데반의 죽음 [행]
  • 조회 수: 175, 2014.10.14 11:09:40
  • 1. 스데반은 초대 교회의 집사입니다. 일곱 잡사 중의 한 분이었죠. 스데반은 성령충만하여 순교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일곱 집사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빌립도 열심히 전도한 집사죠. 그러나 니골라 같은 사람은 니골라 당을 만들어 기독교를 대적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다 이런 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12 제자 중에 가륫인 유다 같은 사람도 있었죠. 우리는 직분이 모든 것을 보장한다......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고 내가 직분에 맞게 열심히 신앙생활 해야 하겠다..... 이런 자세가 중요합니다.


    2. 그는 성령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성령충만했지만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하고 순교 당했습니다. 베드로 같은 사람은 성령충만하여 3천명, 5천명씩 전도했습니다. 같은 성령충만이지만 결과가 달랐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성령충만, 교회 부흥.... 이러면 부조건 교회가 커지고, 아름다운 건물을 짓고..... 이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베드로 같은 성령충만이 있고, 스데반 같은 성령충만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청중들의 반응도 엇갈렸습니다. 베드로가 전하니까 형제들아 어찌 할꼬 하면서 회심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자들이 많았는데 스데반이 전하니까 옳은 말씀이지만 귀를 막고 듣기 싫어 돌로 쳐 죽였습니다. 저는 말씀에 은혜 받는 것은 그 사람의 태도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어떤 사람은 베드로와 스데반의 레벨이 틀리지 않느냐.... 아무래도 사도와 집사의 차이가 있는데.... 이런 생각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과 같은 사람은 에디오피아의 재무장관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스데반이 빌립보다 못해서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요? 사람들의 태도지요. 말씀을 은혜로 받으면 회개하고, 고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잘못 받으면 스데반을 친 사라들처럼 귀를 막고 돌로 치는 것입니다.


    3. 그 다음에는 스데반의 죽음을 생각해 봅니다. 잘 죽겠다는 꿈을 가지 사람은 삶이 다릅니다. 죽음을 놓고 생을 보는 사람은 남다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항상 십자가에 죽을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죽는 행위는 사는 행위의 일부다’라는 말은 절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잘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잘 삽니다. 하나님 앞에 영광스럽게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살 때도 영광스럽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꿈이 없는 사람은 삶에 대한 꿈도 없습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자는 헌신, 경건, 자기를 비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도전을 받는 사람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고 도전을 받는 사람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에서 도전이 되는 것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일하다 죽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스데반은 예루살렘 교회에 중심입니다. 그의 나이는 잘 모르지만 추측하건데 30~40대 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장 필요한 유능한 인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한창 일할 그를 불러가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유가 있으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여러분, 일하다 죽고 싶다는 소망은 오래 살고 싶다는 소망과 다릅니다. 스데반을 보면서 뜨거운 것을 느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성령 충만해져서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는 장면을 보면 성령충만했다고 합니다. 성령충만이 무엇입니까? 성령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통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죽을 때 성령충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충만은 은사, 능력.... 이런 것과 연관시켜 생각하기도 하지만 사실 비겁하지 않게 사는 것도 성령충만입니다. 우리는 쉽게 순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눈치나 보면서 쉽게 거짓말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순교할 수 있습니까? 정말 믿음대로 살다가 믿음대로 죽는 것도 성령충만 없이는 안 됩니다. 좋을 때 좋고 화가 날 때도 참는 사람은 성령의 붙들림을 받아야 그렇게 됩니다. 성령충만은 병고치고, 기도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에서도 볼 수 있지만 화가 나도 참고 인내하는 곳에서 더 강력한 성령충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주님의 영광을 보면서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숨이 넘어갈 때 하늘 영광을 보면 얼마나 죽음이 쉽겠습니까? 그런데 교회사의 순교자들은 대체적으로 죽음 직전에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사자 밥이 되고, 화형에 처할 때 성도들이 찬양하면서 죽는 것은 죽음 넘어의 영광을 보기 때문입니다. 터툴리안, 폴리갑이 순교할 때에 화형의 고통 가운데서도 웃으며 불에 탈 때 로마 황제가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동리의 등심불이라는 소설이 있잖아요?  중국 양자강 북쪽 정원사에 있는 등신불을 보면서 단편소설을 썼는데 한 스님이 살아있는 몸을 드리겠다 그래서 한 달 동안 그 몸을 들기름으로 저리다 싶이 하고 그 위에 뜨거운 향로를 올리니 기름에 쪈 몸이 불로 찌져지는 것입니다. 뭐 이런 현장에 비가 내리는데 이 만적이란 스님의 몸이 불타는 데는 비가 오지 않아 사람들이 염불을 외우고 나중에는 그 몸에 금을 부어 등심불이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실제로 그 등심불을 보면 고통에 못 이겨 얼굴은 찡그리게 되고, 등은 구부러져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정신은 고통을 이겨내지만 육제적인 본능은 고통을 감당하기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순교자들의 죽는 모습은 참으로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천국을 믿지만 사실 죽음은 두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곡 하와이 가면 슬라이드가 있는데..... 저는 전 코스를 다 타보지 않았습니다. 첫째는 그 더운 태양 아래 순서를 기다리는 것도 힘들지만 내심 처음 타보는 난코스의 슬라이더에 몸을 싣는 것이 두렵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초등학생 아이들이 한 번은 주저주저하다가 타 보는데 나중에는 정말 신나게 타더라고요. 한 번 타 보니까 재밌거든요. 죽음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도 그렇겠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눈앞에 두면 정말 믿음의 사람이라도 두려운 법이지요. 그러나 이럴 때 하늘의 영광을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죽음을 건너 뛰는 것이 편할까요? 어떤 할머니는 죽다가 살아났는데 죽음 직전에 아름다운 천국을 보며 다시 죽고 싶어서 보름 동안이나 자리에 누워있었다고 합니다.  


    네번 째는 예수님을 닮은 죽음을 죽고 싶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보면 예수님의 죽음을 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예수님과 똑같은 사람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스데반은 살아 있을 때에도 예수님을 닮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고 싶습니다. 스데반은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었습니다. 그가 있었기에 바울이라는 위대한 열매가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스데반이 죽어가면서 저들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았다면 바울은 절대로 위대한 사도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이 죽으면서 썩는 밀알이 되고 그 죽음의 씨앗이 나중에 바울을 배출했고, 바울을 통해 로마제국이 굴복하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절대 헛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죽어서 더 많은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한 번 오는 인생인데 죽어서 더 많은 열매가 맺는 것은 정말 큰 복입니다. 스데반처럼 살고 스데반 처럼 죽읍시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임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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