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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마가복음 10:46-52/ 소경 바디메오 [요약 신구약 새벽설교]
  • 조회 수: 528, 2018.07.26 16:04:04
  •  바디매오는 디매오의 아들입니다. ‘바’는 아람어로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디매오’는 ‘존경받는’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번역하면 ‘존경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름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그는 여리고 성문으로 가는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거지였습니다.  

    당시 여리고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살기에 매우 좋은 지역이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첫 관문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가려는 사람들과 절기마다 그곳을 지나가는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구걸을 할 수 있는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이 여리고성 길목에서 구걸을 하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듣고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흥미로운 것은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시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소리쳐야 맞는 것 같은데 그는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불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령님이 이 사건을 자세하게 기록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고백은 마가복음에서 처음 나왔습니다. 마가복음 이전에는 단 한 명도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에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단어가 종종 등장합니다. 구약에서 메시야를 지칭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된 호칭이 ‘다윗의 자손’입니다. 메시야를 표현하는 가장 합당한 호칭이 바로 다윗의 자손입니다. 따라서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부른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역사적인 호칭이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육체의 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율법을 읽을 수 없었지만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율법을 많이 읽고 연구하는 바리새인들도 눈앞에 계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나사렛 사람들도 예수님을 자신들과 함께 지내던 사람이라면서 무시하고 거절했습니다. 이렇듯 모두가 나사렛 예수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 바디매오 만이 예수님이 구약에서 말씀하고 있는 메시아라고 고백했습니다. 바디매오는 눈이 멀었고 이로 인해 평생을 빌어먹는 거지의 운명이었기에 오직 유일한 희망 메시야를 대망하며 살아왔기에 눈은 멀었어도 단 한 번에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예수를 알아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충분히 메시야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갈망하고, 사모하지 않고서는 주님의 은혜를 입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입기 위해서는 조금 더 절실해 질 필요가 있습니다. 절실한 사람과 절실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삶의 태도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는 일마다 안 되는데 어떤 사람은 그 어려운 일도 척척 해내는 것을 봅니다. 왜 그럴까요? 절실함이 정답입니다. 절실함이 없으면 태도가 무성의해서 감동이 없습니다. 무미건조하고 감동이 없는 삶을 청산해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감싸고 있는 군중들이 시끄럽다고 면박하고, 구박을 해도 개의치 않습니다. 더 큰 소리로 외칩니다. 그의 태도가 얼마나 절실합니까? 마가복음에서는 이 바디매오 사건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제일 마지막 사건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마지막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오늘이라는 기회, 사라지고 영원히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는 지금이라는 이 시간.... 열정적으로, 절실하게, 뜨겁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보라 지금이 은혜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이 곧 구원의 때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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