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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마가복음 11:07-11/ 호산나 [요약 신구약 새벽설교]
  • 조회 수: 745, 2018.07.30 17:28:52
  •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예수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었습니다. 예수님이 나귀새끼 위에 타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어떤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라고 하였습니다. 

    ‘호산나’는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말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호산나’ 라는 말은 이와 함께 말해지고 있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와 당시 유대인들에게 매우 잘 알려진 말인데, 그 뜻은  시편 118편 25-26절에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여기에서 ‘(우리를) 이제 구원하소서’ 하는 말이 ‘호산나’입니다. 그러니까 호산나 라는 환호에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게 되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열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오셔서 이스라엘을 로마 압제에서 구원해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거의 육백년 동안 다른 나라의 압제를 당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시고 독립정부를 세우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우리나라가 독립될 때 사람들이 큰 소리로 만세를 부른 것처럼 ‘이스라엘의 만세! 그리스도 만세!’ 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예수님을 찬송하는 사람들이 나중에 예수님께 실망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실망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외치던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신앙생활에 감정의 문제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지.정.의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감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속을 수 있습니다. 그냥 기도하는 것보다 울면서 기도하면 감동을 받습니다. 그냥 찬양하는 것보다 울면서 찬양하면 감동을 받습니다. 이런 분들이 대부분 신앙이 좋아요. 그러나 간혹 그렇게 울면서 찬송하며 기도하던 자들 중에 어떤 이들은 이 호산나 외치던 사람들처럼 돌변하여 예수님을 돌로 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정이 신앙의 모든 것인 것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너무 감정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신앙을 이끌려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고신교단은 너무 냉냉하다는 소리를 듣기 때문에 감정의 문제는 여기서 그치겠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예수님을 환호하던 무리들이 순간에 돌변하여 예수님을 돌로 치는 자들로 변하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이 세상 나라를 원했습니다. 그들을 핍박하는 로마의 군인들을 한 방에 몰아내는 그런 힘있는 예수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목했습니다. 로마의 군인들을 물리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로마의 군인들에 피투성이가 된채 골고다로 끌려가는 나약한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왕이기는 하였지만 가시 면류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위엄있는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는 환호하며 왕이라도 된 것처럼 예수님을 환영한 군중들이지만 비참한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향해서는 조롱과 침뱉음, 그리고 돌을 던지는 모습으로 돌변한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사람들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군중들이 그를 배척하는 모습으로 돌변했습니다. 제자들까지도 실망하여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교회의 가치를 사람의 수로 평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대형교회에 예수님이 없고 오히려 수십년 동안 성장하지 않고, 자라지 않는 작은 교회에 예수님이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 교회에서 수십년 동안 교회를 섬기고 있는 목사님이 계시다면 그 목사님의 모습이 더 예수님 다울 수도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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