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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마가복음 12:41-44/ 한 가난한 과부의 헌신 [요약 신구약 새벽설교]
  • 조회 수: 774, 2018.08.13 18:02:03
  • 오늘 본문에는 한 평범한, 지극 히 평범한 여인의, 그러나 평범하지 않은 비범한 헌신의 스토리가 기록 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42절에 보시면 본문에 나타난 주인공의 정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한 가난한 과부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녀는 가난 했습니다. 경제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성경은 그녀가 과부였다고 말합니다. 외로운 여자였습니 다. 정서적 고통을 안고 있었던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귀감이 되었던 여인의 모습을 우리는 본문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 날 주님은 이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시다가 예루살렘 성전 제일 바깥 에 있는 것이, 소위 이방인이 거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방인의 뜰이 있습니다. 이방인의 뜰이 있고 조금 더 안으로 들어오면 이제 여인들의 뜨락이 있습니다. 여인들은 거기까지 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인들의 뜨락 바로 그 맞은편에 보면 미문이라는 문이 하나 있었어요. 그 미문 곁에 예수님은 성전 입구에 있는 헌금함에 헌금을 드리고 그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41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하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특별히 예수 님의 시선은 한 여인에게 머물렀습니다. 바로 이 여인에게서 예수님은 그 시대의 참된 헌신,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헌신의 한 샘플을 발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이 보여준 그 헌신의 본질에서 우리는 참된 헌금의 자세가 무엇인가 배울 수가 있습니다. 

    첫 째로, 그것은 참된 헌금은 우리의 삶의 주인되신 하나님만을 의식한 결과이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헌금을 드리는 정신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식한 결과가 되어야 한다라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 입구에는 연보궤가 13개나 있었어요. 그리고 이 헌금함은 놋쇠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헌금이라는 것은 지폐가 아니라 동전이었기 때문에 헌금을 딱 집어넣 으면 떨어지는 소리가 납니다. 그런데 아마도 그 당시에 자세히는 몰라도 성전을 관리하던 관리자 측에서는 이 헌금을 증가시키려던 어떤 순수하지 못한 의도를 가지고 놋쇠로 제작했을 가능성도 좀 있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좀 많이 넣는 것, 적게 넣는 것을 돈이 떨어지는 소리를 가지고 구별할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좀 많이 집어 넣으면 쟁그렁 하고서 제법 소리를 내면서 떨어집니다. 그러나 좀 시원찮게 내시면 그것이 소리가 조금 밖에 나지 않는단 말이죠. 이 과부가 얼마를 넣었다구요? 42절에 보시면 두 개의 렙돈 혹은 한 고트란트.... 렙돈이라는 것은 유대 사람의 화폐단위 가운데에서 최 소 단위가 고트란트입니다. 제일 싸구려가 렙돈이였어요. 이 렙돈이 얼마나 되느냐. 한 렙돈이 달러로 환산하면 8분의 1센트예요. 8분의 1센트. 그러니까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10원도 안돼요. 렙돈이라는 말의 뜻 그 자체가 얇다 그런 뜻입니다. 얇다. 그러니까 아주 얇은 동전. 그래서 렙돈을 집어 넣으면 소리도 별로 안나요. 소리도 안나요. 사람들이 어느 정도 내는지를 그 돈의 떨어지는 소리로 알 수 있었던 그 놋쇠 헌금함의 성격으로 미루어보아서 아마 이 여인은 굉장히 주눅이 들었을 수도 있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아예 헌금을 안 했을거예요. 창피 당할려고 뭐하러 헌금을 하겠어요. 그러나 이 순간 이 장면 속에서 하나님만을 의식했던 이 여인의 태도..... 이 여인의 당당한 태도가 이 헌금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던 점이라는 것을 우리가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헌금은 하나님을 향한 드림이라고 믿으십니까? 그러면 다른 것 의식할 필요 없어요. 하나님만 의식하면 돼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 하느냐. 그것은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나의 삶의 주인 되신 그 하나님.... 나는 그 은혜에 빚지고 있다, 그 은혜로 구원받고, 그 은혜로 지금 여기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 나는 다만 그 분의 은혜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몫을 내가 주께 드린다. 이것이 이 여인으로 하여금 내가 얼마를 드리느냐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당당하게 만들었던 헌금의 태도와 정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참된 헌금은 내 삶의 주인 되신 살아계신 하나님, 오직 하나님, 그 분만을 의식한 결정이 바로 헌금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믿습니다.

    두번 째로 참된 헌금은 희생의 정신이 깃들여져 있어야 합니다. 참된 헌금은 희생의 정신이 깃들여져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바치는 제물을 가르쳐서 그 제물을 영어로는 sacrifice라고 그래요. 이 sacrifice라는 단어가 바로 희생이예요. Sacrifice. 그러니까 제물은 곧 희생입니다. 

    이런 질문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헌금을 할 때 어디에 가이드라인을 두고 해야 옳습니까? 이 정도는 내가 희생이 된다.... 왜냐하면 헌금정신 그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 편에서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어떤 응답이기 때 문에 그렇습니다. 자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여인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두 개의 렙돈... 저는 두 렙돈 중에서 한 렙돈만 드려도 하나님이 기뻐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또 그정도도 굉장한 헌신입니다. 왜냐하면 두 개의 렙돈은 오늘 본문에 보면 그녀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그랬어요? 두 개의 렙돈이 생활비 전부다라고 그랬어요. 생활비 전부다. 그런데 한 개의 렙돈을 드렸으면 그녀의 생활비의 절반이란 말이죠. 그 정도만 해도 굉장한 희생이죠. 그런데 두 개의 렙돈을 다 드렸습니다.

    세번째로 참된 헌금이라는 것은 전체를 드릴 수 있는 정신이어야 합니다. 참된 헌금은 전체를 드리는 정신에 근거한 것이다. 전체를 드린다. 진정한 헌금은요 다 드리는 것이예요. 다 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쇼크를 받아 가지고 전 재산 다 바쳐라하는 모양이다. 완전 교주 스타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금정신은 전체를 드리는 정신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정신이라는 말에 위로가 되죠? 

    십분의 일을 왜 드리는가? 십분의 일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맞습니까?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해요. 십분의 일도 주님의 것이죠. 그러나 십분의 일만 주님의 것입니까? 십분의 십 전체가 다 주님의 것이예요. 하나님은 내가 이 사실을 인정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게 바로 십일조란 말이죠. 그러면 내가 십분의 일을 드렸어요.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라 나머지 십분의 구도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십분의 구를 어떻게 사용할까.... 이 십분의 구도 마땅히 그 분의 뜻에 맞도록 관리해야 한다.... 이것이 다 드리는 정신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영국의 어떤 농부가 소를 기르는데 그 소가 새끼를 낳았어요. 송아지를 낳았어요. 두 마리를 낳았어요. 농부가 너무너무 기뻐가지고 자기도 모르게 할렐루야 송아지 새끼 두 마리 낳고서 너무 감사해 가지고 자기 부인보고 여보 여보 송아지 새끼 두마리야 우리 하나는 주님의 것으로 하고 주께 드리십시다. 마누라도 아멘 동의했습니다. 얼마 후에 송아지 새끼 한 마리가 비실비실 앓더니 돌아가셨어요.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농부가 울상이 돼갖고 방안에 있는 자기 와이프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큰일났다고. 뭐가 큰일났어요? 하니 까 주님의 송아지가 죽었어. 주께 드린 송아지가 죽었단 말이예요. 여러분... 여기서 뭐가 틀렸어요? 이 농부는 두 마리가 다 주의 것인데 죽은 것을 주님의 것이라고 우긴 것이란 말이죠.... 아마도 농담이겠지만..... 우리는 헌금을 드릴 때 모든 것을 다 드리는 정신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두신 것인 줄 알고 잘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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