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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히브리서 11:35/ 부활신앙의 선진 [새벽]
  • 조회 수: 699, 2018.12.18 11:43:03
  • 히브리서 11:35/ 부활신앙의 선진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지난주는 37절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 선지자가 톱에 배어 순교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이사야를 공부했습니다. 오늘은 35절로 가서 부활신앙의 선진을 언급한 대목을 살펴보겠습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다”(35)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느 시대인지는 언급하지 않지만, 박해시대 때의 어떤 여인은 자기 가족의 순교를 부활에 대한 소망으로 용납했습니다. 구약보다는 초대 기독교 시대의 일이라 생각합니다. 지금은 부활이 기독교 교리의 한 주제이지만, 초대 기독교 때는 달랐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사건이 자연발생적으로 교회 공동체를 이루게 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 신자들은 부활의 증인으로 불렸습니다. 기독교 출발의 결정적 동기는 어쨌든 부활이었습니다. 당시 신자들이 복음을 전했다는 것은 주님의 부활을 전한 겁니다. 그런데 박해가 닥쳤습니다. 유대교로부터도, 로마정권으로부터도 박해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순교자가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그 뼈아픈 순교의 현실을 초대교회의 여인들은 어떻게 이겼을까요? 부활의 소망으로 이겼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참혹하게 죽지만, 오래지 않아 영광의 부활체로 다시 살아난다는 소망과 믿음으로 현실을 감내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은 종말론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죽은 자의 부활을 대망하고 있지만,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주님이 곧 오시고, 죽은 자들도 곧 부활한다는 믿음으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극심한 고난과 박해를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 소망이 박해의 현실을 수용하고 이겨낼 수 있게 했습니다. 가족의 순교가 억울하기보다 훗날 부활의 소망으로써 위로를 받았습니다. 또한 더 좋은 부활을 위해 순교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35절 상반 절은 가족의 순교입니다. 이것은 부활 소망으로 이겨내고, 35절 하반절은 자기 자신이 당하는 고난과 순교입니다. 이것은 더 좋은 부활을 얻기 위해 달게 당했다는 겁니다.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보통 고문하면 다 배교하기마련인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부활이면 다 같은 부활이지, 더 좋은 부활은 무엇입니까? 부활은 기본적으로 좋은 부활입니다. 영광스럽고 영화로운 부활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심판의 부활이 아니라 영광의 부활입니다.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장 35절 이하입니다. “[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이게 무슨 뜻이냐면, 부활이란 마치 씨앗을 뿌려서 꽃이 피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씨앗은 결코 아름답지 않습니다. 볼품없습니다. 그런데 씨앗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면, 땅에 심어 썩은 씨앗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호박씨와 호박꽃을 비교해 보십시오. 부활은 바로 그런 겁니다. 계란에서 노란 예쁜 병아리가 나오듯 부활은 그런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활은 기본적으로 영화롭고 영광스러우며 아름다운 사건입니다. 애벌레와 나비를 비교해 보십시오. 이런 것이 부활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신비하고 아름다우며 영광스럽고 영화로운 것입니다. 42절 이하입니다. “[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이렇게 부활은 신비하고 영화로운 겁니다. 그런데도 이 영화로운 부활에도 급수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부활은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것인데, 거기에도 급수가 있습니다. 41절입니다.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다 빛입니다. 태양도, 달도, 별도 다 빛입니다. 그런데 엄연히 해의 빛, 달의 빛, 별의 빛, 별과 별의 빛이 다릅니다. 더 좋은 부활, 더 나은 부활이란 말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겁니다. 극심한 박해와 핍박을 겪으면서도 구차하게 빌지 않았습니다. 배교하고 살아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더 좋은 부활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우리 행위와는 상관없이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좋은 부활은 은혜가 아니라 보상입니다. 기본적인 부활은 은혜입니다. 믿는 자는 다 기본적인 부활에 참여합니다. 심판의 부활이 아니라 영광의 부활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더 좋은 부활은 보상이며 댓가입니다. 얼마나 주님을 위해 희생하며 살았는가, 얼마나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살았는가에 대한 보상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냉수 한 잔을 나그네에게 대접해도 그것을 내 마일리지 카드에 적립하게 하십니다. 나중에 결산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주말에 들로 산으로 나가는데, 꼼짝없이 교회에 잡혀 나왔다고 억울해 하지 마십시오. 어떤 이들은 정말 멋지고 편하게 예수 믿는데, 나는 왜 이토록 고생고생하면서 신앙생활 하냐며 억울해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내 마일리지 카드에 다 쌓아 두셨다가, 내가 부활할 때 다 보상해 주십니다. 주님을 위해 당하는 고난은 더 좋은 부활을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익명의 여인들이지만 히브리서 11장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우리가 이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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