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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난_누가복음 22 : 47-53/ 이것까지 참으라 [절기]
  • 조회 수: 532, 2019.03.29 16:47:27

  •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체포될 때에,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마지막 치유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행하신 이적은 대개 오랫동안 병중에 있던 사람을 고쳐주시거나 귀신들린 사람을 깨끗케 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행하신 이적은 베드로의 폭력으로 비롯된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폭력 사건 뒤에 행하신 유일한 기적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는 사건은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는 귀가 잘린 사람과 귀를 잘라버린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요한복음에서는 밝히고 있습니다. 귀가 잘린 사람은 대제사장의 종 말고였고, 귀를 자른 사람은 성미가 급한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는 순간, 베드로는 칼을 내리쳐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떨어진 귀를 붙여주셨습니다. 누가 귀를 붙여주라고 청하는 사람도 없고, 본인도 붙여달라고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이적이 일어나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이적을 행하실 때에 대개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정신병자에게는 믿음을 요구하지 않지만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정신이 온전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그 기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믿음을 보고 고쳐주셨다고 하는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사람에게는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이 사건은 치유 받는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신 일이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기적이라 하겠습니다. 주님의 이적은 받을만한 근거나 그릇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필요한 때에는 필요한 장소에서, 필요한 사람에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건은 주님 편에서 행하신 철저하게 일방적이고 주도적인 것이었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의 참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됨됨이를 보려면, 그 사람을 칭찬하거나 욕했을 때에 어떻게 감당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영광을 누릴 때에 실수하기 쉽습니다. 굴욕을 당하고 억울함을 당할 때에도 실수하기 쉽습니다.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경황 중에 얼마나 침착할 수 있느냐, 그 때에 얼마나 태연하게 자기 마음의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느냐, 그리고 자기의 본분을 다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대부분은 침착하게 자기 본분을 다하다가도 사태가 다급해져서 당황하게 되면,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자기 페이스를 잃고 본분을 헌신짝처럼 내버립니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본분이 있고, 아버지는 아버지의 본분이 있습니다. 선생은 선생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각자의 본분이 있습니다. 어떤 경황 중에도 우리는 자기의 본분을 지켜야 합니다. 체포되어 가는 순간에도 말없이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지금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시는 상황을 보십시다. 당장 체포되어서 십자가를 져야 하는 엄청난 사건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하는 중요한 문제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귀 하나가 떨어지든 붙든 예수님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사소하고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사소한 일을 그냥 넘기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제자 유다가 여러 차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배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 인사를 하고 뺨에 입맞춤을 합니다. 참을 수 없는 배신의 행위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베드로는 앞뒤 가리지 않고 칼을 휘두르며 경거망동을 합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황 중에도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본분을 지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치유자요, 살리시는 분이요. 능력을 행하시는 뿐입니다. 조금도 당황하지 않으십니다. 주변 상황에 전혀 개의치 않고 본래 하던 일을 다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가끔 선하고 좋은 일을 하려다가도 기분이 나쁘면 하지 않습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거나 조금 당황하게 되면 '에라, 모르겠다' '그 까짓것, 앞뒤 가릴 것 있나'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그런 일을 하게 됐나' 하고 맙니다. 여기에 우리의 약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큰 일 때문에 작은 일을 무시하고, 나 자신을 지나치게 생각하여 남의 일을 소홀히 여깁니다.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경거망동으로 예수님의 주위는 어지럽습니다. 군사들은 예수님을 잡으러 횃불을 들고 따라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의 위치와 본분, 사명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는 평화의 왕입니다. 마음의 동요 없이 여전히 자비를 베푸시고, 병을 고치십니다. 위로하고, 가르치시며, 본분을 다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체포되는 순간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모두 공포에 떨었고, 베드로는 칼을 내리치는 만용을 부립니다. 사실은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갈 때에 예수님께서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검 두 자루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족하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제 어려운 시간이 올 것이니 마음의 무장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검을 사라고 하신 말씀의 뜻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하신 말씀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저 잠만 잤습니다. 이렇게 말씀의 소통이 없었기 때문에 베드로가 만용을 부리는 실수를 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칼을 빼서 휘두를 때에는 그실 제사장의 종 말고의 목을 치려 했던 것입니다. 칼이 빗나가서 귀 하나가 떨어졌지만 이 얼마나 무책임한 행동입니까? 이런 행동으로 예수님을 구할 수 있습니까?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무책임한 만용을 부린 것입니다. 이제 칼을 휘두른 베드로의 행동 때문에 예수님은 폭도의 괴수라는 누명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칼이 빗나가서 머리에 맞지 않고 귀 한쪽만 떨어졌습니다. 이 경황 중에 예수님은 그를 치료하려고 하십니다. 사실 치유할 필요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체포하러 왔다가 귀 한쪽이 떨어질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예수님께 귀를 고쳐달라고 간구한 것도, 요청한 것도 아닙니다. 누구 하나 "이 사람의 귀를 붙여주십시오"라고 말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고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치유자요 메시야로서 본분을 다하고 있습니다. 치유하시는 이적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이 사건 속에서 모범을 보이면서 우리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것까지 참으라"고 제자에게 말씀하시면서 귀를 붙여주십니다. 참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참는다면서 '이 망할놈의 세상' 하고 한탄하는 것은 참는 것이 아닙니다. 억울하고 분할 때에 돌아서서 욕이라도 한번 하십니까? 그것까지 참으십시오. 너무 괘씸해서 말이라도 한마디 해버리고 싶으십니까? 그것까지 참아야만 합니다. "이것까지 참아라" 하신 말씀은 두고두고 깊이 새길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군중들의 외침, 그것도 참아야 합니다. 제사장들의 가증한 행위, 유다의 간사한 웃음…… 모두 참아야 합니다. 로마 군병들의 만행, 빌라도의 불의한 재판…… 이것도 참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마지막 이적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이 주신 말씀을 깊이 생각해볼 것입니다.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면서 귀를 붙여주시고 그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본분을 다하시는 모습-이런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번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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