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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해서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별명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만 원래 크리스찬이라고 하는 이름은 좋은 뜻으로 불리워진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비웃는, 멸시하는 뜻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불렀던 이름이었습니다. 크리스티아누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 그런 이름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해석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전쟁 용어였다고 합니다. 전쟁이 있을 때는 반드시 양극화 현상이 일어나는데 국민의 수가 얼마든지 간에 저 쪽이 아니면 이 쪽입니다. 내 편이 아니면 원수입니다. 이편에 속한 사람은 살고, 저 편에 속한 사람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둘로 나누어 버린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쟁에 모순이 있고 부조리가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전쟁하는 입장에서는 부득이 이런 양극화 현상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편이냐? 하고 묻습니다. 이때에 그리스도 편이다. 즉 그리스도에게 속한 패거리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게 됩니다. 그 편에 속했으므로 이것이 바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도행전 11:26에 보면 안디옥 교회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말이 처음으로 주어지게 됩니다.
두 번째로 제일 흔하게 부르고 자타가 부른 이름이 '제자'라는 이름입니다. 지금 우리는 신자라고 부르고 있지만 초대교회에서는 예수의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제자라고 하는 원문의 의미는 오늘날 학생이라는 개념과는 아주 다릅니다. 랍비와 제자와의 관계는, 오늘날 선생과 학생과의 관계와는 전혀 다르다는 말입니다. 오늘날은 학생이 피아노를 배운다면 피아노만 배우면 그만입니다. 선생의 성품이나 가정생활 또는 그 분의 철학을 배우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피아노만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선생과 학생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랍비와 제자와의 관계에서는 독본이 따로 없으며 그 랍비의 무엇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랍비의 전부를 배우는 것입니다. 랍비의 인격, 성품, 지식, 신앙 등 전체를 본받고 닮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랍비와 제자와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배우고, 따르고, 순종하고, 절대 신뢰하는 것이 제자였습니다. 이 뜻의 좋은 격언으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에서 보여주십니다. "너희는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여기서 말하는 멍에는 죄 짐을 의미하거나 또는 이 어려운 세상에서 사는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멍에는 의인의 고난, 즉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을 가르쳐 주는 말입니다. 내가 당하는 모든 일, 내가 지는 십자가, 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뜻입니다. 내 운명과 같이 가면서, 나와 같이 가면서, 나와 같이 보조를 맞추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어느 골방에서 명상이나 하며 책이나 참고하면서 예수를 배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와 함께 가면서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가면서, 따르면서, 본받으면서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 됨의 표식으로는 그리스도와 같음에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좋고, 일부분이라도 좋으니 예수를 얼마나 닮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물 가운데서 가장 우등생인 제자는 사도 바울인 것 같습니다. 그는 빌립보서 3장에서 예수님의 제자 됨을 신비롭게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를 배우고, 알고, 예수를 얻고 예수 안에서 발견되려고 한다는 신비로운 표현을 썼습니다. 배우고, 얻고, 본받고 그리고 그리스도로 발견되려 했던 것입니다. 즉 내가 나를 보아도 그리스도를 보고, 남이 나를 보아도 그리스도로 발견되도록 하기까지 본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다시 또 말하기를 그리스도처럼 죽어서 그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는 것도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유익하므로 살고 죽는 것을 전혀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로 발견되는 것이 그의 생의 목표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참된 제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전정한 제자는 어떤 사람이라고 말씀합니까? 예수님은 참된 제자의 표식은 오직 사랑에 있다고 했습니다. 해박한 지식이 그리스도의 제자 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살고 닮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닮은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지닌 사랑, 그가 아는 사랑, 그가 행하는 사랑의 질이 그리스도와 같을 때 그 분의 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제자상이며 제자됨의 증거입니다.
이 세상의 사랑에는 피곤과 실망과 낙심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의 허구 때문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아무리 말해도 피곤치 않고, 사랑의 설명은 아무리 해도 모자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귀한 것입니다. 사랑은 나의 이해보다 크고, 때로는 생명보다 더 클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내 몸이 죽어 불사르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까지 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풋사랑, 몽롱한 사랑, 처세적이고 감상적인 사랑.... 등 이런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근원을 모르고 하는 것이므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의 근원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뿌리를 알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서야 비로소 사랑의 이야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사랑의 낱말은 날마다 늘어만 가는데 살기는 점점 힘들어집니다. 이것은 거짓된 사랑이 난무하여 거짓된 사랑으로 괴롭고 서로 속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계시자로 오셔서 사랑의 의미를 온 몸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사랑을 받는 자이므로 나 같은 사랑을 하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 즉 사랑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감격을 낳고 감격은 능력을 낳습니다. 생명을 낳습니다. 여기에 사랑의 신비가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신비로운 능력이 있습니다. 사랑의 화신으로 만들고 고난을 이기는 능력을 만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적인 사랑이 있을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증명서는 오직 하나....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즉 너는 나의 제자로서 왜 나를 모른다고 했느냐? 이유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라는 뜻으로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는데도 한 마디도 비판하지 않으시고, 과거도 묻지 않으시고 오직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과거는 다 지나갔다, 더 이상 상관없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지금.... 지금 나를 사랑하느냐.... 그래서 우리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상관없습니다. 지금 교회에 오기 전에 내가 무엇을 했는지도 상관없습니다. 부끄러움으로 회개하면 됩니다. 문제는 지금입니다. 베드로에게 묻듯이 주님은 제자로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지금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두 번이나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했지만 세 번 째에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잘 아십니다... 라고 얼버무리지요. 그렇게 주님을 사랑한다고 자신하던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을 하니까 정말 그동안 내가 주님을 사랑한 것일까? 주님이 보실 때 그것이 정말 사랑이었을까? 한 번 생각해 보게 된 것입니다. 교리에 맞는 판이한 대답이 아니라 정말 마음에서 생각해 보는 사랑.... ‘내가 정말 주님을 사랑할까?’ 자문해보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주님은 우리를 정말 제자로 인정하고, 우리에게 양을 맡기시고, 능력을 주십니다.
기도 : 사랑받으면서 사랑을 모르고, 사랑 속에 살면서 사랑을 부인하는 어리석은 저희들에게 오늘 다시 말씀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사랑해야 할 줄을 알면서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간구하오니 이제 사랑을 알게 하시며 주의 사랑의 깊은 뜻을 알고 그 사랑을 실천하고 그 사랑 속에서 더욱더 깊은 능력을 체험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사랑으로 살고, 사랑의 능력으로 살고, 사랑의 능력으로 승리의 생활을 하도록 항상 권고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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