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요? (잠언 22장 1~6)
  • 조회 수: 63, 2013.03.21 22:05:16
  •  아이들은 태중에서 대개 8주부터 어렴풋이 소리에 반응하다가 5개월째 부터는 소리를 잘 듣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즈음 태교음악까지 등장해서 좋은 소리를 들려주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미국의 도로시 리탈락 박사는 최근 2년동안 템블뷰엘 대학에서 음악이 식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지속적으로 실험했습니다. 하루에 세 시간씩 록 뮤직과 사탄적인 음악을 식물에 들려 주었더니 한 달도 못가 끔찍한 결과가 나왔는데 어린 호박에 주름살이 생기고 토마토는 납작해 졌으며 옥수수는 구부로졌다는 것입니다. 반면 왈츠나 세레나데를 들려준 식물은 생기를 띠고 싱그럽게 자랐으며 열매도 알차고 윤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이 민족의 장래가 우리 자녀들에게 달려 있는 것을 아는 부모나 기성 세대들의 마음은 한결같이 자녀들을 어떻게 하면 잘 가르칠까를 고심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말세적 상황속에서 별다른 대책없이 자녀들은 방황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땅히 행할 길은 아이에게 가르치라” 아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유아,소년,어린이,청년”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 격언에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은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이 고리군에 의해 함락되었을 때도 군대에 의해 망항 것이 아니라 교육이 바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히브리 민족의 조기교육은 유명합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2000년이란 긴 세월속에서도 언어, 문화, 역사전통을 계승하여 마침내는 독립하여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은 그들의 자녀교육, 곧 정신이 살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시127:3)이라고 했습니다. 자녀처럼 귀한 선물은 없습니다.

    영국사람들이 흔히 쓰는 격언에 “집안에 애들이 없는 것은 지구에 태양이 없는 것과 같다.” 자식들 때문에 고생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자녀들 때문에 맛보는 위로와 기쁨은 큰 것입니다.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지만 소 때문에 누릴 수 있는 축복은 못 느립니다. 자녀교육이 부모에게는 말할 수 없는 부담이기도 하지만 자녀를 통해 부모가 누리는 축복은 큰 특권입니다.

    그러면 자녀교육이 중요한 것은 알지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는 것입니까?

    말씀 교육은 모든 것의 근본이요 모든 교육의 1순위가 돼야 합니다.

    순종하는 자녀로 기러야 합니다. 오늘날 이 세대의 교육은 권리를 주로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린이의 권리, 여성의 권리, 노동자의 권리… 이런 것들을 강조하는 자체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권리회복의 수단으로 은근히 저항과 반역을 부추기게 되는 경향이 있음을 부인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 가벼운 체벌을 받은 학생이 경찰에 신고를 하여 교사가 교정에서 연행되어 가는 가슴 아픈 일들이 주변에서 쉽게 일어납니다. 권리나 참여 못지않게 순종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 시대의 무질서나 혼란은 우리가 뿌린 씨의 열매들인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불순종과 반역이 초래한 비극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마귀의 기원이 무엇입니까? 천사장이었던 루시퍼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반역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천사와 마귀의 근본은 같았지만 불순종과 순종의 차이가 천사와 마귀의 차이로 갈라놓았던 것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로 걸러야 합니다.

    자녀교육 가운데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것은 방임적 스타일의 교육입니다. 구체적인 제시가 없는 교육, 교회 교육이나 자녀교육이나 목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흘러가는 대로 되는대로 방임하는 것은 당장 좋은 소리를 들을지 몰라도 함께 죽는 것입니다.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규범이 많아도 문제이지만은 구체적인 제시가 없는 방임적인 교육이나 목회는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부모나 기성세대는 알게 모르게 이미 자녀들이나 차세대들의 본이 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좋은 본인가? 나쁜 본인가? 양육과정에 일시적인 잘못은 있을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자녀가 발못된다면 부모의 책임은 피할 수 없습니다. 자녀들은 가르치는 대로 배우는게 아니라 보는대로 배우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은 안 가르친 것도 배워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거짓말 합니다. 그런데 후에 아들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에 대해 똑 같은 거짓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녀양육은 결국 부모의 사명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어떤 모본을 보이고 있습니까? 자녀의 장래는 무엇을 보고 자라느냐, 무엇을 배우며 자라느냐에 따라 좌우됩니다. 화살은 겨누는 방향대로 나아가게 되어 있어요. 과녁에 맞고 안맞고는 겨누는 자의 책임입니다. 자녀들이 어떤 인격을 형성하고, 어떤 생활관을 갖고, 어떤 가치관과 습관을 갖게 되느냐 하는 인생의 방향이 부모에게 달려 있습니다.

    휼륭한 자녀 뒤에는 반드시 휼륭한 부모가 있고, 문제아의 배후에는 반드시 문제 부모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이 자기 자녀의 잘못된 행동을 교정하지 않고 방치해 둔 것을 심각하게 책망하십니다. 흠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의 아들입니다. 자신이 제사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불량자가 된 거예요. 가정에 욕을 돌리고, 민족에 욕을 돌리고 죽은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자녀들을 징계하고 고치는 데 대표적으로 두 가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는 말로 하는 훈계와 하나는 채찍으로 훈계하는 것입니다.

    잠언 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자녀가 정말 잘 되기를 원하십니까?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십시오. 물질을 물려주는 것보다 지식을 물려주는 부모가 위대하고, 지식을 물려주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은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것입니다. 

    자녀를 잘 양육하는 길은, 잘 인도하는 길은, 다른 길은 없는 것 같습니다. 부모가 몸소 그 길을 가는 거예요. 우리 자녀들을 오늘 믿음의 길로 인도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자가 될 수 있고, 나중에는 영 돌이킬 수 없는 후회의 자리에 이르를 수도 있습니다. 눈물의 자녀는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복된 부모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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