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 부모를 즐겁게 하라(잠언 23:22-26)
  • 조회 수: 231, 2013.03.22 22:12:17
  • 올해는 유난히도 산불이 많은 해였습니다. 강원도 해안에서 일어난 불들은 주민들의 삶의 거처를 잃어버리게 하는 엄청난 불이 일어났습니다. 보도를 통하여서 산불이 일어나기 전과 산불이 일어난 후를 대조하여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불이 나기 전에는 울창한 숲이 있는 산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산에는 온갖 짐승들과 새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이 난 이후의 모습은 참으로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온 숲의 나무들은 잿더미가 되어져 버렸고, 몇 개의 남은 나무도막들은 검게 그을러져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죽은 짐승들의 시체들이 잿더미 위에 이리저리 뒹굴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불로 인하여 산의 제 모양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는 3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려야 한다고 합니다. 중량천의 잉어들이 몰살을 한 장면을 보도를 통하여 보았습니다. 강물이 고기를 살 수 없게 한다면, 더 이상 강물로서의 역할과 구실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이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은 어떠한가?'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산에 불이 나서 제 모습을 잃어버린 것과 같은 모습이 우리의 가정은 아닙니까? 강이 오염이 되어져서 제 구실을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모습이 우리의 가정의 모습은 아닌지요? 가정이 제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가정이 무너지고 있지 않습니까? 가정이 붕괴되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40대 중반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어떤 결정적인 잘못을 했는지는 몰라도 매를 맞고 쫒겨 나가는 장면이 보도되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아들은 재산 문제 때문에 아버지를 살해하는 아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회에 있는 일부의 사건입니까? 나와 전혀 상관없는 특별한 사람들의 일입니까?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 오늘 어버이 주일 가정의 달을 보내면서 심각하게 질문해 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다고 하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의 가정은 어떻게 될 때에 제 구실을 하는 가정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가정의 주인이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의 주인이 하나님이 되지 않으면, 그 가정은 믿음의 가정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르게 설명을 드리면, 우리 모이는 공동체가 교회인 것처럼, 이보다 먼저 가정이 교회가 되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시편 127편에 보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라는 말씀이 기록이 되어져 있습니다. 가정의 주인이 사람이 되기 시작하고, 가정의 주인이 물질이나 성공만능이 되기 시작하면, 그 가정이 아무리 화려하고, 성공하고, 물질적으로 문제가 없고, 좋은 집에 산다고 할지라도 그 가정은 이미 무너지고 있으며, 붕괴되어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믿음으로 살아가는 가정이 무너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가정이 질서를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까? 그 이유는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가정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의 가정이 어떻게 하면 제 모습을 가질 수 있게 되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주인이 된 가정의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서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가족간의 관계가 정상적인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가 정상적인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형제끼리의 관계도 정상적인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드리고 싶은 말씀은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가 정상적이고 제대로 된 관계를 맺을 때에 가정이 교회가 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은 가정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잘 순종하면, 가정이 교회가 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잘 따라가면, 그 가정은 여호와께서 주인이 됩니다. 여호와의 집, 생명의 가정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바꾸어 설명을 드리면, 오늘 주시는 이 본문의 말씀을 자녀들이 순종하지 않으면, 그 가정은 아무리 외형적인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신앙의 가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의 집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2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부모님께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님을 경히 여기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부모님의 말씀이면 무엇이든지 순종하는 자녀가 되고, 부모를 귀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잘 1절에 보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여러분들 저를 한번 따라 해 볼까요? "이것이 옳으니라" 이것이 옳다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네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는 일은 반드시 해야 될 자녀의 의무라는 것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문제가 아니라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자녀가 되었으면 당연히 해야 될 책임이요, 의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더 중요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를 귀중히 여기는 것을 넘어 설 수 있을 때에 진정 자녀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25절 말씀을 다시 한번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부모님을 기쁘게 하라, 부모님을 즐겁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이 말씀은 부모를 순종하고 부모를 귀중히 여기는 것을 훨씬 넘어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고 네 부모를 기쁘게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가장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성도의 모습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이것이 참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요. 또 하나님을 귀히 여길 줄 아는 사람, 이 사람이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로서 믿음의 길을 제대로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그 보다 더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사람, 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신앙인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단순히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귀히 여기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을 즐겁게 하면 가장 좋은 신앙인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고 즐겁게 하는 분이 누구셨습니까? 그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기쁘게 했습니다.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물론 주님이 하나님이십니다 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그의 공생애 3년 동안 남김없이 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까?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희생의 길을 통하여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했습니다. 언제나 자기를 버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십자가에 버리실 때에 십자가에 자기 몸을 희생할 때에, 가장 기뻐하시는 그릇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부모님께 자녀의 바른 자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부모님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 25절의 말씀은 무엇을 전제로 하고 있는가 하면, 희생을 전제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하라, 부모님을 즐겁게 하라"는 것, 그저 부모님 앞에 춤추고 아양을 떨면 그러면 부모님을 즐겁고 좋아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부모님을 즐겁고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부모님을 위하여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부모님을 위하여서 헌신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부모님을 기쁘시게 부모님을 즐겁게 할 수 있다는 말씀이예요.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물론 자식이 아무리 부모에게 희생해도 부모님만큼 희생하겠습니까? 이미 부모님을 먼저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셨습니다. 먼저 우리를 위하여 다 주셨습니다. 특별히 지금 연로하신 어른들, 이분들이야말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녀를 위하여 남김없이 모든 것을 다 희생하신 분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녀 된 우리들 오늘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순종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모님을 즐겁게 하고, 부모님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희생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님을 기쁘게 하고, 부모님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헌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그 가정은 하나님이 주인이 된 가정의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의 히브리적인 배경은 우리 문화와 참 비슷해요. 우리 한국사람의 심성 속에도 이 이스라엘 문화와 같은 비슷한 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은 희생을 통하여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전래되는 이야기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런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병들었습니다. 눈이 하얗게 쌓인 겨울인데 이 아버지가 뭐라고 말씀하는 가 하면, "얘야 복숭아가 먹고 싶다" -요즘은 겨울에도 복숭아가 있지요. 옛날에 겨울에 무슨 복숭아가 있습니까?- 그러나 이 효자는 산 속을 헤맵니다. 눈길에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애쓰면서 산 속을 헤매다가 복숭아를 구해서 아버님께 갖다 드리는 것이 효도라는 것입니다. 어머님이 병이 드셨습니다. "얘야 내가 물고기를 먹고 싶다" 그것도 겨울입니다. 겨울에 그 옛날에 무슨 물고기가 있습니까? 그 두껍게 언 어름을 깨뜨립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잉어 한 마리가 튀어 올라옵니다. -동화 같은 이야기지요. 우리가 만든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 잉어를 들고 어머님께 갖다 드리는 것이 효도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너무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는 집에 아버지가 "얘야 고기가 먹고 싶다" 그러니까 돈이 없어 고기를 살 수 없으니 자기의 허벅지를 베어서 고기를 만들어서 아버지께 해 드렸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 나라 사람의 심성 속에도 무엇이 있느냐 하면, 부모님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할 수 있는 길이 자식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심성입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되어져 있습니까? 지금 우리의 상황이 어떠합니까? 딸 가진 부모님들, 심지어 본인들까지도 누구에게 시집을 가지 않습니까? 맏이에게는 시집 안 갑니다. 왜 맏이에게 안 갑니까? 첫 번째 이유가 부모님을 모시지 않기 위해서 안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내가 맏이가 아니기 때문에 부모님을 모시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말과 같으냐 하면 극단적으로 말씀드리면 부모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겠다는 것이 아니예요. 우리의 심성입니까? 이것이 오늘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의 의미이겠습니까? 성경에 있는 이 말씀은 그 누구도 지키지 않습니다. 아무도 안 지킵니다. 부모를 기쁘게 하고 부모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한다는 옛날 이야기는 하지 마십시오. 무슨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까? 여러분 이 성경 말씀은 옛날에 주어진 말씀이지만,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정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희생하여 부모님을 즐겁게 못하고 있지요? 헌신하여 부모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고 있지요? 회개합시다. 이것이 죄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내가 희생하고 헌신하여서 부모님을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라는 말씀을 순종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저의 교회를 봐도 연로하신 분들 50대 후반 이상된 분들은 부모님을 잘 모셔요. 그분들은 70, 80, 90된 부모님들을 비교적 잘 모십니다. 이제 젊은 사람들은 부모를 효도하지 않으려고 해요. 심각한 문제에 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정을 회복하지 않으면, 이 역사는 희망이 없습니다. 제가 20대 후반에 시골 목회를 할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연로하신 어머님이 신앙이 좋으신 분인데 다리가 아프셔서 도저히 교회를 못나오시게 되었어요. 그리고 귀도 멀고 정신도 약간 치매현상도 있었던 70이 넘은 노모이십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맏아들도 아니예요- 맏아들도 아니고 훨씬 아래의 아들이 모시고 있는데 그 아들이 총각집사였습니다. 제가 목회하는 교회에. "내가 교회가고 싶다" 그러면 이 총각집사가 되는 이분은요 거리가 상당히 멀어요. 윗마을에서 아랫마을까지 와야 됩니다. 그 어머니를 업고 와요. 기쁘게 어머니를 업고 와서 어머님이 앞에서 찬송하고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좋아하던 그 아들이 생각납니다. 그분은 그 교회의 장로님이 되셨어요. 그 시골에서 열심히 교회에 봉사하고 있는 분이예요. 부모님을 위하여 희생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님을 위하여 헌신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님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내 생각에는 맞지 않습니다."라고 대드는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무슨 이성의 법칙과 어떤 절대적인 논리에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즐겁게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다시 한번 이 말씀을 들읍시다. 희생과 헌신을 통하여서 부모를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할 때에 가정이 비로소 교회로 출발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시고, 여러분들 모두가 다 부모님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모님을 기쁘고 즐겁게 하는 것은 또 한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26절을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네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귀를 즐거워 할지어다" 이런 말씀도 있고, 24절 하반절에 보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부모의 기쁨은 부모의 즐거움은 어디에서 오느냐 하면, 자식을 통하여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모가 가장 기뻐하고 즐거워 하는 길은 어떤 길이겠습니까? 그 길은 바로 부모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 부모님이 남겨주신 유업과 기업을 이어가는 사람, 부모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 가는 사람, 이것을 보고 가장 부모님은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에게 좋은 옷 해드리고, 돈 드리고, 여행 시켜 드리고, 그래도 부모님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부모님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드리는 것은 바로 부모님들의 교훈의 기업과 믿음의 유업을 이어갈 수 있는 자녀가 되면 참 부모님은 즐거워하고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양반 문화가 사람을 차별하고 잘못된 권위와 삶을 형식화했다는 것은 틀림없이 잘못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양반문화의 좋은 점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선비문화라는 아주 좋은 문화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무리 국가에서 벼슬을 줘도 벼슬을 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벼슬을 하지 않습니다. 청렴하게 학문을 깊이 공부하는 선비들이 있습니다. 이 선비문화는 아들에게 손자에게 대대로 이 선비문화를 이어간다는 의미에서 양반입니다. 이런 선비문화가 우리나라에 많이 정신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좋은 점이 있습니다. 부모를 기쁘게 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부모님들의 뒤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신부가 될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을 닮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면 나도 이렇게 하고, 예수님이 저렇게 하면 나도 저렇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면 나도 사랑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시면 나도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고, 주님을 닮아가면 가장 좋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가 될 수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부모님을 기쁘게 하고 부모님을 즐겁게 하는 것은 부모님의 인격의 기업과 특별히 우리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신앙의 부모님이 물려주신 믿음의 기업들을 잘 이어가면 부모가 그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해요. 저는 목회를 하며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어른들이 하나 같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 자녀들이 신앙생활 잘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부모님들이 자녀들이 신앙생활을 잘하면 그렇게 좋아하세요. 그런데 제일 걱정과 눈물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 자녀들이 신앙생활하지 않는 것, 내 자녀들이 믿음으로 살지 않는 것, 이것을 그렇게 슬퍼하고 고통 해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결국 부모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길은 자녀된 우리들이 부모님의 신앙의 기업을 잘 이어가는 길입니다. 저는 요즘 저의 형제들을 만나면, 특히 저의 누님들이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요. "너는 어떻게 어른이 되어가면서 그렇게 아버지와 똑같이 닮느냐. 말하는 것도 닮고, 심지어 걸어가는 걸음걸이까지도 닮는다"고 해요. 저는 닮으려고 하지 않았는데 닮은 것 같아요. 외형적인 것은 저절로 닮아지는 것입니다. 이 외형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속모양, 믿음, 인격적인 기업, 자녀들이 잘 이어갈 때에 부모님이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에 보면,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은 누구입니까? 신앙의 선진들입니다. 하늘나라에 먼저 간 성도들입니다. 하늘나라에 있는 성도들이 무엇을 제일 기뻐하고 즐거워하느냐? 우리의 성도들이 운동장에서 믿음의 경주를 잘 달리면 하늘나라에 있는 성도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천국가신 분 계십니까? 먼저 부모님이 이 세상을 떠나 계신 분 계십니까? 천국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녀된 우리들이 부모님의 신앙의 기업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크게 칭찬했습니다. 어떻게 칭찬했습니까?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다.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은 외조모 로이스에게 있더니 그 거짓이 없는 믿음은 네 어머니 유니게에게 있더니 드디어 네 속에도 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외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디모데에게 전수되어진 것이 거짓이 없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디모데가 얼마나 귀하게 쓰이는 하나님의 일군이 되었습니까? 여러분! 부모님을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여 부모님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남기신 신앙의 기업, 특별히 믿음의 기업들을 잘 이어가심으로 말미암아 참으로 부모를 기쁘게 하고 즐거워 하시는 여러분들의 가정을 이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시는 1계명, 2계명, 3계명, 4계명을 주셨어요. 사람에게 주시는 계명이 5계명에서 10계명을 주셨는데, 이 6가지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명령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하면, 살인하는 것보다 더 큰 죄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간음하는 것 보다 더 큰 죄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입니다. 도둑질하는 것 보다 더 큰 죄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헤하려고 거짓 증거하는 것 보다 더 큰 죄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것을 탐내는 것 보다 더 큰 죄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법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은 감옥에 넣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살인하는 것 보다 더 큰 죄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1장 15절에 보면,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라는 이 말씀이 있고, 출애굽기 21장 17절에 보면,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도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했어요. 이만큼 그 당시 율법이 강했습니다. 옛날의 법입니까? 이제는 다 필요 없는 것입니까? 여러분들 오늘 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허하게 서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이 살인하는 것 보다 더 큰 죄라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5계명에는 이런 축복의 말씀이 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장수의 축복을 주시겠다고 그랬고, 그리고 에베소서 6장에 보면 바울은 어떻게 말했느냐 하면, "주안에서 부모를 순종하라 그러면 땅에서 잘되고 네 생명이 길리라" 장수한다.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면 하나님께서 땅의 기업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님을 즐겁게 하는 것은 구제가 아닙니다. 착각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를 즐겁게 하는 것이 구제인 줄 아는 사람이 있어요. 다시 말씀드리면, 그것으로 됐다고 하는 사람,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윤리나 도덕만이 아닙니다. 선행이 아니예요. 부모를 즐겁게 하는 길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으면 살인보다 더 큰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면 땅의 기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다 이 주일을 지나면서 참으로 부모를 즐겁게 하는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제가 한 번 TV에서 이런 보도를 봤습니다. 강이 구불구불하여서 흘러 내려가는 강을 똑바로 만들었어요. 흙으로 된 둑을 다 없애고, 시멘트 콩크리트로 둑을 만들었어요. 놀라운 것은 그렇게 만들어 놓고 문명의 이기로 만들어 놓았는데 물은 점점 더 오염되고, 홍수가 나면 온 동네가 다 물바다가 됩니다. 그래서 가만히 연구해 보니까 이것이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로 되돌렸어요. 물길도 똑같이 옛날처럼 구불구불하게 하고 흙 둑을 다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되더니 흙으로부터 풀과 식물들이 나기 시작했고, 직접 보여 주었는데 물이 놀라운 정도로 깨끗해 졌습니다. 물의 바닥을 흩어낸 것도 아닌데 바닥이 깨끗해 졌어요. 그리고 홍수가 나도 물이 넘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사회가 복잡해지고 문명의 이기가 5년 10년만에 갑자기 뒤바꿔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죄의 길을 걸어가는 가정이 되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가정이 회복되어져야 됩니다. 우리의 가정이 여호와의 집이 되어야 됩니다. 우리의 가정이 교회가 되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자녀된 우리들이 부모님을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라는 가정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의 명령이 지켜야 됩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다 부모님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기 위하여서 희생하십시오. 그리고 헌신하십시오. 그리고 부모님의 신앙의 유업을 이어가는 자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오늘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서 내가 부모님 앞에 어떤 자녀가 되어 있는지를 돌아보시고 잘못되었으면 회개하시는 여러분들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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