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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요한복음 21:1-14/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주일낮]
  • 조회 수: 778, 2013.04.06 16:51:17
  • 에덴동산에 살던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명하셨던 금단의 열매를 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큰 죄를 짓고 만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죄가 수반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동산 숲 속에 숨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동산의 정적을 깨트리고 아담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울려 펴졌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무소부재의 하나님이시기에 그 시각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실 까닭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담을 향하여 구태여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담이 있는 곳, 그리고 그렇게 숨어있는 비참한 그 모습을 스스로가 한 번 보라는 말입니다. 아담을 부르셨던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제자들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계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여러 모양과 방법을 따라 자신을 나타내셨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방황을 하는 것일까요? 그들은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다 예수님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 버렸습니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그들에게는 부담입니다. 차라리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지 않는 것이 그들에게는 부담이 덜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야 그들이 비겁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친한 친구를 배신하고 난 뒤에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 한다는 심리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 뒤에 다시 만난다면 그 배신감 때문에 더욱 더 잔인한 원수로 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악한 심리가 지금 제자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인류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은 대단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 주님의 부활로 우리도 언젠가는 죽은 후 다시 살 수 있다는 둘 도 없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예수님의 부활이지만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이 대단히 껄끄러운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예수님을 외면하고 디베랴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는 것입니다. 그 고기잡이가 결코 유쾌하겠습니까? 옛날처럼 신명이나 나겠습니까? 그러니까 밤새도록 그물을 내려 보지만 그물이 손에 익을 수가 없고, 고기잡이가 제대로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있어야 할 곳은 지금 이 디베랴 바다가 아닌 것입니다.


    이런 형편에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찾아오셔서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하신 말씀을 본문 5절은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이것 역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하나님의 질문과 똑같은 의미였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고기가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셨기 때문이 아니라, 헛되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바른 분별력을 일깨워 주시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흔히 성경에서는 물고기를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가 ikthus로 사용되는데 딱 본문에만 이 물고기의 단어를 다르게 쓰고 있습니다. 바로 prosphagion이란 단어를 사용하셨는데 이 단어의 뜻은 원래 물고기란 의미가 아니라 식탁 위에 올려지는 진미, 즉 진귀한 음식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이 단어의 참뜻을 살리면 주님의 질문은 이런 의미가 됩니다. `얘들아! 너희가 정말 귀한 것을 얻었느냐?'

     

    이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인생에 무엇인가 잡으려고 그처럼 애를 쓰고 있는 우리 손안에 지금 들어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진정으로 귀한 것들입니까? 아니면 허망한 것들입니까?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 5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 말씀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떠나서 인생이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제자들이 그물을 던지던지, 땅을 파든지, 농사를 짓든지..... 그냥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한 번 찝으시면 절대로 배반할 수 없고, 배반한다고 하더라도 숨을 곳이 없습니다. 시편 139편 말씀에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주님이 찝은 인생은 주님의 손에 집힐 때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손에 잡힌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떠나 무엇을 하겠습니까? 주님을 떠나서 무엇을 이룬다고 해도 뭐가 되겠습니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다 헛방이고, 뭔가를 이루어도 허망하고, 만족함이 없고, 마치 쓸쓸한 디베랴 바다에서 힘 빠지고, 맥 빠진 인생 꼴로 주님 앞에 다시 서게 될 뿐입니다.

     

    복음송 중에 이은수 목사님의 찬양으로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하는 찬양이 있습니다. 가사가 이래요. “힘들고 지쳐 낙망하고 넘어져 일어날 힘 전혀 없을 때에- 조용히 다가와 손잡아 주시며 나에게 말씀 하시네. 나에게 실망하며 내 자신 연약해 고통 속에 눈물 흘릴 때에 못자국난 그 손길 눈물 닦아 주시며 나에게 말씀 하시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너는 내 아들이라 나의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

     

    쿠바의 바닷가에 늙은 어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로 나갔으나 어이 된 영문인지 한 마리의 고기도 건져 올리지를 못했습니다. 하루, 이틀, 열흘, 스무날이 너머 무려 여든 사흘이나 지났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빈손이었습니다. 마침내 84일째가 되는 날 길이가 무려 18척이나 되는 거대한 청새치라는 물고기를 만나 사흘 밤낮에 걸친 사투 끝에 간신히 포획하기에 이릅니다. 그 정도의 크기라면 지난 세달 동안 공친 것을 벌충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늙은 어부는 황홀한 만족감으로 집을 향해 뱃머리를 돌렸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늙은 어부는 뜻하지 아니한 상어 떼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이번에는 자신이 잡은 고기를 지키기 위해 상어 떼와 사투를 벌리지만, 해안에 도착했을 때 남은 것이라곤 앙상한 뼈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쓰레기 이상의 의미는 없었습니다. 결국 늙은 어부는 쓰레기 조각을 위해 무려 90여일이나 허비했던 것입니다. 1953년 소설 부문 플리쳐 수상작인 헤밍웨이의 소설「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쫓을 수 없는 것을 끝까지 쫓으려다 허망하게 빈손이 되어 버린 늙은 어부의 두 손― 84여 일 동안 쉼 없이 낚시를 던지느라, 사흘은 낚시줄을 잡고 밤낮으로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느라, 그 이후에는 상어 떼들의 공격을 물리치느라 지칠 대로 지치고 찢어질 대로 찢어져 상처투성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늙은 어부의 공허하고 서글픈 두 손 - 그 손이야말로 바로 지금 디베랴 바닷가에 있는 제자들의 손이 아니며, 더 나아가 우리들의 손이 아니겠습니까?

     

    이 시간 우리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봅시다. 얼마나 지쳐 있습니까? 우리 욕망의 발톱에 할 키우고 쫒겨 온통 상처투성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귀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지 않습니까? 무엇인가 있다고 하더라도 정말 사람들 앞에, 하나님 앞에 자랑할 만한 그렇게 귀한 것입니까? 우리의 영혼을 부요하게 할 만한 영원한 것입니까? 사라질 것들, 실증날 것들, 잠간 달콤하지만 우리 인생을 병들게 하는 것들 아닙니까? 이렇게 우리의 인생이 끝나 버린다면 이보다 더 비참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런 모습의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에게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주님이 진지하게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님께 대답합니다. ‘아무 것도 없나이다.’ 없습니다, 주님! 우리 손안에 정작 귀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법 좋은 것을 얻기 위해 사투를 벌렸지만 만신창이가 되고, 인격은 무너지고,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고, 신앙도 잊어버리고.... 주님 이게 지금 나의 모습이며,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게 바로 제자들의 대답이며, 곧 우리가 주님께 해야 할 대답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손을 내미십니다. 보통 손이 아니라 못자국 난 손을 내미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용서의 손이시며, 화해의 손이시며, 더 나아가 치유와 회복의 손인 것입니다. 이 손을 우리가 잡아야 합니다. 부활은 이미 일어난 일이지만 죄로 가득차고, 주님을 떠난 삶, 주님을 외면한 삶에는 아직도 부활이 없습니다. 부활과는 상관 없는 삶입니다. 주님이 내미는 손을 잡을 때 거기에서 부활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역사합니다. 오늘 우리는 손을 내밀어, 이미 우리를 향해 내밀고 계신 주님의 손을 붙잡는 자들이 되십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붙잡을 때에만 상처투성이인 우리의 손이 치유되고 회복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주님을 붙잡을 때에만 공허한 우리의 손안에 참되고 영원한 것, 정녕 귀중한 것이 담겨질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의 손이 회복되고, 우리의 인생이 회복되고, 치유되고 부활의 능력으로 새롭게 되는 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주님! 오늘 우리의 손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지금 우리 손안에 어떤 귀한 것이 들어 있는지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철부지처럼 살았던 우리가 우리의 손을 주님 앞에 드립니다. 찢어질 대로 찢어져 상처투성이인 우리의 손을 주님 앞에 내밉니다. 밤낮으로 수고하였음에도 텅 빈 우리의 손을 주님 앞에 폅니다. 주님의 자비로우신 손으로, 능력의 손으로, 가련한 우리의 두 손을 잡아 주소서. 상처투성이인 우리의 손을 깨끗하게 치유하여 주옵소서. 공허한 우리의 손을 주님의 진리로, 주님의 생명으로, 주님의 사랑으로, 영원한 것들로 가득 채워 주소서. 주님 안에서 치유되고, 주님의 귀한 것으로 채워진 우리의 손이, 우리 자신과 세상을 살리는 큰 능력의 손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모든 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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