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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사도행전 9:1-20/ 부활절 이후의 삶 [주일낮]
  • 조회 수: 595, 2013.04.13 17:02:25
  • 만약에 유럽이나 미국에서 교회를 다녀본 경험이 있는 분이라고 하면 “부활절 크리스천”이십니까? 라는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기에 당황스러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절 크리스천”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헷갈리기 때문입니다. 말하는 사람의 억양이나 표정에 따라 그 말의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서양에서는 “성탄절 크리스천”이니 “부활절 크리스천”이니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일 년의 많고 많은 날 중 그 날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을 비꼬면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교회의 중요한 절기인 성탄절이나 부활절에 얼굴을 내미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죠. 반갑다는 표정보다는 “뭔 일로 오늘은 나타나셨습니까?” 하는 내심 모욕적인 언사에 가깝습니다. 가던 날이 장날이라더니 ‘오늘은 한 번 교회에 가 볼까’ 하며 모처럼 교회에 나왔는데 “당신은 부활절 크리스천입니까?” 하는 질문을 들으면 정말 기분이 언짢고 마음이 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우리는 부활절 크리스천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사실 이 명칭은 우리 크리스찬들에게 극찬의 용어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자랑스럽게 가슴에 담아야 하는 애정 어린 호칭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절 크리스천 말고 다른 종류의 크리스천은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절 크리스천들은 매일같이 부활의 능력과 힘을 사모하고 부활의 기쁨과 즐거움을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부활절이 없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고 부활절 크리스천들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절 이후 우리의 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활절 전과 그 후는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교회력에 따라 하자면, 부활절은 오순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이제는 성령의 부어지심과 더불어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향해 나아간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사울이라는 한 개인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어떻게 변해가는 지를 그려주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난 그는 먼저 다메섹의 작은 신앙의 공동체 안으로 인도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성령의 선물과 함께 세상을 향한 사명을 받아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오늘 교회력에 따라 행전 9장을 본문으로 삼아 설교한다는 것은 첫째로, 부활절을 경험한 신앙공동체는 오순절 성령강림절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그 최종적 목적은 선교적 사명을 받아 세상으로 향해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개인적인 차원으로써,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한 후에 교회 공동체를 통해 신앙을 전수받고 양육 받으며, 그런 과정을 통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되고 그 후에는 세상을 향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루기 위해 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회심 이야기는 단순히 한 개인의 극적인 이야기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개인을 영웅화 하는 이야기를 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출현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예고했듯이 바울의 출현이 오늘날의 교회를 예고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주님께서 바울을 등장시키시고, 그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주님께서 다베섹 도상에서 그를 만난 것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본문 전체가 제시하는 중요한 주제는 바울 개인의 회심이나 개종이 아니라 “소명”과 “부르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행전 9:1-20은 사울의 “소명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사울의 내면적 삶을 들여다보는 일에 관심을 두는 본문이 아닙니다. 이방인을 향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는 바울의 소명이 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저는 바울이 주님을 만나는 세부적인 과정에 대해서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울을 부르신 후에 어디로 그를 인도하십니까?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를 다소에 있는 신앙공동체로 인도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그를 직접 변화시키시는 게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 그를 맡겼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사용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교회는 평범한 교회입니다. 그 지도자조차도 미친 종교적 열정에 갈갈이 뛰는 바울을 두려워하여 숨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교회로 바울을 인도합니다.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지만 신앙 공동체를 의존해야 했습니다. 즉 자기가 경험한 “놀라운 경험”을 해석하고 그 소명을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그는 신앙공동체에 들어가서 배우고,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 다음에 나오는 아나니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사도행전 9장의 한 부분은 한 개인을 향한 교회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바울은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앞을 볼 수 없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 있었고 그래서 누군가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형편에 있었습니다. 그는 기다리면서 신앙공동체에게 의존하게 됩니다. 즉 교회가 그에게 다음에는 어떻게 하라고 말할 때까지 그는 무기력하게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즉 주도권은 교회가 갖고 있었지 사울 그 자신에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단 말입니다. 그는 다메섹의 신앙공동체를 대표하고 있는 아나니아라 불리는 놀라운 인물에게 인계됩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이라는 인물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를 알았습니다. 매우 폭력적인 사람이고 자기도 감옥에 쳐 넣을 권세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사울에게 가라고 하셨을 때 망설였습니다. 정말 꺼림직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따라 용기를 내어 사울에게 가서 앞으로 그가 주님을 위해 수행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게 안수하고 성령의 선물을 받게 함으로써 그에게 주어진 사역을 하도록 사역자로 임명합니다.

     

    여기서 기억해야할 일은 살아계신 주님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울의 놀라운 다메섹도상의 경험은 기독교 신앙공동체에서 보통 평범한 신자에 불과한 한 사람이 바울에게 그가 받은 소명과 부르심이 무엇인지, 그 소명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식별하고 분별하는데 도움을 줌으로써 완성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순간적 놀라운 신앙의 경험, 극적인 경험만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의 지속적인 지원과 돌봄을 사용하시어 우리의 소명과 사명을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놀라운 회심 경험 그 자체로는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경험은 신앙생활에 기반을 둔 신앙공동체의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비록 한 개인을 사도 바울과 같이 신비하고 기적적으로 불러주셨다고 하더라도 그 개인은 반드시 그의 경험을 교회와 함께 나누며,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무시하면 절대로 주님이 쓰시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결코 초대교회를 무시하지 않았으며, 초대교회도 그와 한 번도 반목한 바가 없고 가장 적절하고, 타당한 방법을 제시함으로 그를 도왔습니다. 초대교회는 교회의 원수였던 바울을 한 번도 편견적으로 본 바가 없습니다. 언제나 그의 지지자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한 최초의 말은 사뭇 감동적입니다. 아나니아는 바울이 머물고 있었던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사울 위에 손을 얹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사울 형제!”라고 부릅니다. 17절이죠. 정말 감동적이고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장면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화해의 능력을 보여주는 극적인 장면들이 여러 군데 있지만 이곳이 가장 압권입니다. 박해를 받았던 아나니아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자기를 박해했던 자를 가리켜 “형제”라고 부르는 순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비로소 이러한 종류의 “화해 공동체”가 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장면에서 바울은 깊은 감동을 받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후에 고린도 성도들에게 편지를 쓴 글에서 고린도후서 5장 18-20절에 의하면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사역을 화해의 사역, 화목의 사역이라고 부르고 있음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직접 들어보실까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일종의 사명 선언문과 같은 바울의 이 고백은 그렇게도 그가 열정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분열과 차별에 대해 항거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유대인과 헬라인, 노예와 자유민, 남자와 여자가 없다고 강하게 말했는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화목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해, 사람과 피조물 사이의 화해에 대해서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시각의 변화는 그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면 한 개인의 변화 뿐 아니라 공동체의 변화도 일어납니다. 다시 말해, 신앙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특성 역시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는 말입니다. 무엇이 신앙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특성입니까? “하나 됨”이 아닙니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화해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 우리는 공동체의 화해를 이끌어야 합니다. 반목은 부활의 효력을 무효로 만듭니다. 누구도 이런 역할을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화해, 협력, 하나를 이루어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절 이후 우리 교회가 깨달아야 할 것이고 이를 위해 전진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무엇이 이 일보다 중요하겠습니까? 


    말씀을 마치면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찬송 하나를 소개합니다. 잠시 후에 부를 차송이지만 “살아계신 주”(Because He Lives)라는 찬양입니다. 특별히 이 찬양의 후렴은 “부활절 크리스천들”이 소유하고 있는 힘과 용기가 무엇인지, 어디서 나오는지를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 번역은 원문의 뜻을 잘 반영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원문과 함께 번역문을 싣습니다. 이렇게 고백 되는 찬송입니다.

     

    Because he lives I can face tomorrow
    그가 살아계시기 때문에, 나는 내일을 직면할 수 있습니다
    Because He lives all fear is gone
    그가 살아계시기 때문에 모든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Because I know He holds the future
    그분이 미래를 붙들고 계시다는 것을 내가 알기 때문에
    and life is worth the living just because He lives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바로 그가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 때문에 내일이 있고, 주님의 부활 때문에 두려움이 없고, 주님이 오늘도 살아계시기에, 그 분이 내 미래를 붙들고 계시기에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 이것이 바로 부활절 크리스찬입니다. 부활절 크리스찬으로 살아가실 것을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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