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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약 민수기 35:9-12/ 도피성 [새벽]
  • 조회 수: 1, 2022.10.17 13:11:12
  •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피하게 하라 이는 너희가 복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민35:9-12)



    오늘의 본문은 구약의 율법이지만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의미를 아주 잘 드러내는 구절 중의 하나이다. 고의가 아니라 실수로 살인했을 때의 구제 방안인 도피성에 대한 규정이다. 고의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기준은 이어지는 16-19절에 나온다. 철, 돌, 나무 연장 등의 살인도구를 소지했는지 또 평소에 피살자와 원한관계가 있었는지 여부로 판단한다. 반면에 우발적인 살인의 경우는 신명기 19:5에 한 가지 예를 들었는데 산에 나무를 벌목하러 갔다가 도끼날이 자루에서 우연히 빠져나왔는데 옆의 사람이 맞아 죽는 그런 경우다.



    살인은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만이 주관하는 생명을 인간이 박탈한 것이다. 하나님을 거역한 죄이자, 엄격히 말하면 하나님 당신을 살해한 꼴이다. 반드시 사형으로 엄중히 다스려야 할 죄다. 그래서 율법은 피살자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 그 흘린 피를 다시 피로 갚을 수 있도록 즉, 죽일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은 단순히 복수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아버지를 살해당한 아들이라면 바로 자신이 죽은 것과 같은, 아니 더 심한 죄악이다. 살인자가 이런 경우를 거꾸로 당했다고 치면 피의 보수는 너무나 당연한 조치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살인은 어떤 경우도 허용되어선 안 된다. 그만큼 서로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라는 뜻이다.



    과실치사를 범한 자는 도피성으로 피신해서 공정한 재판을 통해 실수라고 인정이 되면 그 사형에서 면제된다. 그런데 도피성으로 피신하기 전에는 피의 보수가 가능하다. 죄인은 자발적으로 구원을 받고 싶다는 의지를 표명해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반드시 제 발로 걸어 나와야 한다는 의미다.



    도피성으로 피신하기 전에 자칫 억울하게 죽는 경우를 막고자 이스라엘 곳곳에 여섯 도피성을 설치했다. 그리 멀지 않는 근처에 피난처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운 자는, 언제 주님 다시 오실지 모르고 또 언제 그 생명을 하나님이 앗아갈지 모르니, 무조건 지체 말고 가장 가까운 교회의 문을 두드려야 한다.

    실수로 살인하여 무죄가 입증되어도 남의 생명을 빼앗은 것은 엄청난 과오다. 그래서 도피성 밖으로 나가면 언제든 피의 보수를 당하게 된다. 반드시 도피성 안에서만 거주해야 한다.(25-28절)



    신자도 구원 이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 계속 머물러야만 새로 얻은 새 생명이 힘을 얻고 유지 성장할 수 있다. 참 빛 안으로 들어온 자가 다시 어둠의 세력과 타협 수용 융화할 수는 절대 없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예수님과 교제 동행하는 일을 중지하거나 나태해지면 그냥 조금 덜 경건하거나 중립적 백지 상태에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 모두 경험하듯이 곧바로 죄악에 쓰러지게 된다.



    특별히 25절에 의하면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 안에 거주해야만 하고 그 후로는 도피성 밖에 나가도 피의 보수는 할 수 없다. 완전한 자유를 얻는다. 대제사장은 물론 예수님을 상징한다. 신자의 일생은 예수님과 연합해야 그분의 보호와 인도를 받을 수 있다. 또 하나님이 완전한 용서를 해준 것을 인간이 심판할 수 없다는 뜻이다.



    본문의 도피성 제도는 예수님의 모형이자 그림자이다.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온 신자에게 구원의 취소는 절대 없다. 단 한 가지 조건은 있다. 바로 이 피의 보수 진리를 깨달아야만 한다.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인이었고 자력으로 구원받을 가능성은 0.0001%도 없었음을 고백해야 한다. 오직 예수님 안에 있어야 구원의 효력이 있는 것이다.


    성탄절을 축하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엄청난 구원을 기뻐하며 주님의 생일이 아닌 주님의 오심을 감사 찬양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처음과 끝이 없다. 그분에게 생일은 없다. 돌아가신 기일도 없다. 어떻게 부르는가? 수난의 금요일일 뿐이다. 그리고 부활절만 분명히 있다. 그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날로서 성탄절이 의미가 있다. 그 날이 정해진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언제면 어떻는가? 우리가 예수님을 알면 1년 365일이 메리 크리스마스 할 수 있으니 12월 25일은 더욱 더 메리 크리스마스 할 수 있다. 쓸데없이 날이니, 절기니 하는 인간의 소리로 예수님의 오심의 의미를 퇴색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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