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페이지
  • 교사_신약 디모데전서 1:18-20/ 하나님이 찾으시는 영적 스승 [절기]
  • 조회 수: 541, 2013.05.17 21:04:17
  • 오늘은 스승의 주일이기 때문에 참 스승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참 스승을 논하기 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스승을 존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스승을 사부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스승을 아버지로 알고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스승들이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럽니다. 존경을 받으려면 똑 바로 해야지.... 그러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정말 똑바로 합니까? 함부로 말하는 것을 보니까 그럴 것 같지 않아요. 사실 요즘 선생님들이 얼마나 인격적인지 몰라요. 제가 학생이었을 때에는 교실의 풍경이라는 것이 우선 얻어맞고 나야 뭐든지 되던 그런 때였습니다. 제가 머리가 얼마나 단단한지 몰라요. 왜 단단해진지 아세요. 선생님한테 먼지털이채로, 그 두꺼운 출석부로 엄청 맞아서 달련된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대나무로 만든 먼저털이채로 머리 다섯 대만 딱딱딱딱딱 맞으면 교실이 뒤집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게 가장 가벼운 벌입니다. 마대자루로 얻어맞다가 장단지 터지는 일도 부지기사고.... 언어폭력 지금 기준에 비추어보면 완전 소환감입니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선생님이 대접을 받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선생님 대접이 말이 아닙니다. 선생님 질을 이야기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시대보다 훨씬 좋아졌잖아요. 교양 있고, 인격적이고.... 그런데 왜 선생님들을 그렇게 대하는지 모르겠어요. 이것은 잘못된 물질주의가 만들어낸 풍조입니다. 요즘은 학생들에게 학교는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곳이고, 학원은 꼭 가야 하는 곳.... 이렇게 생각되고 있습니다. 적어도 대학에 들어가야 하겠다... 하는 학생들이 가지는 생각입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곳에 근무하는 선생님이 뭐가 좋겠어요. 사실은 학원 선생님도 마찬가지예요. 학교 보다 먼저 가르치니까 학생들이 배우는 것입니다. 그 보다 더 먼저 가르치는 곳이 있다면 그런 학원 선생님도 찬밥 신세가 되겠지요.
     
    그러나 스승의 길이라는 것이 대접해 준다고, 인정해준다고 가는 길이 아니라 정말 참 스승으로 살아가야 하겠다.... 하는 마음을 품고 가는 길이기에 오늘도 교사로서의 길을 걸어가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하나님도 우리 학교 선생님, 주일학교 선생님에게 기꺼이 박수를 칠 줄 믿습니다. 우리 함께 교사들을 위해 박수를 칩시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3가지 중요한 만남이 있다고 합니다. 부모님과의 만남이요, 배우자와의 만남이요, 스승과의 만남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 중에 훌륭한 스승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예가 있습니다.

    한 여자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너무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거기다가 아기였을 때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습니다. 하나뿐인 동생도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쁜 것은 안질이 악화되어 두 눈을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불행한 인생이 또 있을까요? 이 아이는 조금씩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기구한 운명에 절망하며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지만 죽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 인생을 반전시키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기적은 이 아이가 만난 주일학교 교사의 한 마디 가르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바아바라라 이름하는 그의 주일학교 교사는 이 아이에게 주님의 사랑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여전히 그를 사랑하시고, 그를 향한 놀라운 계획이 있다는 것을 들려주었습니다. 점차적으로 십자가의 사랑이 그녀의 가슴 속에 새겨지는 순간 절망의 어둠이 걷히고 새로운 소망의 햇살이 비쳐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절망의 터널을 빠져나와 새로운 삶의 소망을 품었습니다. 그는 보스톤에 있는 파킨스 맹인학교에 들어갔습니다. 6년간의 노력 끝에 최우등생으로 졸업했습니다. 한 신문사의 도움으로 개안 수술도 하여 성공하였습니다. 새롭게 인생의 눈을 뜬 그녀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헬렌 켈러의 교사였던 셜리번 선생님입니다.

    어느 날 셜리번은 가정교사를 구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 대상은 맹인이요, 농아요, 청각장애를 가진 헬렌 켈러입니다. 셜리번은 그의 과거를 생각하며 헬렌 켈러를 위해 모든 사랑을 쏟았습니다. 그 결과 고통 받는 인류에게 소망의 등불이 된 위대한 헬렌 켈러를 길렀습니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탬플 대학이 헬렌 켈러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했습니다. 그때 그녀를 양육한 위대한 셜리반에게도 박사학위를 수여했습니다. 만약 셜리번이 위대한 스승인 바아바라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또 만약 헬렌 켈러가 위대한 스승인 셜리번의 양육을 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스승의 헌신과 사랑이 한 인간의 운명을 이렇게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봅니다. 아니 인류 전체에게 소망을 주는 위대한 역사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스승은 어떤 스승입니까?
     
      첫째, 아버지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18절에 보면 “아들 디모데야” 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공식적인 편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사랑하는 자녀를 대하듯 “아들 디모데야...” 라고 말씀합니다. 딤전 1장 2절에서도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형식적인 관계가 아닌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영적 스승으로서 가져야 할 중요한 태도는 바로 아비의 마음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굶주려있습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돈이나 명예나 건강이 아니라 사랑의 목마름입니다. 학교교육이든, 가정교육이든, 신앙교육이든... 가장 중요한 본질은 사랑입니다.

      아무리 좋은 지식을 전하고, 좋은 환경을 제공해도 사랑이 없는 교육은 헛수고입니다. 오늘날 많은 부모가 있고, 스승이 있고, 영적 지도자들이 있지만 현실은 참 어둡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4:15) 바울은 해산의 수고를 통하여 자녀를 낳는 심정으로 제자를 양육했습니다. 교육의 위기는 바로 사랑의 부재가 아닐까요? 사랑으로 하지 않는 모든 교육은 휘발류가 없는 엔진과 같습니다.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지존파의 대부 김기환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집이 몹시 가난해서 미술시간에 크레파스조차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매번 크레파스를 가져오지 않는 기환이에게 담임 선생님은 “도대체 이번이 몇 번째냐?"고함을 쳤습니다. 집안 형편을 말할 수 없어서 아무 말도 못하는 그에게 교사는 다시 머리를 세게 쥐어박으며 말합니다. "다음부터는 훔쳐서라도 준비물을 가져와." 친구들 앞에서 창피함을 당한 그는 이때부터 무엇이든지 필요할 때마다 도적질과 강도질을 반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7년 후에는 살인강도 죄로 사형을 언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최후진술에서 "초등학교 때 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제 인생을 바꿔놓고 말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반대의 이야기입니다. 스코틀랜드의 한 교회에 말썽꾸러기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고아로 성격이 난폭했습니다.  어느 날 교회학교 교사가 그를 불쌍히 여기고 옷 한 벌을 선물했습니다. 그런데 그 동정이 기분 나쁘다고 옷을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교사는 그 후에도 두 차례나 옷을 다시 사주었습니다. 그 옷도 역시 쓰레기통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저 아이는 구제불능입니다. 더 이상 사랑을 쏟을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교회학교 교사는 이 소년에게 "네가 옷을 버리는 것은 용서한다. 그러나 교회 출석은 계속한다고 약속해다오."라며 변함없는 사랑과 관심을 표시했습니다. 결국 이 말썽꾸러기 소년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그 유명한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입니다. 그는 중국선교사로 헌신했으며, 영어로 중국어 사전을 집필했습니다. 가장 좋은 교사는 바로 아비의 심정으로 양육하는 자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누구를 가르치는 교사의 입장에 있습니까? 지금 당장 변하지 않는다고 실망하거나 화를 내거나 분을 품지 마십시오. 끝까지 아비의 심정으로 참고 기다려보십시오. 주님의 변치 않는 사랑을 베풀어 보십시오. 반드시 변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반드시 그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아비의 마음으로 양육함으로 풍성한 열매를 거두시는 위대한 부모, 위대한 스승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18절 이하를 보십시오.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바울이 믿음의 아들에게 경계하며 지도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언’입니다. 여기서 예언은 미래의 될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그렇게 심혈을 다하여 가르친 내용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세상의 철학이나 사상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디모데를 양육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복음으로 너를 낳았다” 고백합니다.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복음의 능력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육의 교재는 바로 성경말씀입니다. 말씀을 떠난 모든 교육은 정도를 벗어난 것입니다. 딤후3장 16-1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진리의 말씀인 성경만이 모든 사람을 온전케 하고, 선한 일을 행하는 자로 만들 수 있는 교과서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온전케 만든다는 것을 믿고 있는데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훈련받는 것을 너무 소홀히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교육시키는 이유는 부모를 떠날 때 스스로 먹고 살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함입니다. 저 멀리 서울이나 심지어는 미국, 영국에 가서라도 부모 없이도 잘 수 있도록 능력을 구비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교육은 어떻습니까? 부모를 떠나서 지네들 스스로 하나님 섬기고, 천국백성으로 살 수 있도록 성경을 가르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각국 학생들이 모여서 번지 점프를 하게 되었습니다. 모두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조교가 영국학생에 말합니다. ‘영국 신사답게 멋지게 뛰어내려라!’ 그러자 영국 학생이 신사답게 뛰었습니다. 이번에는 프랑스 학생에게 말합니다. ‘예술적으로 뛰어내려라’ 프랑스는 예술의 나라아닙니까? 그래서 축구를 해도 아트 싸커, 예술적으로 공을 찹니다. 그 말을 들은 프랑스 학생이 예술적으로 뛰어내립니다. 드디어 한국 학생에게 말했습니다. 조교가 한 마디를 하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내립니다. 조교가 뭐라고 말한 줄 아세요? ‘이번 번지 점프는 내신 성적에 반영된다. 알았지!’ 한국 학생은 성적에 반영되면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얼마 전 피디수첩에 ‘죽음의 삼각형’ 이란 동영상이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요즘 우리 자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의 삼각형이 뭔줄 아십니까? 내신, 수능, 논술입니다. 그 어느 것 하나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죽음의 트라이앵글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 영상의 마지막에 자녀들의 생각을 표현하는 자막이 가슴을 섬뜩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가슴 속에 있는 분노와 피해의식은 모두 다 어른인 당신들이 키웠습니다.’ 공부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우리 아이들이 저런 분노의 감정을 가졌을까 돌이켜 보니 참으로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고 행복이 성적순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도 모르게 자녀들을 죽음의 트라이앵글로 몰아넣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더 중요함을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합니다. 학교의 성적보다는 생명의 말씀이 더 소중함을 깨우쳐주어야 합니다. 단순한 대학 진학보다 믿음의 비전을 키우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임을 깨우쳐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의 본을 보이는 부모,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학생들에게 말씀을 읽는 모습, 묵상하는 모습, 말씀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순간순간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는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는 스승이 될 때 우리 자녀들은 세상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로 서게 될 줄로 믿습니다.
     
      셋째, 믿음과 선한양심을 가르쳐야 합니다. 19절 말씀에 보면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서는 파선하였느니라.” 우리들이 가르쳐야 할 중요한 내용은 믿음과 선한 양심입니다. 그런데 믿음에 파선을 하고, 양심을 버린 자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들이 바로 20절에 나오는 후메네오와 알렉산더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이 신앙의 양심을 저버리고 믿음에 대해서는 파선된 자들로 키워서는 안 됩니다.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는 믿음으로 시작하였지만 믿음에 대해서는 파산신고를 받은 자들입니다. 기업으로 치면 잘 나가다가 망한 자들입니다. 요일5:4에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우리가 자녀들을 믿음의 자녀로 키우면 세상을 이기는 위대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자녀로 키우는 부모, 믿음을 가진 학생으로 키우는 영적 교사들이 되십시오.

    그리고 선한 양심을 가진 자로 양육해야 합니다. 벧전3:16절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오늘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선한 양심을 팔아버리면 세상의 조롱거리가 됩니다. 윤동주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나는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 한 시인이 이런 선한 양심을 따라 살기로 작정하며 이런 시를 썼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따라 살아야 하겠다고 결심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해야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멋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가 대통령으로부터 장관직을 제의 받았습니다. "당신의 탁월한 경영솜씨를 발휘해 체신부장관직을 맡아주시오." 워너메이커는 한 마디로 거절했습니다. "나는 교회학교 교사라는 일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대통령은 그가 주일학교 교사의 일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니 장관 일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에게 교회학교 교사직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는 체신부 장관이 되면 더 멋질 것이라고 말해서 결국 장관직을 수락했습니다. 이 소문이 전해지자 기자들이 빈정거리듯 질문합니다. "위대한 미국의 장관직이 한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직만도 못하냐?" 이 질문에 그가 대답합니다. "교회학교 교사직은 지금까지 수년간 내가 지켜온 가치 있는 자리였고 앞으로도 평생 동안 해야 할 본업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장관직은 한두 해 하다가 말 임시직이지요." 그는 5년 동안 장관직에 있으면서 매주 토요일이면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에서 필리델피아 고향에 내려가 어린이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도 훌륭한 시골 주일학교 교사로서 유명했지만 그는 대통령 재임 중에는 주일학교 교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워너 메이크는 그가 더 이상 주일학교 교사로 감당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할 때까지 주일학교 교사직을 수행한 훌륭한 주일학교의 교사상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헌신된 교사가 한 개인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교회학교 교사 여러분! 그리고 성도님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헌신된 영적 스승을 찾고 계십니다. 아비의 마음으로 가르치는 스승,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스승, 믿음과 선한 양심으로 살아가는 참된 스승을 찾고 계십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영적 스승이 되어 여러분이 맡고 있는 학생들 가운데, 자녀들 가운데 이 시대를 변화시키는 영향력 있는 일꾼들이 나올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댓글 0 ...

번호  분류  제목  조회
notice 공지사항 96260
2103 주일낮 925
2102 주일낮 706
2101 주일낮 589
2100 주일낮 630
2099 주일낮 399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