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사람들(마16:21-28)
  • 2013.05.23 14:42:27
  • 오늘의 교회력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이라고 하면 부활절 전에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경건 생활에 힘쓰고, 금식 기도하는 40일 간을 말합니다. 온 기독교회가 지키는 렌트(Lent) 사순절은 [테사라코스테]라고 합니다. [테라사코스테]라는 사순절은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채택한 교회법 제5장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는 철저한 금식 기도가 행해졌습니다. 주일은 금식하지 않고, 평일에만 했기에 6번의 주일을 빼고 보니 성회수요일, 또는 재의 수요일이라는 날부터 지키게 되었습니다. 6주간의 6일, 하면 36일에 수요일부터 지키므로 4일이 추가되어 실제의 금식기도하는 일수가 40일이 된 것이다. 초기의 기독교인들은 저녁에만 식사하고 나머지 아침과 점심은 금식하였습니다. 15세기에 와서는 점심식사까지 허용되어 아침에만 금식하였습니다. 이렇게 금식하는 것은 주님이 당하신 고난을 조금이나마 체험하고, 주님의 고난을 이해하려는 경건생활이었습니다. 성회 수요일이라는 날은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라고도 합니다. 이날에 예배를 드릴 때 극도의 슬픔과 회개를 나타내기 위하여 종려나무를 태워서 생긴 재를 이마에 바르면서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관습은 종교개혁자들에 의하여 폐지되었지만, 이름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거룩한 재- 성회 수요일, 또는 재의 수요일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순절에는 오락을 금하고, 축제들을 금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에 마음껏 노는 축제기간이 생겼는데 그것이 카니발, 즉 사육제라고 하여 육신을 죽이기 위해서 축제를 즐겼습니다. 그것이 서구 유럽과 남미 사회에 있는 카니발입니다. 동방교회들이 금식하고, 회개하는 시간으로 보낸 반면에 서방교회는 자선을 베풀고, 많은 예배시간에 참석하는 것으로 지켰습니다. 우리는 어느 것 하나도 버리지 말고, 종합하여 시간을 정하고 금식 기도하는 것도 좋고, 교회에서 드리는 모든 공 예배에 참석하고 자선을 베푸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교회는 사순절에 특별 새벽 기도회를 가지고 고난 주간에는 저녁 기도회도 가질 예정입니다. 고난주간이 되면 아침을 금식하는 것도 좋은 경건의 훈련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을 예루살렘에 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주로 활동하신 무대는 북부 갈릴리였습니다. 주님이 갈릴리에서만 활동하셨다고 하면 바리새인들에게나 사두개인들에게 핍박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명절이 있을 때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큰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주로 요한복음은 갈릴리에서 활동하신 것보다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데 큰 장애가 되는 것 중의 하나가 그 분은 갈릴리 촌에서만 주로 일하시다가 예루살렘에 와서 죽으신 것뿐인데 메시아이겠느냐 하는 반론이 있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사도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예루살렘에 활동하신 사건들을 중심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는 이스라엘의 행정상의 수도라는 의미 이상 중요한 도시입니다. 이곳은 지금도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도시입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뜻은 '평화의 터전'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12지파 중 유다 족속과 베냐민 족속의 경계에 위치해 있는데 베냐민 지파의 땅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그러나 유다 지파의 다윗왕이 그 땅을 최초로 점령하였기에 다윗 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시대에 이곳에는 여부스 족속이 살고 있었고, 강력한 왕정 체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살렘, 또는 우루살렘이라고 하였다고 하지만 성경적인 확증이 없습니다. 여부스 족속이 살아서 여부스라고도 불리었고, 별명으로는 오홀리바(겔23:4)라고 하였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북왕국 사마리아는 오홀라라고 하였고 남왕국 유다의 예루살렘은 '오홀리바'라고 하였습니다. 그 뜻은 "내 장막이 그녀 안에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이곳에 하나님의 장막인 성전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온산의 이름을 따서 '시온 성', 다윗왕의 도성이기에 '다윗 성', 레위인들은 고라 자손들은 이 성을 '하나님의 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성전이 있는 곳이기에 '거룩한 성이라고 했습니다. 이 도시는 구약 성경의 가장 중심적인 도시였으며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신 곳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성을 아주 거룩한 장소로, 성별하였습니다. 극히 존중히 여겼으며 경모하였습니다. 시122:6에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언제나 마음의 고향이었습니다. 시편137:5-6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 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사모하는 것보다 더 예루살렘을 귀히 여겼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기에 세계 어느 나라에 흩어져 살아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도 습관이 되었습니다. (왕상8:38) 그래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끌려간 다니엘을 비롯한 청년들은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난 창문을 열어놓고 하루에 세 번 씩 기도한 것입니다.(단6:10)

    스가랴 선지자는 이 예루살렘은 장차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모여와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고 구할 것이라고 내다보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될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이 도시는 아주 중요한 곳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며, 여기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시는 모습 그대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장차 주님이 예비하시고 우리를 데려갈 그 도시의 이름이 새 예루살렘이라는 성이었습니다. (계21:2) 그 새 예루살렘 성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지금의 예루살렘에 대하여 간단히 말씀드려 봅니다.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 즉 타이터스가 이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136년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 때에 성이 재건 되었으나 637년 터어키의 칼리프 오말에게 점령되었습니다. 그 후 이슬람교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 예루살렘은 옛날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린 모리아 산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 이슬람교도들은 아브라함이 제물로 드린 아들은 이스마엘이었다고 합니다. 1099년 잠시 유럽의 십자군에 의하여 회복되어 예루살렘 공국이 세워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1517년 터어키 사람에게 들어갔으며, 1920년 국제연맹의 결의로써 영국의 위임통치로 되었다가 재2차대전이 끝나고 1948년에 이스라엘은 독립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의 역사와 발전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은 초대 교회가 태동한 곳입니다. 이곳에서 초대 기독교회는 시작되었고, 이곳 예루살렘이 기독교회의 진앙지로 이 교회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였으며, 복음을 받은 성도들이 이곳을 떠나 유대와 사마리아로, 그리고 전 세계로 나아갔습니다. 이방에 설립된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움을 보고 헌금하여 구제금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교회의 산실이요, 어머니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승천하시면서 부탁하기를 이곳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강림이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시작되었고, 우리 주님이 최후를 맞이하신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이때로부터"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이끌고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지역으로 나가신 때를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예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고백을 듣고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경계하시기를 당신이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신앙고백을 받으시고, 장차 그러한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하는 반석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때로부터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때로부터"라는 말씀은 기독교 역사상 아주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는 부분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있어서 일대 변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후로부터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의 수난을 공개적으로 거듭 역설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수난을 준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의 중심이요, 구약의 율법과 제사의 중심지요, 종교의 수도였습니다. 율법의 완성이요, 예언의 성취로서 오시는 주님은 갈릴리에 머물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실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아시지만, 이제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하신 바였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비된 고난의 잔을 능동적으로 수용하심으로써 인류의 모든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인류에 소망을 주실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 머물고 계셨다면 그러한 고난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보내신 것은 십자가에 달려 죽어 희생의 제물이, 속죄의 제물이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0:18에 보면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정해진 운명으로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못하여 따르는 것이 아니며, 누가 빼앗으니 빼앗기는 것처럼 내어놓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자원하여 십자가로 향하여 나아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철저하게 자원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당신의 목숨을 버리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불가피하게 매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원하여 나아가시는 것입니다.

    에루살렘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장로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산헤드린'이라는 공회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입법, 사법권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 최고의 국회와 같은 기관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로 이스라엘의 운명을 가늠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정치 지도자들이며 종교 지도자이며 교육자였습니다. 각계 각층을 대표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장로'들은 백성의 원로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은 사두개인의 지도자였습니다. '서기관'들 중에는 율법사, 혹은 교법사라고 불리는 이들로 율법을 연구하고 보존하고 가르치는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실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아무리 하나님을 믿어도 반가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나이 30대 초반에 죽음으로 향한다는 것은 쉬운 결단이 아닙니다. 그것도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다는 것은 얼마나 숭고한 죽음인지 모릅니다.

    저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림이나 형상을 볼 때면 마음이 찡해서 제대로 쳐다보지 못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모습이 너무 비참하고 보기 흉하여 똑바로 쳐다보기란 매우 힘든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잔인한 로마 군인들은 전쟁을 많이 하였기에 담력을 기르고, 상대를 무참하게 죽이기 위하여 잔인하게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의 가장 중요한 진수는 십자가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 속에서 다시 태어났습니다. 십자가 속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 따라 다니는 죄의 문제가 다 해결 받은 자리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바로 나를 위한 십자가로 받아들여야 구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죽음이 최종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만약 성경이 말씀하는 복음이 대속의 희생에서 그쳤다면 그것은 사랑과 희생의 복음은 될 수 있었지만, 구원과 승리의 복음은 될 수 없었을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죽음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죽음과 부활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가장 핵심적인 진리입니다. "제 삼일에"라는 말은 24시간 씩 3일간 72시간이 지난 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 중에 일부라도 하루로 계산하여 사흘 째 되는 날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때로부터, 비로소 가르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새로운 것을 '시작하다'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생애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시면서 죽음으로 나아가시는데 지금 우리는 예루살렘을 왜 올라가고 있습니까? 우리들이 예수 믿는 것은 부귀 영화를 위하여 믿는 것이 아닙니까? 나의 가정이 평안해지고, 나의 사업이 안정을 찾고, 번영의 번성으로 가고 싶어 교회를 다니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무슨 까닭이 다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하시던 제자들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큰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표되는 베드로 예수님을 붙들고 간청하였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라고 했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여기 '붙들었다'는 말은 강압적으로 손을 내 밀어 붙들은 것을 말합니다. 이 본문의 평행구절인 막8:32의 말씀도 같은 표현을 하였습니다. 막8:32의 같은 말씀을 수리아 사본에는 "그가 마치 예수를 불쌍히 여기기나 하듯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이 한심스럽고, 기가 막히고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붙들었습니다. '간한다'는 말은 '꾸짖다', '견책한다', '강력히 책망한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책망하는 어투로 예수님의 가시는 길을 가로막고, 어떻게 하든지 그분의 뜻을 돌이키려고 훈육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야고보와 요한은 또 어떠하였습니까? "주의 나라에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자기의 어머니까지 데리고 와서 간청하였습니다. 이 말은 들은 다른 제자들은 두 형제에 대하여 심히 분히 여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나가시는데 제자들은 영광스러운 보좌를 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에도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이것은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눅9:46) 그러한 변론은 언제 있었느냐 하면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을 예고하시는 말씀을 하신 때였습니다. 주님은 지금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으시겠다고 하시는데 제자들은 동문서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이제 승천하시기 위하여 마지막 제자들 앞에 서신 때에도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모르고 따랐습니다. 그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다시 한번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지금 베드로의 말은 예수님에 대한 열정적이고 직선적인 사랑은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철저하게 왜곡하고 구속사의 흐름을 거스리는 인간적인 발상이었습니다. 베드로처럼 혈기방자하게 행동할 때는 사단의 도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우리 주님은 베드로를 꾸짖기 위하여 그 정면으로 몸을 돌리시면서 세 가지를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1)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붙들고 간하고 가로막는 것은 베드로 자신이 아니라 사단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단이 베드로라는 가장 가까운 제자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사단을 향하여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사단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고난 없는 영광과 왕권을 주겠다고 했는데 다시 가로막고 나서는 것입니다. 사단의 집요한 공격은 우리가 죽어 주 앞에 갈 때까지 계속될 것이기에 우리는 끝까지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2)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라고 하셨습니다. 직역하면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는 뜻입니다. 사단은 베드로를 통하여 교묘하게 덫을 놓고 있었습니다.

    3)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해야함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이들이 세상 일하는 것처럼 하시면 안됩니다. 자기 직장에서 세상적으로 하던 습관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으로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수난의 현장에 가시면 안 된다는 것은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수난을 동반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것을 짤라내야 하고, 시간도 드리고 물질도 드리고 마지막 십자가에 생명까지 드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따른다"는 말은 스승의 가르침에 온전히 순복하는 참 제자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1) 나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내가 없는데, 창피한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것이란 본래부터 하나도 없는데 무엇이 그렇게 아까울 것입니까? 내가 없는데, 무슨 영광을 바랄 것입니까? 우리는 나의 옛사람을 철저하게 굴복시켜야 합니다. 나를 부인하지 않으면 나중 어려운 순간에 예수님을 부인하는 꼴을 겪게 될 것이었습니다. 2)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옛날 사형수는 자기가 죽을 십자가 나무를 자기가 지고 형장으로 가야 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놓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지, 영광을 바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잘 죽어야 잘 믿은 것입니다. 3) "좇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현재 명령형으로 한 두 번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억지가 아니며 이따금 따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좇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도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에 서야 합니다. 부귀영화를 꿈꾸던 제자들이 아니라, 주님과 진정 함께 고난받고 주님과 함께 부활의 자리에 들어가려고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이 말씀 중에서 우리가 세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성도들은 현실적인 축복과 유익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섬기고 따르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육신의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원수되게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시몬 베드로는 육신의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는 것을 참 의리 많은 사람처럼 아주 큰소리치면서 반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과 원수되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육신의 생각을 버려야 됩니다.

    마지막 셋째로 고난 동참과 상급약속입니다. 우리 주님의 나라 메시야 왕국은 반드시 옵니다. 우리는 고난에 동참해야 됩니다. 고난에 동참하는 자는 예외 없이 상급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영어에 "No Cross No Crown" "십자가 없는 왕관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고난 당하고 주님을 위해서 욕먹고 주님을 위해서 침 뱉음을 당하고 주님을 위해서 수고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우리에게 상급을 반드시 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모든 축복을 받으려고 하지는 않았는가 이 시간에 우리의 믿음을 반성해 보면서, 우리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좇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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