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와 영광(마16:24-28)
  • 2013.05.24 06:50:19
  •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세상의 영광을 좋아합니다. 학교에서 우등상을 받는 것,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것, 박사가 되는 것, 재벌이 되는 것, 일류 배우나 가수가 되는 것, 미스 코리아에 당선되는 것,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는 것, 대통령이 되는 것 등 이러한 세상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합니까?
     그러나 이 세상의 영광은 너무나 짧습니다. 이 세상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습니다. 이 세상의 영광은 얻었지만 자기 자신은 불행 속에 있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심지어 자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계적인 배우 마를린 먼로는 돈도 많고 인기도 절정에 있었지만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아 날마다 괴로운 밤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약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자살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운동 선수들의 최고의 꿈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한 마라톤 선수 역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얼마나 영광을 누렸습니까? 그러나 한 때는 어디론가 증발해 버렸습니다. 나중에 나타났을 때는 자신에 대해 기대하고 바라보는 사람의 압박감에 못 이겨서 마라톤을 하지 않겠다고 폭탄선언을 하지 않았습니까?
     영광스럽게 보이는 것과 행복은 별개입니다. 아무런 영광을 얻지 못해도 오히려 더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광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바람직한 영광은 하늘의 영광입니다. 하늘의 영광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한 사람들이 누리는 영광입니다. 이 영광은 세상사람들이 알아주지는 않지만 영원한 것입니다. 참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그런데 모든 영광의 배후에는 고난이 숨겨져 있습니다. 고난없이 얻을 수 있는 참된 영광은 없습니다. 큰 고난을 통해 얻은 영광일수록 그만큼 복되고 영원합니다. 영원히 누릴 참된 영광을 얻기 위해서 고난을 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모세는 하늘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좋아했고, 주님을 위해서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이 세상에서 잠시 누리는 헛된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 후에 받을 영광이 얼마나 크고 귀한가를 알고 계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십자가의 고난을 결코 받을 수 없다고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
    요 장차 받을 모든 영광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가 사단입니까? 세상의 헛된 영광만 구하고,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십자가 지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하는 자가 곧 사단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단의 일만을 생각하게 만드는 자가 곧 사단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단에게 속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예수님의 말씀만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24절). 예수님은 일평생 거룩하게 사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거룩하게 살기 원한다면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어떤 고난도 달게 받아야 합니다.
     많은 종교와 운동단체들이 자신들의 상징을 갖고 있습니다. 과거 공산주의자들은 망치와 낫을, 불교는 만자(卍)나 연꽃을, 유대교는 다윗의 별을 자기들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히틀러의 나찌당은 하이젠 크로이츠라는 구부러진 십자가를 자기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의 상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교회 건물 위에는 십자가가 우뚝 서있습니다. 밤에 보면은 교회의 불켜진 십자가가 물
    결치는 것처럼 많이 있습니다. 교회 건물 안에도 다양한 십자가가 있고 목걸이나 반지나 뺏지에 십자가 모양이 자주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십자가 속에 무슨 뜻이 담겨 있길래 이처럼 중요한 상징이 되었습니까?  십자가는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원래 십자가는 단순한 사형기구에 불과 했습니다.  요세프스에 의하면 예수님 계실 때 갈릴리 사람들이 로마를 대항한 혁명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때 2,000명이 붙잡혀 길 양쪽에 십자가 2천개를 박아놓고 2천명을 모두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서운 십자가의 사건을 목격했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했으니 얼마나 실감이 나겠습니까?
     사순절을 지나는 우리에게 "각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십니까?  여러분이 지고 계신 십자가는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고통이라고 해서 다 십자가는 아닙니다. 십자가는 엄청난 고통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고통을 당한다고 해서 모두 십자가를 졌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자기 잘못으로 인해 고생하기도 하고, 잘못 결혼해서 고생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자기가 낳은 자식 때문에 고생을 하기도 합니다. 사업을 잘못해서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모든 경우에 쉽사리도 "내가 십자가를 졌다"라고 말합
    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참십자가에 대한 모독입니다.
     십자가는 희생을 의미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자, 자신을 죽이는 자가 십자가를 집니다. 가장 귀한 것을 얻기 원하면 나머지를 버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술을 먹을래?  떡을 먹을래?  밥을 먹을래?" 이 말은 "술에 밥 말아서 떡 안주해 먹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안됩니다. 하나도 포기하는 희생이 없이는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옛 사람의 죽음을 뜻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자기 
    부인이란 자기의 야망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야망이라는 전차를 타고 갑니다. 그러나 그 끝은 좌절과 허무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상과 꿈을 꿉니다. 그러나 그 이상과 꿈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좌절입니다. 절망입니다.
     옛 사람이 죽어야 새 사람으로 옷을 입고, 내가 죽어야 하나님이 살아나고, 내 꿈이 좌절돼야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집니다. 옛 사람이 죽지 않고는 결코 새 사람으로 거듭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죽기로 결심하고 모든 것을 우리 위해 희생하셨기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유명한 뮤지켤 '예수 그리스도 슈퍼스타'에 보면 십자가를 앞에 둔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흥정하듯이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내가 십자가를 지면 그 보상이 무엇입니까?" 이런 보상을 바라고 희생을 한다면 희생이 있을 수도 없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지 않던가 십자가에서 뛰어 내려왔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보상을 묻지 않는 희생입니다. 눈물어린 아픔의 길인 줄 알면서도 묵묵히 가는 길입니다. 보상을 묻지 않고 절대희생, 절대순종의 길입니
    다.
     예수님은 갈릴리의 어부였던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예수님의 손에 붙잡힘을 받았을 때, 갈릴리에서 이름없이 죽어 갔을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로 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물론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갑자기 신학교 가라는 뜻은 아닙니다. 주를 위해 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주님, 저는 가정이 있습니다. 저는 아이를 키워야 합니다. 저는 지금 사업을 해야 합니다. 저는 은퇴할 나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부르심에 순종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근대 조선의 실학자이자 위대한 저술가인 다산 정약용은 당시 시대를 이렇게 풍자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아는 것은 가마 타는 즐거움 뿐 가마 메는 괴로움은 모르고 있네" 십자가를 메는 희생을 아는 사람은 부활의 영성을 얻습니다.
     감추인 보화의 비유를 보면 밭에서 보화를 발견한 농부가 자기의 모든 것을 팔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습니다. 소유를 포기하는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여순 반란 사건 때 목사님이 심방을 갔습니다. 오는 길에 공비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목사님을 꽁꽁 묶어 창고에 집어넣었는데, 한밤중에 인민군하나가 들어오더니 "여기 예수 믿는 동무 없나?"하고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죽을까봐 겁이 나서 뒤에서 벌벌 떨고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들어와 물었습니다. 한참 있다 세 번째 들어와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이제는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물어갑니다. 따발총을 들이대고 "너 안 믿느냐?" "너 예수 믿지 않느냐?" "너 예수 믿지 않느냐?" 확인해 오더니 목사님의 가슴을 쿡 찌르며 "너 예수 믿지 않느냐?" 하더랍니다. 그때는 사람이 죽으면 한 번 죽지 두 번 죽느냐는 생각이 들어 "제가 목사입니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너 괴수구나. 나와!" 하더랍니다. 목사님 말씀이 인민군에게 끌려가는데 그렇게 마음이 편하더랍니다. 꼭 지옥에서 천국을 향해 가는 것 같았습니다. 이젠 됐다. 이젠 살았다. 죽으러 가지만 승리했다는 생각에 가벼
    운 맘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인민군이 밖으로 나오더니 아무도 없는 곳에서 결박을 풀어주고 "목사님, 빨리 가십시오" 하더랍니다. 그 인민군은 믿는 사람인데, 목사님이 잡혀왔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살려드리려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 나오라고 하는데, 나오지 않아서 애먹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 이것이 십자가 정신인 줄 압니다. 살려니까 복잡하고 문제가 많지, 죽는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우리도 이젠 모두 십자가를 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죽으러 가는 사람들입니다. 죽을 맘으로 하면 세상에 못할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죽어야 살고 잃어야 얻는 줄 압니다. 이 죽음은 '땅'하고 총맞아 순간적으로 순교하는 죽음이 아니고, 순교자와 똑같은 정신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입니다.
     정말 그리스도를 위하여 온갖 것을 다 포기하고 희생하고 죽여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살리십니다. 부활의 기적을 주십니다.
     그 다음에 십자가는 용서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그를 못박은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시옵소서. 저들이 모르고 하는 일입니다"고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이런 용서를 보신 일이 있습니까?  여순반란 사건 때 두 아들을 살해한 공산당원을 양아들로 삼았다는 손양원 목사님의 기가막힌 용서와 사랑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용서하는 것이 용서받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용서는 편히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썩고 내가 녹아지는 아픔이 있어야 상대방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힐 때 고통이 어느 되겠습니까? 십자가의 고통은 필설로 설명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입니다. 너무 괴로워서 예수님도 기절할까봐서 신포도주를 먹여 마취시키려 했습니다. 이런 고통을 내가 당하면서 용서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죄악의 대가를 내 마음속으로 전부 대신 감당하는 것이 용서입니다. 금관을 쓰시고 높은 보좌에서 용서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가시관을 쓰시고 피를 흘리면서 저들을 용서하신 참 용서입니다.  진정 용서하는 자는 용서하는 자의 체면을 깎거나 비굴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그 인격을 존중하여 용서합니다. "나는 흠도 티도 없는 수준높은 신자인데, 너는 참으로 거지 같구나.  이리와 내가 용서해주지"  이런 식의 용서는 십자가의 용서와 거리가 멉니다.  무조건 용서입니다.  하늘보다 더 넓은 맘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빅톨위고의 최대걸작 <레 미제라블>이 있습니다.  주인공 장발장을 끈질기게 평생을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자벨 경사는 장발장이 나중에 어느 소도시의 시장이 되는데, 여전히 장발장의 과거를 집요하게 추적해 그가 탈옥수라는 것을 공개하려 합니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납니니다. 장발장을 존경하는 청년 대원들이 눈에 가시처럼 여기는 자벨 경사를 잡았습니다.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청년들은 그를 총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자벨 경사의 목숨은 풍전등화와 같았습니다. 이 사실을 안 장발장은 그의 사형을 중지시키고 그를 풀어주어 자유인이 되게 합니다.  그때 자벨 경사는 장발장에게 "당신이야말로 나를 가장 죽이고 싶었을텐데 왜 나를 살려줍니까? 왜 입니까?" 고 말합니다.  그때 장발장의 대답이 멋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넓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바다가 땅보다 더 넓고, 하늘은 그보다 더 넓습니다.  그러나 하늘보다 더 넓은 것이 있지요. 그것은 바로 용서라는 관대한 마음입니다."  차갑고 냉혹한 자벨 경사의 얼굴에게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깊은 상념에 빠졌습니다.
     어떤 설교가가 그의 마음을 녹이겠습니까?  오직 그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마음만이 그를 돌이킬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설교하기는 쉽지만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사람을 긍휼과 용서로 대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봅시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셨는데 사랑은 고사하고 "용서"도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며 분쟁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거짓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인도의 간디는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없는 교회, 그리스도를 닮지 않은 그리스도인, 십자가를 지지 않고 영광만 받으려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십자가는 능력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떠나서는 능력과 지혜를 알 길도 없고, 받을 길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권능이 있고, 생명이 있고, 영생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이 되십시다.  비록 우리가 물질에 부요치 못해도,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의 물결이 가슴 가슴에서 넘쳐흐르기 원합니다. 이제, 우리 모든 미움과 시기, 질투, 모든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립시다.  오늘도 저멀리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는 제자들을 주님이 부르십니다. 눈물의 길이요, 고난의 언덕을 올라가야 합니다. 무척 힘들고 괴로운 십자가이지만 순종하는 자는 영광의 상급을 주십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가신 저 눈물의 길, 그 길을 여러분도 외면하시렵니까? 여러분은 그 길을 도망치렵니까?  그 길이 바로 은혜의 길입니다. 그 십자가가 나에게 무한한 영광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고통과 수치로 알았는데, 이제는 그 십자가가 큰 기쁨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비록 고난을 당한다 해도 장차 누릴 하늘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뒤를 이어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저 낮은 곳을 향해 갈 것입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의 신비를 바라보며 주님을 따르고 앞을 향해 순종하며 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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