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의 길(마16:24∼28)
  • 2013.05.24 06:51:14
  • 오늘은 우리 교회력에서 종려주일로 기념합니다. 이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나귀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종려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환영했기 때문에 종려주일로 지킵니다. 종려주일은 서기 325년 리퀴아 종교회의에서 정한 후에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가 지키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부활주일 전부터 40일을 정해서 사순절을 지키는데 우리 교단에서는 사순절을 강조하지는 않습니다. 종려주일부터 시작되는 고난주일과 부활절은 우리 기독교의 중요한 절기입니다. 우리는 이 절기동안에 경건한 마음으로 금식하면서 이 절기를 하나님 앞에 드려야 될 줄로 생각합니다. 종려주일에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사건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신 사건입니다.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고난이 있지마는 그 고난과 고통 가운데에서 가장 힘든 것은 피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입니다. 이것은 내가 절대로 피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되었을 때에 오는 충격은 어떤 것보다도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죽음을 알고 있을 때에 그 고통은 더욱 극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말할 수 없는 수치와 고통을 받을 것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한 "은 그 고통이 심각할 것을 아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은 "그 얼굴에서 땀이 흐르는 것이 핏방울같이 흘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육체적인 고통도 힘든 것이지만 정신적인 고통이 훨씬 힘이 듭니다. 저는 군대의 사병시절에 육군 병참학교 본부대 요원으로 복무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복무한 곳은 학교의 모든 교재를 만들고 관리하고 물품을 구입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간지 얼마 안되어 그 임무를 맡았던 사병이 부정을 저질렀습니다. 저는 일등병으로 업무를 인수받지도 않고 업무 내용도 모른 채 그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제게 일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저 혼자서 약 250가지나 되는 품목을 밤잠도 설쳐가며 재고조사를 하는데 약 한달 가량 걸렸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마음 속으로 고생했겠습니까? 그 당시에 연탄을 나르는 대기병들이 있었는데 그 대기병들은 밥 먹고 연탄 나르고 잠자면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 대기병들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그 대기병들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이것은 정신적인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당하신 정신적인 고통은 얼마나 크셨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주님이 이렇게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신 것은 나 때문에 죽으신 것을 이 시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은 어떤 길이었습니까? 그것은 고통의 길이었습니다. 멸시와 모욕을 당하시고 수치를 당하신 길이고 억울하게 죽으신 길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당하는 고통가운데 억울하게 죽는 것보다 더 심한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멸시받고 수치스럽게 죽는 것입니다. 수치스럽게 죽었다는 것은 다 벗은 채로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여러분, 이 십자가의 죽음은 예전부터 하나님이 계획해 놓고 예정해 놓은 죽음이기 때문에 주님이 피할 수 없었고 또 주님은 이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2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때로부터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베드로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고백했는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어서 "내가 제사장들에게 서기관들에게 바리새인들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삼일만에 부활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예수님, 절대로 그런 일이 있으면 안됩니다" 라고 말하니,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말씀하시며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라고 하시면서 이어서 "네가 나를 따르고자 하느냐? 각각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아니하면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은 우리가 분명하게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따라올 때 이 "나"가 누구인지 알고 따라 오는 것이냐? 확실하게 알고 따라 오는 것이냐? 하는 바로 그 것입니다. 너희가 이것이면 이것이고, 저것이면 저것이지 분명하게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은 죽을 각오하고 따라오라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사람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 사람은 어디에 가도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을 따르고자 하면 확실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인가? 주님이 우주만물의 통치자시요. 주인이시요. 나의 생명의 주권자시요. 내가 그분을 분명히 알았다면 그 분이 나를 위해서 죽으신 죽음에 대해서 내가 감사하면서 보답하면서 나도 목숨걸고 주님을 따라야 하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가치가 분명하게 인정되었으면 그때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구체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 십자가의 길을 주님이 우리에게 따라 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라 가는 길은 죽는 길이요. 십자가가 없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십자가가 없는 교회는 진정한 기독교가 아닙니다. 나에게 이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가? 확실하게 이것을 붙들고 모든 것을 포기하며 따라가야 합니다. 연세대 총장이었던 박태선 박사께서 일본 관서대학교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에 자기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신학교를 가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때 아버지 박상동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신학교를 가고 안 가고는 네 자유다. 하지만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는 것이 대통령 되는 것 보다 더 낫다고 생각되면 신학교에 가라" 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그 말대로 신학교에 갔습니다. 하나님은 그 분을 훗날에 목사가 되고 감리교 신학대학 교수로 있을 때에 사립대 총장으로 발탁되었습니다. 고(故) 박정희 대통령 정권 때 독재 정권과 싸우면서 11년 동안 총장으로 재직했습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그 길이 세상의 대통령보다 믿고 따라간 그 사람을 하나님은 그 명예를 보상해 주셨습니다. 축복해 주셨습니다.

    지난주간부터 우리 교회의 춘계 특별기도회에서 "십자가를 바라보자" 라는 표제를 가지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죽는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하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중의 최고의 신앙은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신앙입니다. 잘 믿으면 사업이 잘 되고 병이 낫고 만사가 형통한 기복 신앙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 유치한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다른 종교에도 다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가 요구하는 신앙이 무엇입니까? 원숙한 신앙의 단계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따른 희생이 있고 헌신이 있어야 됩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과 헌신 때문인데 내가 그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그 은혜의 감격이 먼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감격의 기초 위에 서 있는 믿음이라야 주님을 따라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최근의 기독교 신문에 서울 어느 대형교회의 사건이 실어 있었습니다. 밤중에 목사님의 사택에 강도가 들어 왔습니다. 목사님의 입을 틀어막고 온 몸을 구타했습니다. 그런 후 하는 말이 "네가 교회를 떠날 거야? 안 떠날 거야? 안 떠나면 너를 죽이겠다. 빨리 다른 데로 가거라." 목사님이 너무나 충격을 받아서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경찰이 이 사건을 조사하여 최근에 발표가 되었습니다. 지난 1월에 발생한 이 사건의 내용은 목사님을 반대하는 모 장로님등 9명의 장로님들과 여 전도사님이 공조해서 전과 23범의 폭력배를 청부를 했습니다. 이 곳에다 무려 1억 200만원이나 되는 돈을 사용을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교회가 세상에 있기 때문에 완전하지 못한 것도 이유중의 하나이지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십자가 없는 믿음의 사람들이 교회의 일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은 죽어도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 자기를 부인하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말씀 가운데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자기의 모든 스스로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인 것입니다. 진리를 위해서는 생명을 내놓을 수 있지마는 불의한 일에 대해서는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성도들의 신앙이 언제 이 십자가의 길에서 벗어날 때인지 아십니까? 자기 중심의 생각을 가지고 교회를 다닐 때입니다. 자기 생각에 맞으면 이 교회가 좋고 목사님이 좋습니다.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면 이 교회는 잘못된 것이고 목사님이 잘못된 목사님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신앙은 어떤 것입니까? 먼저 주님의 뜻을 생각합니다. 이 일에 대해서 주님은 어떻게 생각 하실까? 주님은 이 시간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실 것인가? 거기에 잣대를 두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신앙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인 것입니다.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고도의 성숙한 신앙에 도달 해야만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고락을 같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자기만을 생각하지만 어른이 되면 자식을 생각합니다. 그와 같이 우리 신앙의 인격도 고도의 수준에 올라 가야만이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형제의 아픔을 보면서 "주여, 저 형제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고 싸 매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최고의 수준은 무엇입니까? 100%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순종할 수 있을 때 헌신도 하고 희생도 하고 봉사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자기를 부인하는 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죄의 유혹에 이끌려 자기의 일을 좋아하고 죄짓는 것이 좋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속에서 나오는 이런 욕망에 대해서 "아니다" 라고 할 수 있는 그 사람이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말씀에 위배되는 행동에 대해서 "아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 앞에서는 "예"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남자 성도님들 중에 믿음 생활을 잘 하려고 애쓰는 분들이 많습니다. 먹던 술도 끊어야 하고, 좋아하던 담배도 끊어야 하고, 구역예배를 드릴 때에는 직장의 친구들과 교제를 다 제쳐 두고 나와야 하는 등 믿음생활을 바로 하려고 하니 친구들이 다 떨어진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십자가를 지고 죽어라 네 생명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지마는 나를 위해서 생명을 잃으면 얻는다. 인자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올 때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데로 갚아 줄 것이다." 여러분, 주님은 보상을 준비해 놓고 우리에게 죽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존경받는 보상이 준비되어져 있습니다.

    두 번째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려면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 자기 십자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은 진정한 신앙이 아닙니다. 고통도 괴로움도 없고 편안하게 예수 믿고 편안한 가운데 봉사하는 그 믿음을 가지고는 옳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분에게 어느날 갑자기 십자가가 주어졌을 때 "주님,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라고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피할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주여, 내 몫에 주어진 십자가를 주님도 지고 가셨는데 나도 지고 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십자가를 보면 장식품 십자가가 참 많습니다. 제가 파키스탄에 갔을 때 어떤 주교를 만났습니다. 그 분의 목에 큰 나무 십자가를 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교의 모습을 보니 예수님의 냄새가 별로 나지를 않았습니다. 저는 속으로 저 나무 십자가를 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죽으심을 따라 나의 자존심과 교만과 모든 욕심이 죽고 손해도 볼 줄 알아야 하고 억울함을 당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십자가가 아닙니까? 성도가 교통사고 나서 조금 다쳤다 합시다. "때는 이 때다" 하고 바가지를 씌우고 돈을 뜯어내려고 하면 이것이 믿음입니까?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절대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손해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스스로 억울함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희생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 십자가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녀가 십자가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부부가, 남편이, 아내가 십자가인 경우가 있습니다. 물질에, 또 건강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다 한가지씩은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각자의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제게 찾아와서 남편과 이혼하고 싶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 저는 "이혼을 하십시오" 라고 말을 합니다. 이 때는 이혼을 해라고 해야 위로를 받고 갑니다. 이혼하지 말라고 하면 그분들은 목사님에게 찾아가서 짐만 지고 왔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혼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런 짐을 짊어지고 가야 합니다. 그래야 훗날에 영광스러운 아내도 되고 영광스러운 어머니가 되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목사님들마다 십자가가 있습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하나님, 나에게 왜 이렇게 가시가 많습니까?" 라고 원망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 와서 돌아보니 목사님들 중에 가시가 없는 목사님은 한 분도 없습니다. 아무리 유명한 목사님도 가시는 다 있습니다. 여러분, 성자처럼 생각하는 그 분들도 가시는 있습니다. 그 목사님을 괴롭히는 분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붙여주는 가시입니다. 여러분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붙여주는 가시라고 생각하십시오. 십자가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겸손하게 되어지고 매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가장 어려운 십자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십자가는 내 안에 있는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이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한 예를 들자면 제 아내가 제게 바가지를 긁습니다. 그러면 저도 사람인지라 화가 납니다. 그 때 제가 화를 참지 못하고 같이 싸우게 되면 저는 누구에게 진 것입니까? 제 아내에게 진 것이 아니라 제 자신에게 진 것입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아내에게 생활비는 벌어다 주지 않고 매일 철학만 공부만 했습니다. 그리고 손님들은 자꾸 찾아 왔습니다. 생활은 몹시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 아내는 속이 터질 지경이었습니다. 한번은 손님들이 찾아 왔는데 그 아내는 화가나서 물바가지를 소크라테스에게 던졌습니다. 그 때 소크라테스가 하는 말이 "아까는 뇌성벽력이 치더니 이제는 소나기가 내리는 구나"라고 했습니다. 이 정도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참으로 이것은 힘든 것입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와서 주님 앞에 내어놓고 눈물 흘리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주님은 위로를 주시고 평안을 주십니다. 거기서 우리는 새 힘을 얻고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교회 생활을 할 때도 십자가가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교회에 처음 오시는 분들은 꼭 통과해야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초신자가 아닌 처음 나오시는 분들이 봉사를 하게 되면 옆에서 시기하는 분들이 생깁니다. 그분들은 제게도 "우리 목사님은 처음 나오는 분들만 좋아해요" 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지난 과거를 다 들춰내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허물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일심교회가 좋다고 소문을 듣고 왔는데 와 보았더니 여기도 별 수 없구나. 다른 데로 가자." 라고 합니다. 하지만 다른 데로 가 보십시오. "여기도 마찬가지이구나."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면서 평생 교회를 옮겨 다니다가 세월을 다 보내는 겁니다. 이 때는 "주여, 이 십자가는 내가 통과해야하는 십자가입니다. 무슨 소리를 해도 다 듣겠습니다. 내가 참고 기다리겠습니다." 라고 기도하면서 그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그 때부터 하나님은 여러분을 인정해 주고 사랑 받게 해 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십자가는 짊어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 적용을 잘못 하는 분들이 더러 계십니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노력하고 힘써야 합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위로해 주시고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주님은 "나를 따라 오라" 고 하셨습니다. "따라 간다" 는 것은 주님의 형상을 닮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이론이 아니고 삶이요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손해를 당해도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 승리할 것이며 이것은 주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제 동기 목사님이 어느 개척 교회로 부임했습니다. 그런데 전에 그 교회에 있던 목사님이 교회 땅 등기를 자기 이름으로 해 놓고 다른 교회로 가시더니 그 교회의 재산까지 다 팔아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이 목사님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전라도에서 춘천까지 쫓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재판을 걸었습니다. 그때쯤 그 목사님이 제게 찾아 오셨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에게 "목사님, 포기하십시오. 싸워서 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차라리 다시 시작 하십시요. 만약에 재산을 찾는다고 할지라도 목사님은 존경받는 목사님은 못 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목사님은 제 말은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교회를 떠나게 되었고 지금도 어렵게 목회는 하고 계십니다. 사람을 보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최후승리의 길인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어려운 일이 있다고 자꾸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면서 호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시면서 하소연하십시오. 하나님이 때가 되면 다 해결해 주십니다.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길이 최고의 가치 있는 길임을 알고 또 내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생명까지 바쳐도 아깝지 않음을 알고 따라 가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길을 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사는 삶"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길은 반드시 보상이 있습니다. 고난 후에 평안이 있습니다. 수치 후에 영광이라는 보상이 있습니다. 죽음 후에는 부활의 보상이 있습니다. 포기하고 나면 더 많이 주시는 보상이 있습니다. 본문 25절과 27절을 읽어봅시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 한대로 갚으리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더니 하나님이 그를 살려주셨고 올려 주시고 하나님의 보좌에서 만민의 주로 칭송 받게 해 주셨습니다. 그가 죽으심으로 인하여 이 땅에 있는 수많은 새로운 영혼들이 구원받고 생명을 낳는 역사를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죽음 후에 영광을 바라보면서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복스러운 성도님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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