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국에서 큰 자(마18:1-4)
  • 조회 수: 120, 2013.05.24 07:35:54
  • 이 손철구 목사가 죽어 천국에 갔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 원승묵 목사도 천국에 갔고, 정찬수 전도사도 죽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원목사님이 천국에 들어가는 순간 예수님이 반가이 맞이하셨습니다.

    "세상에 있을 때 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얼마나 수고를 많이 하였느냐? 너의 눈물과 땀과 수고를 내가 아노라. 착하고 충성된 종아"

    예수님의 이 말씀 앞에 원목사님은 살아 생전 부목사직을 감당하며 겪었던 어려움도 아픔도 때때로 억울함도 한순간에 오히려 기쁨이 되는 감격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에게 인도되어 황금 길을 걸어서 너무 너무 아름다운 찬란한 식당에 안내되었습니다.
    거기에는 벌써 정찬수 전도사가 먼저 와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맛있는 탕수육을 먹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시장하지? 내가 맛있는 음식을 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게나" 하시면서 예수님은 주방으로 가셨습니다.
    원목사님은 맛있게 탕수육을 먹고 있는 정찬수 전도사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생각하기를 "전도사가 탕수육을 먹으니 부목사인 나는 팔보채나 양장피 정도는 주실거야" 하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주님께서 천사들을 대동하고 황금 그릇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음식을 들고 오셔서 원목사님 앞에 놓고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원목사님은 기대를 가지고 빛나는 황금 그릇 뚜껑을 연 순간 실망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팔보채가 아닌 짜장면이 들어 있었습니다.
    순간 원목사님은 "이건 분명 배달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주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 전도사가 탕수육을 먹는데 목사인 나에게 짜장면이 웬 말입니까. 
    이거 잘못 된 거 아닙니까?"
    그때 예수님은 안타가운 모습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원목사! 너 그런 소리하지 말어!. 손철구 목사는 지금 짜장면 배달 갔어" 
    물론 천국의 모습은 이와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꾸며낸 이야기 속에는 천국의 원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항상 높은 곳에만 마음을 두고 있기 때문에 천국도 계급이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항상 누가 높으냐? 누가 크냐? 라는 비교의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천국도 그런 줄로 알고 있고, 교회 생활도 그렇게 할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 다니며 제자훈련을 받았던 12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항상 저들 속에는 "누가 크냐?"라는 문제 때문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누군가 더 총애를 받으면 다른 제자들이 못 견뎌 합니다.
    누가 좀더 예수님 가까이 앉으면 비위가 상해서 삐죽거리고 속 불편해 합니다.
    오늘도 제자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이 질문을 보면 제자들은 아직도 영적으로 미숙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누가 크냐 하는 것입니다.
    "천국에도 과연 서열이 있는 것일까? 있다면 누가 과연 첫째가 될 것인가?"
    이것이 제자들의 관심이었습니다.

    1절에 '그때에'라고 했는데, 바로 그때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시기가 임박했음을 제자들에게 공포한 때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장, 마17:22절 이하에 보면 이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드디어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고백 이후 두 번째로 자기의 죽음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내가 이제 곧 죽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는 마땅히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수난을 생각하고 죽음을 앞둔 안타까움으로 같이 고민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때에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크냐의 문제로 토론하고서는 지금 주님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병으로 죽어 가는 아버지의 병상에서 자식들이,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살릴 수 있을까를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죽으면 누가 더 많이 상속받는가를 토론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상황이 임박했는데 제자들은 철부지처럼 이런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제자들에게서 받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러시다가  예수님께서 아주 웅변적인 한 가지 행동을 하셨습니다.

    2절에서 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예수님은 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어린아이를 부르시고 앞에 세우셨습니다.
    그리고서는 "너희가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실 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하시면서 아주 강조를 하셨습니다.
    또 '결단코'라는 표현을 써서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어린아이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4절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했는데 여기서 초점은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모든 어린아이가 천국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는 초점은 어린아이와 같은 성품을 말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자세, 어린아이와 같은 성품을 가진 자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저 자신이 자식들을 키우면서 보고 느낀 바에 의하면, 어린아이들은 다음과 같은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어린아이는 철저히 부모 의존적입니다.
    자기 혼자 산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어머니가 옆에 있어야 하고 아버지가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큰일이 납니다.
    그저 마음대로 노는 것 같아도 지금 내 옆에 어머니가 있고 아버지가 있다는 생각으로 안심하고 노는 것이지 만일에 여기에 어머니가 없는 것으로 생각이 되면 그 자리에서 울고 맙니다.
    이와 같이 어린아이에게는 언제나 의지하는 그 마음이 있습니다.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고 신뢰해야 하는 자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약하고 힘이 없듯이 우리 스스로 약함과 무력함을 깨닫고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둘째, 어린아이는 잘 배우고 잘 자랍니다..
     어린아이는 잘 묻습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대로 배웁니다.
    또 잘 먹고 잘 자랍니다.
    신학적인 인간론을 논할 때, 우리 인간을 being(존재)이라 하지 않고becoming (존재화)이라고 말합니다.
    '되었다가 아니라 되어져 간다'라는 말입니다.

    목사는 노회에서 안수를 받은 그날부터 목사라는 호칭을 받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노회에서 안수를 받았다고 목사가 다 된 것이 아니라, 안수를 받는 그 순간부터 목사가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목사가 되어져 가다가 그 목숨이 끊어지는 날, 주님께서 "너는 참 목사였다'하고 말씀하셔야 진짜 목사입니다.

    교회 안에서 섬김의 일꾼 되라고 장로로 세움을 받습니다.
    그때 장로가 다 된 것이 아니라 장로가 되어져 가야 합니다.

    목장의 목자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목자가 다 된 것이 아니라 목자가 되어져 가야 합니다.
    무릎을 꿇고 배워야 합니다.
    계속 자라가야 합니다.

    교사가 되었습니다.
    교사가 다 된 것이 아니라 교사로 되어져 가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일꾼 된 우리에게 이런 어린아이의 성품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 정도 되었다고 해서 거기서 머무르면 그때부터 썩습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한 우리의 삶 자체가 돌아가는 기계가 되어야 하고, 흐르는 물이 되어야 합니다.
    돌아가지 않는 기계는 녹이 슬고, 흐르지 않는 물은 썩습니다.
    그러므로 조금 안다고 해서, 가르치는 자가 되었다고 해서 거기서 멈추면 안됩니다. 되어져 가야 합니다.

    셋째, 어린아이는 쉽게 돌아섭니다.
    야단치면 무서워하고, 매를 들면 떨고, 설득하면 알아듣고, 다짐하면 순종합니다.
    그리고 조금 야단맞았다고 좀처럼 보따리를 싸 가지고 대문을 나서지 않습니다.

     지난 금요일,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평소처럼 기도원에 올라가지 못하고, 집에서 설교 준비를 하다가 참고해야 책이 교회에 있어서 교회에 왔다가 집에 들어가니 둘째 녀석이 거실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들고 있는 것 이예요.
      아내에게 "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사고를 쳤다는 것입니다..
    "무슨 사고를 쳤길래?" 물었더니 저가 설교 준비를 하기 위해서 제 노트북을 켜놓고 온 사이에 이 녀석이 게임을 한답시고, CD롬에 CD를 넣고 어떻게 하다가 컴퓨터를 망쳐 놓았다는 것 이예요.
    방에 들어가 보았더니 노트북 화면이 찌그려져 있고, 어떤 키도 먹지를 않는 거예요.
    심지어 전원 키를 두드려도 컴퓨터가 꺼지지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내장된 모든 자료 다 날렸구나. 생각이 드는데 제 눈에 불꽃이 튀고, 제 옥상에서 연기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아빠의 노트북을 고장내고서 죄인처럼 서 있는 둘째 녀석의 이마를 주먹으로 쥐어박으면서 "아빠 노트북 만지지 말라고 그랬지!" 큰 소리를 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어떻게 하다가 노트북의 시스템이 정상으로 복구가 되었습니다.
    다행히 내장된 자료는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다시 설교를 준비하는데 슬며시 둘째 녀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불렀습니다.
    "이삭아!"
    주삣 주삣, 기가 죽어 다가오는 아이를 품에 안으면서 말했습니다.
    "아빠가 화가 많이 나서 큰 소리쳤는데 미안하다. 이마 아프지 않니?"
    그랬더니 아이가 울먹이며 말합니다.
    "아니예요 아빠, 죄송해요"

    바로 이게 어린아이의 마음입니다.
      
    넷째, 어린아이는 솔직하고 진실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진실은 상대적인 진실입니다.
    아이들이라고 해서 절대적으로 진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른에 비해서 훨씬 진실합니다.
    어른들은 거짓말을 하고도 시치미를 떼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미워하시고 진노하신 이유는 진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가 많건 적건 어린아이처럼 솔직하고 단순한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지금 주님께서 말씀하시려는 초점은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아이는 자기를 낮추는, 자기를 작게 보는 겸손이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계급과 서열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겸손한 마음 상태가 곧 천국의 열쇠라는 뜻입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서 가지는 이 겸손한 마음이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가난한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마태 복음 5:3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영혼의 파산상태를 의미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설 존재가 되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사업에 부도가 났듯이 영혼에 부도가 나버린 사람들, 
    하나님 앞에 두 손들고 항복한 사람들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이런 자에게 천국이 임합니다.
    또 이런 자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겨 주십니다.

    야고보서 4:6에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10절에서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9:35에는 예수님께서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안아 주시고 안수하셨다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모세는 3:11에 하나님께 말합니다.
    "내가 누구관데"
    재차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하나님,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라며 겸손해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들어 하나님의 일을 맡기십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의 아들 가운데서 이스라엘 왕을 세우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름병을 들고 이새의 집으로 갑니다.
    그리고 이새의 아들들을 한 명씩 불러들여 심사를 합니다.
    제일 먼저 장자 엘리압이 들어옵니다.
    사무엘은 첫눈에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는 기름병을 잡고 "과연 이 사람이 이 나라의 왕이 될 자로구나"하며 기름을 부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둘째 /아비나답
    셋째 / 삼마
    마지막 다윗/그는 말째, 아직 어림. / 겸손했던 다윗

    하나님은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어 쓰십니다.

     세례 요한이 한참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세례를 베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세례 요한은 이미 백성들의 추종을 받는 정상적인 선지자였고 예수님은 이제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묻습니다.
    "당신은 예레미야 입니까?"
    "아니요"
    "그럼 선지자입니까?"
    "아니요"
    "그럼 당신은 메시야입니까?"
    "아니요"
    그럼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 나는 예수님의 신들메도 강당할 수 없노라"고 하십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하며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집니다.

    이렇게 겸손했던 세례요한을 가리켜 예수님은 "여자가 나은 자 중에 이보다 더 큰 사람이 없다"라고 칭찬하여 주셨습니다.

    천국의 질서는 무엇입니까?
    계급과 서열이 아니라 겸손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교회의 질서는 무엇입니까?
    겸손입니다.
    누가 이 교회에 진정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까?
    겸손한 사람, 자기를 낮추는 사람입니다.
    남 모르는 곳에서 예수님의 심정을 가지고 발을 닦아주고 섬기고,
     꼴찌가 되어 주는 그 사람이 교회의 진정한 지도자요 천국의 모습을 나타내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사람이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대첩에서 중국 수나라 백만 대군을 물리치고 돌아왔을 때 영양 왕은 성밖, 들까지 나가 마중하면서 꽃을 투구에 꽂고 은금을 하사했을 때 환호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사과의 말을 했습니다.
    "상감마마의 귀중한 백성이요, 여러분의 소중한 아들이요 남편인 고구려의 젊은이들을 많이 전사시키고 승리를 얻고 돌아온 나는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나라의 진정한 영웅은 여기 살아서 돌아온 을지문덕이 아니라 어딘지 모를 산과 들의 숲속 밑에 쓰러진 이름 없는 젊은 용사들입니다."

    을지문덕은 전쟁에서 승리하여도 환호하는 백성들과 하사품을 내리는 왕 앞에서 자기를 높이지 않았고 죽어간 군사들을 높였습니다.
    그때 그는 더욱 백성들에게 높임을 받았습니다.
    후에 을지문덕은 백성들이 입는 누런 베옷을 입고 고향인 평양 근처 산중에 들어가 은둔 생활로 여생을 보냈습니다.

    참 멋진 지도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어린아이처럼 겸손해 질 수 있는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인간이 되셨고 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어셨습니다.
    그분을 바라볼 때 우리는 교만할 수 없습니다.
    내 자랑 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14장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발을 쓰지 못하는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행합니다.
    이 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주목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복음이 쉽게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사탄의 교묘한 전술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풍채가 좋은 바나바를 쓰스 신이라 하고 말잘하는 바울을 허메신이라고 하면서 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쓰스는 제우스신을 의미하고, 헤메는 희랍 신화에 의하면 언어를 발명한 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이 사탄의 시험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옷을 찢으며 자신들도 당신들과 똑같은 인간이라고 알리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증거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로 이런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피로 값 주고 세워주신 교회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복된 사람이요, 천국에서 큰 자입니다.
    우리 홍익의 모든 성도들이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댓글 0 ...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131 admin 114 2013.07.21
130 admin 118 2013.02.06
129 admin 119 2013.05.27
128 admin 120 2013.05.24
admin 120 2013.05.24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