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정의 두 기둥(마18:1-10, 잠 1:8-9)
  • 조회 수: 164, 2013.05.24 07:18:20
  • 가정에 어버이가 안 계시면 안정감이나 평화나 질서가 부족하고, 가정에 아이들이 없으면 웃을 일이 별로 없고, 쓸쓸한 적막감으로 삭막하게 됩니다. 가정에는 어버이도 계셔야 되고, 어린이도 있어야 합니다. 가정을 바치는 중요한 두 기둥이 되기 때문입니다. 

    영국사람들은 돈을 벌면 먼저 노인들을 위해 쓴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국을 노인의 왕국이라고 말을 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돈을 벌면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쓰기 때문에 프랑스를 젊은이들의 왕국이라고 말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돈을 벌면 먼저 어린이들을 위해서 돈을 쓰기 때문에 미국을 어린이의 왕국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어린이들에 대한 관심이나 교육시설, 교육방법, 또한 그들에 대한 인격적인 예우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앞서 있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린이들에 대해서 인격적인 관심을 갖는 근원은 생명의 무게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서에서는 "모든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셨다"라고 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 인간의 핵심부분에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져 있다는 면에서 더더욱 우리 생명이 무게가 있는 것으로 표현이 됩니다. 복음을 살펴보면 두 가지 사실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여자의 인권이 회복되고 어린 아이의 인권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 것이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18세기는 민중을 발견한 세기요, 19C는 여자를 발견했고, 20C는 어린이를 발견한 세기라고 말한 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사람 수에도 들지 못하던 어린이를 존귀히 여기고 사랑해 주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세상에 인간이 세운 단체는 무수히 많지만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단체는 교회와 가정 두 곳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운 곳입니다. 가정은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에덴동산에서 인간의 삶을 복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세운 단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가정은 순수하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속합니다. 가정을 통해서 사람은 사랑과 행복의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초라할 지라도 가정은 마음과 생활의 안식처가 되며 모든 삶의 근거지가 되며 기쁨과 보람이 있는 곳입니다. 이러한 가정의 핵은 역시 남편과 아내로 이어지는 부부이고, 가정의 꽃은 어린 자녀일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천국에서는 누가 가장 큽니까?"하고 묻는 제자들에게 어린이를 내세우며 어린이가 큰 자라고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작은 아이 하나라도 실족케 하는 사람은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나으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어린이를 얼마나 귀중히 여기시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로마 제국만 해도 부모는 자식을 죽일 수도 있고 마음대로 버릴 수도 있고 노예로 팔아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B.C 1세기에 편지하기를 "만일 당신이 낳을 아이가 사내아이라면 기르고 계집아이라면 버리시오"하고 편지했고 세네카는 "약하거나 못생긴 아이들은 우리는 버린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당시만 해도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라고 한 것을 보면 아이들과 여자들은 숫자에 넣지도 않을 만큼 천대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잘못된 사상을 말씀으로 행동으로 바로 잡아 놓았습니다. 한번은 많은 부모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서 기도해 주시기를 바랄 때에 제자들은 꾸짖으며 아이들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할 때에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누가복음 18장 16절)"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정신은 어린이를 귀중히 여기고 잘 교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이를 무시하거나 학대하는 가정은 복을 받을 수 없고 어린이를 소홀히 여기는 교회는 부흥하지 못하고 어린이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국가와 민족은 번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해변가에 놀러 간 어린아이가 함께 간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나 모래 무덤 만들어도 돼?" 

    "안돼, 그러면 깨끗한 옷을 버리게 돼." 



    "그럼 물에 들어가서 놀까?" 

    "안돼, 물에 젖으면 감기 들잖아." 



    "그럼 다른 아이들이랑 같이 놀까?" 

    "안돼, 그러다가 길 잃어버린다." 



    "엄마, 그럼 나 아이스크림 사주세요." 

    "안돼, 그건 몸에 별로 안 좋은 거야." 



    아이는 급기야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러자 엄마는 짜증스런 표정을 짓더니 옆에 있는 다른 부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어휴, 저렇게 신경 과민한 아이를 본적 있으세요?" 



    아이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틀리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이 생각에는 부모가 틀린 사람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각인된 이 생각이 성년이 되었을 때 발동을 한다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때 하는 후회는 이미 늦은 것입니다. 부모는 언제나 어린아이와 같은 눈 높이 생각을 공유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시카고 대학의 교수인 벤자민 볼룸이라고 하는 세계적인 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어느 때에 이러한 연구를 해봤답니다. 학자들, 예술가들,혹은 운동 선수들, 흔히 말하는 성공했다고 하는 존경받는 분들을 120명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이렇게 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는 많이 칭찬하라"고. 



    첫째가 칭찬하라고.. 

    아이들은 칭찬 받는 수준에서 자기 가치를 발견한답니다. 그렇습니다. 칭찬 받는 그것, 바로 그 수준에 도달하도록 그들은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칭찬 받는 만큼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칭찬하라. 그런 것입니다. 



    둘째는 "가르치기는 하되 나무라지 말라." 

    아이들을 나무래 보세요. 한 번 나무라면 "내가 잘못했는가봐." 두 번 나무라면 "난 머리가 나쁜가 보다." 세 번 나무라면 "내가 세상에 있는 것이 귀찮은가봐. 나는 구제불능한가 보다. 어머니는 나를 키워가는 것이 고생스러운 가봐." 이래 생각합니다. 벌써 정신적으로 자살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무라지 말라는 거예요. 잘못된 일이 얼마든지 있어도 아이를 나무라면서 키울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성공했던가 잘한 일이 있거든 그것을 오래오래 기억하게 해주라는 거지요. 그래야 자기를, 자기 가능성을 인정하게 되니까요. 잘한 일에 대해서 오래오래 기억합니다. 너는 이런 일 잘 한다. 그래서 장점을 계속 극대화하도록 해주는 것이 교육의 원리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말씀은 "뇌물성 선물을 주지 마라. 그리고 두려운 마음으로 순종하도록 하지 마라." 체벌을 통해서 무서워서 이래 때리고 저래 욕먹고 하니까 그래서 할 수 없이 어떻게 해야 되는, 이렇게 되면 반드시 그는 그 마음이 여려져서 세상을 항상 두려움으로 살게 됩니다. 결과적으로는 그릇된 길을 가게 됩니다. 공부 잘하면 상주고, 못하면 매 맞고. 잘했다고 상 주고 잘했다고 돈 주고, 잘했다고 선물을 주고 이렇게 하나까 얘들이 커서 뇌물 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선물은 그의 행위와 아무 관계없어요. 잘 해도 못 해도 상관이 없어요. 너는 내 아들이고 내 딸이니까 내가 사랑하니까 주는 거다 그거지, 잘 했으니 주고, 못 했으니 매를 맞고 바로 이것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선물에는 아무 조건이 없어야 합니다. 



    탈무드에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선물을 주면서 말을 많이 하면 아니 준만 못하다." 그래요. 잔소리 들으면서 "참 돈 벌기 힘들다." 그런다구요. 들어주기가 힘들잖아요. 뇌물성 선물이 세상을 망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깊이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볼트모어에 빈민굴이 있는데 너무 형편이 어지러워서 어느 사회학자가 연구를 해보았답니다. 거기에는 아편 중독자요, 그저 뭐 알콜 중독자요,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빈민굴이요. 너무 너무 취약지구예요. 그래서 학자들을 보내 연구한 결과 보고서는 이렇습니다. 아무리 기대해 봐도 저 빈민굴은 구제불능이에요. 거기서 자라나는 어린아이도 소망이 없음. 그래요. 



    기다렸다가 25년 후에 다시 사람을 보냈더니 "아니요." 바로 소망 없다고 하던 그곳에서, 180명 중에 무려 176명이나 되는 많은 학자, 목사, 교육자, 그리고 훌륭한 과학자들이 나왔더랍니다. "대체 웬일인가?" 하고 원인을 조사하니까 그 속에 그들을 위해서 희생한 한 여인이 있었어요. 한 평생을 그곳의 아이들을 모아놓고 가르쳤어요. 그리고 이제는 할머니가 됐는데 그 여인의 그 가르침으로 인해서 이 구제 불능한 빈민굴에서 훌륭한 인물들이 났더란 말입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그는 말했습니다. "난 그 아이들을 사랑했을 뿐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했다는 겁니다. 내 어머니가 아니라도 좋아요. 내 아버지가 나빠도 좋아요. 누구인가라도 단 한 사람,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으로 나를 사랑할 때에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될 때 그는 참으로 귀한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그 사람, 바로 그 사람이 그 아이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어린 시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어린 시절은 단순한 인생 과정의 때가 아니고 훗날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에 받았던 영향이 일생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의 성장과정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해 왔습니다.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들은 좋든 나쁘든 어머니와 아버지입니다. 



    우리 외모가 거의 부모와 비슷합니다. 성격, 생활습관, 우리 속에 흐르고 있는 혈통, 기질은 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어 느끼는 것은 아버지께서 했던 모습들이 나에게 있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는 어린 시절에 형성된 나가 숨어 있습니다. 내 속에 있는 어린아이를 내재적 자아, 과거의 어린이라고 심리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어른 속에 들어있는 어린아이가 있고, 지금 현재 신체적으로 소년기의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에는 현재 자라는 아이가 있고 부모 속에 내재된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결국 지금 어린아이를 향해서 가르치고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내 속에 있는 어린아이입니다. 그 어린아이가 현재 어린아이를 지배하고 또 다스리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왔던 삶의 모습이 자녀들에게 반복된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놀라운 일입니다.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모든 영향은 우리가 지금은 어른이 되고 아버지가 되어도 그대로 잠재되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년기를 지배했던 형상이 평생의 삶의 스타일과 의식구조를 결정하고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부모로부터 받은 내 모습이 있고, 또 그 모습을 자녀들에게 반복시키고 있습니다. "모든 아이는 어른들의 아버지다"라고 하는 심리학자의 말은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자기의 성장해 온 어린 시절을 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결국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받은 삶의 현장을 자기들이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내 속에 있는 어린 아이를 찾아내는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막연하게 우리가 성장해서 어른이 된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어른 되지 못한 것을 가지고 어른처럼 행세하면서 아이들을 구박하고, 아이들을 혼내고, 아이들을 책망하고 있는 것은 자기 속에 있는 어린아이의 근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주셨던 순수한 형상도 있지만 이 세상에서 받은 영향으로 잘못 형성된 것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지 못하고 어렸을 때 받았던 나쁜 습관과, 성격과, 어떤 인간성을 가지고 그대로 일생을 살면서 자기도 괴롭고 함께 사는 사람도 괴롭고 이 역사도 괴롭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거듭났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의젓하게 찬송을 부르는 것을 볼 때 다 천당 갈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속에는 전혀 변하지 않은 자아, 거듭났다고 말하면서 전혀 우리 속에 변하지 않은 어린아이가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리학자인 마실라인은「당신의 과거의 내적 아이」라는 고전 책을 썼는데 거기에서 그는 과거의 내적 아이는 가정에서 자주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넥타이 매고 근사하게 앉아있으면 누가 압니까 그런데 자기만이 알고 있는 고쳐지지 않는 내적인 존재가 때때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산다고 말하지만 마음의 상처와, 과거의 내가 전혀 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있어야 될 것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린 시절에 치료되지 않은 인간성을 성년 아동이라고 말합니다. 신체적으로 성년인데 이 속에 아동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성인 속에 있는 아동을 고쳐야 하느냐? 그것은 자신의 인격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자라야 하거든요. 외모는 성장했는데 내 속에 어린아이가 숨어있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현재 내 성격이라는 것은 그 동안 우리가 경험하고 체험하여 우리에게 끼친 영향들이 모아진 하나의 작품들입니다. 기질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한 것이며 그것이 각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체질은 우리가 손댈 수 없지만 성격은 고쳐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격은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작품입니다. 잘못된 성격은 자신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고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각각 사람에게 주신 기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상처로 잘못되어진 성격, 부모들이 잘못 만들어준 성격, 자기가 어렸을 때 자라면서 잘못 형성된 성격, 이것은 은혜로 고쳐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살면서 "내 성격은 이래" 그럽니다. 이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각각 형성된 거의 모든 사람들의 성격에 고쳐야 할 부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 속에 내재된 아이들, 자라지 못하고, 변화되지 못한 아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어디에 있었느냐? 현재가 문제가 아니라 그 속에 어린 시절에 형성된 인간성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왜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성인의 아동을 치유해야 되느냐? 이것은 자녀교육을 위해서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른이 되어야만 아이를 교육할 수 있는 것이지 나도 어른이 못된 처지에 어떻게 어린아이를 교육시킬 수 있겠습니까 내 속에 있는 어린아이가 표출되면 어린이에게 상처만 줄 뿐이지 교육이 안됩니다. 

    열등의식이 있는 아이가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아무리 공부를 해도 더 노력하라고 책망만 받고 자란 아이들은 끊임없이 속에 불만이 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성취하지 못한 열등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공적 실패자라고 말합니다. 항상 "나는 실패했다"는 성공적 실패자로서의 불만이 그 속에 있습니다. 



    우리 속에 분노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마음속에 깊은 분노가 숨어 있습니다.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부모의 지나친 훈계 때문에 속에서 반항심이 싹튼 아이들은 가출하든지 아니면 있기는 있지만 이 속에 표출되지 않은 반항심을 가지고 도피하고 있을 뿐입니다. 강압적인 부모에게서 받는 어린 소년의 형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의존적 아이가 우리 속에 숨어있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의 지나친 과보호가 나약한 의존적 성격을 형성해 왔다는 것입니다. 막내 아이들, 외아들, 너무 너무 보호해 주었습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도 아이의 요구대로 달라는 대로, 사달라는 대로 다 사주니까 낭비형이 되었습니다. 이런 남편과 아내 만나면 큰 일 납니다. 오늘날 제 분수에 안 맞게 빚지고 사는 사람들 보십시오. 전부 이런 형태의 어린 소년기가 그 속에 싹터있기 때문입니다. 



    고독한 아이가 있습니다. 부모와 일찍이 떨어져서 자란 아이들, 고아원에서 자란 아이들, 조실부모하고 친척집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고독형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자학적인 아이가 있습니다. 이런 아이는 거부형의 부모 슬하에서 자란 사람들인데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거절당하는 자신의 자멸감이 깊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학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적 근성, 어린 시절에 형성된 자아가 내 속에 감추어져 있어서 성인은 되었는데 그대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치유해야 됩니다. 이것이 내 성격이라고 내버려두기에는 내 인생이 너무 아깝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우리 속에 이런 것이 발견될 때는 이것을 찾아서 고치시기 바랍니다. 



    어린 시절에 부모로 부터나, 친척으로부터 받은 말할 수 없는 상처들, 상처 중에서도 깊은 상처가 있습니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상처들, 또는 어린 시절에 받았던 어떤 충격들을 우리는 기도 중에 상처를 치유해서 자기 인격적 성숙의 노력을 해야 됩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칭찬해 주면 교만한 성격이 자리잡게 될 염려도 있기는 하지만, 부모가 말과 행동으로 잘 표현해 주고 인정해 주는 것이 대단히 주요합니다. 말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사랑을 표현해 주어야 합니다. 꼭 안아 주며, 궁둥이를 두들겨 주거나 뺨에 뽀뽀해 주거나 어깨를 툭툭 치고 어루만져 주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못 받고 자란 사람이 문제아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부모가 생활로 본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말은 자녀들이 들을 수도 있고, 안 들을 수도 있지만 눈을 보는 것은 결코 잊지 않고 깊은 감화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진실한 신앙생활과 헌신의 생활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자녀는 속이지 못합니다. 자식들 보는 데서 성경 읽고, 기도하는 모습, 정성껏 헌금 드리는 모습을 보여 주면 그것이 백번 말하는 것 보다 낫습니다. 꿈에도, 교회나 목사를 비판하는 말을 하면 안됩니다. 그 보다 더 큰 저주는 없습니다. 



    헛된 약속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아무렇게나 해 놓고 지키지 않으면 부모의 위신도 떨어지고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무엇을 달라고 하면 잘 생각해서 줘야 할 것은 약속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약속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의 명령은 끝까지 시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자식들에게 명령을 내린 뒤에는 반드시 시행했는지 여부를 확인해야 됩니다. 말만해 놓고 내버려두면 부모의 말이 권위가 서질 않습니다. 적당히 기회만 넘기면 된다는 생각을 갖게 해야 합니다. 또 시행하지 못할 것은 명령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들은 반드시 예수님께 데려와야 합니다. 



    자녀를 낳거든 제일 먼저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리며 축복 기도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또 유아 세례를 받게 하고 교회에 출석할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강제성을 띠더라도 예수님께 인도해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성실하게 예배 출석하는 일과 십일조와 감사 헌금 드리는 습관을 길러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을 밥과 옷으로만 키우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키워야 한다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리미리 말씀으로 양육하고 기도를 많이 해 주어야 합니다. 



    일본 사람 이께마라 마모루가 쓴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 이 책을 보면 한 장, 한 Chapter의 내용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온상 속에서만 자라는 떡잎. 한국의 어린아이들이 그 분의 눈에 비쳤을 때 온상 속에서만 자라는 떡잎이다 자, 이 Chapter는 이런 말로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질이 별나서 꽤 말썽을 피운 축이다. 친구랑 싸움을 하고 집에 들어가면 어머니는 어김없이 내 손을 잡고 그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상대방 집에 찾아가 조건 없이 사과를 해야만 했다. 내 입술이 찢어졌든 터졌든 그것은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나서야 어머니는 내 상처를 치료해 주셨다. 일본에서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대부분이 이런 식이다. 한국에서도 아이가 싸우고 오면 상대방을 찾아가는 것 까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일단 찾아가서는 사과를 하는 게 아니라 아이를 어떻게 키웠기에 남의 집 귀한 자식을 이 꼴로 만들어 놓았느냐고 언성을 높인다. 그러니 아이 싸움이 곧잘 어른 싸움으로 번지곤 한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배우지 못한다. 설사 내가 좀 잘 못 했다 해도 내 뒤에는 부모가 버티고 있고 언제 어디선지 내 편을 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이는 자기 행동에 잘잘못을 판단할 정도로 철이 들었는데도 정작 부모 눈에는 아이의 잘못이 보이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많은 것을 깨닫게 하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녀에게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들이 저절로 효도할 것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저절로 효도하는 자녀는 없습니다. 많은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효도하는 것을 가르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자녀에게 그렇게 많은 것을 희생했으면 당연히 부모에게 효도할 것을 가르치고 요구해야 하는데, 무슨 죄를 짓는 양 그것을 하지 못합니다. 



    자녀는 인생의 노년에 가장 좋은 동반자입니다. 자녀 보다 더 좋은 인생의 동반자는 없습니다. 효도하는 자녀보다 더 좋은 노후대책은 없습니다. 최고의 노후대책은 바로 자녀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자녀들에게 마땅히 부모에게 행할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저절로 자녀들이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습니다. 저절로 자녀들이 부모의 노후 대책이 되지 않습니다. 가르쳐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배운 자녀가 있는 사람은 수치를 당치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자녀는 교육의 대상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과 부모에게 행할 바를 가르쳐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자녀들을 잘 키워 훌륭한 부모가 되려는 자들을 돕기 위하여 데이비드 브라논이 만든 자녀 교육의 10계명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해서 자녀들을 가르쳐라.(신6:4-9)2.자식들에게 옳고 그른 것을 가르쳐라.(왕상1:6) 

    3. 자녀들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여겨라.(시127:3) 

    4. 신앙의 길로 자녀들을 인도하라.(잠22:6) 

    5. 자녀들을 훈련시켜라.(잠29:17) 

    6. 무조건적으로 자녀들을 사랑하라.(눅15:11-32) 

    7.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엡6:4) 

    8. 모범을 보여 자녀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라.(딤전3:4-9) 

    9. 자녀들의 필요한 것을 공급하라.(딤전5:8) 

    10.자녀들에게 믿음을 전수시켜라.(딤후1:5) 



    하나님이 주신 기업인 자녀들을 귀하게 여기고 신앙으로 잘 가르치셔서 그 자녀들로 인하여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자녀를 자녀로만" 이라는 귀한 글을 읽어 드립니다. 



    나를 고쳐주소서 

    가끔 자녀를 나의 투자의 대상으로 여기는 착각을, 

    나의 삶을 자녀에게서 보상받으려는 유혹을, 

    "다 너를 위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궁극적으로 자신을 위했던 이기심을, 

    그리하여 그들이 나에게 속해 있지만 내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 주소서 



    나로 하여금 부모로서의 권리보다는 의무를, 

    자녀의 성장보다 내가 먼저 성숙해짐으로 그들을 훈계하게 하소서. 



    그들을 이끌어 주되 강요하거나 협박하지 않으며 

    그들을 돕되 대가를 기대하지 않으며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실패할 수 있는 자유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지 않게 해 주소서. 



    그들의 슬픔과 기쁨을 가볍게 취급하지 않으며 

    그들의 성공과 실패를 과소평가하지 않고 

    그들의 하찮은 질문과 사소한 행동방식에도 진지하게 반응하며 

    매사에 그들을 존중함으로 존경받는 어른이 되게 해 주소서. 



    그리하여 유명한 사람으로가 아니라 "유능한 사람"으로 

    일류의 사람으로가 아니라 "유일한 사람"으로 

    우리의 자녀들이 자라나게 해 주소서. 



    이처럼 성숙한 어른들이 되기를 바라며 하나님께서 여러분 가정과 자녀를 크게 복 주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장 큰 신체장애는 두려움입니다 

    가장 즐거운 날은 오늘입니다 

    가장 쉬운 일은 실수하는 것입니다 

    가장 큰 잘못은 포기하는 것입니다 

    가장 두르러진 결점은 이기주의입니다 

    가장 나쁜 실패는 절망입니다 

    가장 좋은 선생님은 어린이들입니다 

    가장 비열한 감정은 질투입니다 

    가장 멋진 선물은 용서입니다 





    현대 사회를 평가할 때에 부모 중심의 대가족 사회에서 부부중심 핵가족 사회로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녀중심의 신세대 가족 사회로 변질, 타락해 간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말세징조 중의 하나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부모를 거역하는 자녀들의 출현"이라고 했습니다.(딤후3:1-4) 



    부모가 중심일 때는 자녀가 복종하는 위치입니다. 부부 중심일 때는 자녀와 부모가 맞먹는 구조입니다. 자녀 중심일 때는 자녀가 상전이 되어 있고 부모는 저 변두리에서 하녀나 노예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그러면 성경은 대가족을 인정할까요? 핵가족이나 신세대 가족 중 어느 것을 인정할까요? 성경은 이 세 가지 모두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바로 "주안에서의 가족"을 인정합니다. 



    에베소서 6:1을 보세요.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대가족이나 핵가족이나 신세대 가족 안에서가 아니라 주 안에서 부모를 순종하라입니다. "주안에서" 이것이 놀라운 성경적 가족 구조요 제도입니다. 



    그러면 "주안에서"란 무엇입니까? 주님께 순종하는 범위 안에서라는 말이며, 주님을 믿는 자로서, 주님을 중심으로 하여, 주님과 함께 하는 가운데서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가족들은 부모나 자녀가 다함께 

    주님께 소속된 자로서 주님과 동행하는 자로서 가정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가정을 건설하셨습니까? 그것은 주님은 당신을 믿는 가족들과 함께 가정에서 행복을 만들기 위하여 가정을 세우신 것입니다. 즉 믿는 사람에게 가정이란 주님과 가족이 함께 행복을 만들어 내는 공장입니다. 



    자식에 대하여 무책임한 부모는, 말년에 그 인생이 비참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부모에 대하여 무책임한 사람은 반드시 그 자식한테서 무시를 당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무책임한 사람은 주의 심판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물질은 물론이거니와 장래와 명예와 때로는 생명까지도 희생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식이 부모를 위하여 자기들의 의견을 꺾고 양보하고 희생하기란 매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자식이란 재롱을 떨지 않아도 다 귀엽게 보이기만 합니다만 부모님들은 하는 것은 모두다 언짢게 보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을 부모들을 즐겁게 하려고 힘써 노력하지 않으면 그것은 부모를 사랑하지 않은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자녀들은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아서 문제이고 나이 많으신 부모님들은 사랑을 받지 못해서 외롭습니다. 



    부모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존재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섬겨야만 하는 것이 인간됨의 근본임을 깨우칠 뿐만 아니라 부모를 섬겨야 하는 윤리의 배경적인 힘이 되는 말입니다. 곧 부모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현세적이고 영적인 주권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으며 이 세상에서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주권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크고 고상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권력이나 위엄도 부모의 위치를 따를 수 없습니다. 부모는 본래적으로 그 권위를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의 두 기둥은 어린이와 어버이입니다. 두 기둥이 견고하고 튼튼할 때, 가정과 사회와 국가가 건강할 수 있습니다. 



    가정은 하나님과 함께 행복을 만드는 공장입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부모를 이해하고 공경하며 순종해야 합니다. 진리를 가르치며 배워야 합니다. 여기서 행복은 창조됩니다. 이 행복을 불행한 사람들을 위하여 나누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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