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겸손한 선지자(마21:1∼11)
  • 2013.05.27 22:02:48
  • 우리는 참으로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보지도 못하던 것 많이 보면서 삽니다. 옛날 사람들 구경 못한 것 우리 많이 구경하고 삽니다. 전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옛날에 죽은 분들 참 불쌍하다. 이런 것도 못 보고, 이런 것도 못 먹고 그랬구나' 싶습니다. 특별히 저는 저의 어머니께서 너무너무 고생하시는 걸 많이 보았는데 고생만 고생만 하다가 가시고요 정말 너무 고생만 하셨다 싶어요. 그런데 우리는 참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경험하며 삽니다. 또 못 듣던 여러 가지를 듣고 많은 정보 홍수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전에 못 듣던 말 한마디가 있습니다. '왕따'라구 하는거요. 왕 따돌림의 준말이고 신조어입니다. 과거에는 보통 '학교 폭력'이라고 말하고 혹은 일본말로 '이지매'라고 했지요. 이지매루 한다고 해서 '이지매' 뭐 이런 말을 썼습니다. 집단 따돌림을 의미하는 신조어 입니다. 최근에는 '은따'라는 말이 있어요. 은근히 따돌린다 그래서요. 그런 시대에 삽니다. 점점 심화해 갑니다.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4분의 1이 왕따를 경험했다고 1999년 1월 한국교육개발원 보고서에 나옵니다. 작년 한 해 동안에만 해도 사천건의 왕따가 있었고, 피해자만도 오천 사백명이라고 합니다. 요새는 직장에도 '직장 왕따'가 있다고 합니다. 결국은 '대인 공포증', 사람을 만나는 공포증에서 병을 얻어서 정신병원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줄지어 일어난다고 합니다. 여러분 도대체 왕따가 뭡니까? 저는 그런 생각도 해요. 많지도 않은 두 사람이 사는 가정에도 왕따가 있어요. 왕따 당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누구를 왕따시키고 있습니까? 왜 인간은 이렇게 서로 격을 두고 살고 상대방으로부터 피해의식을 느껴야 하고 또 상대방을 괴롭히며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자세히 연구해 보면은 가해자나 피해자가 그 원인이 같습니다. 꼭 같이 '과잉보호화' 흔히 말하는 왕자병, 공주병 여기서 오는 겁니다. 그래서 결손 가정이 절대적으로 왕따가 많습니다. 많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는 사람, 또 사랑을 해야겠는데 여건이 그렇지 못해서 대리 사랑을 하게될 때, 여기 또 문제가 됩니다. 그 깊은 이야기를 제가 다 설명하고 싶지 않습니다. 문제는 교만입니다. 특별의식이요. 너는 특별하다고 키워 놓으면 여기에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부모의 교만이 잠재적으로 자녀에게 유전인자처럼 전해지면서 왕따라고 하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깊이깊이 생각해 보세요. 부모의 교만한 마음이 알게 모르게 자녀들에게 또 교만을 심어 주었어요. 애들이 결국은 이런 인간이 되고 말더라구요. 깊이 생각해야 될 문제입니다. 
    미국에 기독교 잡지 중에 '크리스챤 센츄리'라고 하는 유명한 잡지가 있습니다. 거기에 로널드 고에츠 박사님께서 기고한 논문 중에 이런 제목이 있습니다. 'A period of anti-modesty', 반 겸손의 시대다, 이렇게 썼습니다. 반 겸손의 시대! 여기 문제가 있습니다. 그 사상적 문제로 올라가서 뿌리를 살피면 칼 막스, 프로이드, 철학자 니체를 꼽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막스의 이론이 뭡니까? 프로이드가 뭘 생각하고 있습니까? 니체의 초인간 철학은 뭘 말하고 있는 겁니까? 하나같이 겸손은 미덕이 아니라는 거죠. 이건 억압하는 기재며 인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겸손을 버려라! 끝까지 교만하라 이거죠.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착취하는 자가 착취받는 자를 순종케하기 위하여 착취의 수단으로 겸손을 강요하고 있다. 지배하는 자가 지배받는 자로 하여금 꼼짝 못 하고 정신적으로 지배되도록 하기 위해서 겸손이라고 하는 미덕을 가르쳐 왔다. 어떻게 또 그럴 듯 하기도 해요. 여기에 사람들이 미혹돼가지고 마침내 겸손이라는 덕을 포기합니다. 자기 자랑을 하게 됩니다, 자기 PR을 하게 됩니다. 소위 인권을 찾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게 됩니다. 그 결과로 인간성을 상실했고 사회성도 무너졌습니다. 삶이라고 하는 소중한 아름다움은 전쟁터로 바꾸어졌습니다. 부부간에도 생존경쟁을 합니다. 네가 죽냐 내가 죽냐 보자는 거야. 이렇게 살다가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전부 피해자가 되어서 누구를 가릴 것 없이 다 왕따 족속들이 돼버렸어요. 
    여러분 겸손이 힘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겸손이 덕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여러분이 인정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겸손한 자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0절에 보면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누가 비방을 받으리요.' 너무나도 쉬운 얘기가 아닙니까? 웃는 얼굴에 침 뱉는 법 없습니다. 내가 감사하는데 누가 나를 왕따 합니까? 내가 겸손한데 누가 나를 괴롭히더란 말입니까? 깊이깊이 생각해 보세요. 되지 못한 교만이 그 속에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에 당신의 얼굴은 피지를 못 하는 거요. 사람들이 친구가 없어요. 여러분 가만히 보세요. 난 가끔 봅니다. 어떤 음식점에서 잠깐 앉아서도 보면은 아주 겸손한 사람, 그 말끝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는 사람은 그 일하는 아가씨나 아주머니까지도 그에게는 뭘 자꾸 갖다 주고 더 기분 좋아, 서로가 기분 좋아지는데 어떤 사람 밥 한 그릇 사먹으면서 되게 거만해 자기고 "이게 뭐냐, 저게 뭐냐, 갖고와라" 그러니까 얼굴을 가만히 보니까요 일하는 사람들도 왕따 하더라구요. '되게 못되게 노네' 그렇잖아요. 이게 되겠습니까? 자기가 불행해지는 거예요. 이것이 왕따에요. 별거 아니에요. 교만한데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요. 그걸 알아야 됩니다. 왜 불행해 졌어요, 왜 친구가 없어요, 왜 사람이 반갑질 않아요? 당신이 교만하기 때문이죠. 여러분 스스로 자기 스스로를 한번 점검해 보세요. 당신의 겸손은 어디까지 왔습니까? 자신에 대해서 불평이 많습니까? 자기 능력, 자기 지혜 또 자기 얼굴, 좀 더 나가서 거울을 보면서 불만이 많습니까? 자기 됨에 대하여 불만이 원망이 많은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에요. 
    또 다른 사람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대하는 것이 못 마땅합니까? 사실 알고 보면 사십이 넘었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고, 오십이 넘었으면 주변 환경에 책임을 지라고 그래요. 내가 남에게 친절하게 늘 해왔으면 주변 사람들이 다 나에게 친절하게 대할 거요. 그런데 웬일인지 모든 사람이 내게서 멀어지고 있으면 Something wrong with me. 문제는 내게 있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했기에 이렇게 됐냐 이거죠.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뉘우칠 생각은 안하고 불만이 많아요. '왜 이렇게 우리 집안에선 날 안 알아주느냐, 친구는 왜 나를 버리느냐, 왜 모든 사람은 나를 섭섭하게 하느냐'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세요. 당신은 교만해요. 또한 하나님께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 내게 주신 경륜, 내게 주시는 이 환경, 내 처지, 내 지위, 하나님이 내게 하시는 일에 대하여 원망이 많습니까? 아니면 감사하는 마음뿐입니까? '나는 부족한데 분에 넘치도록 하나님은 내게 은혜 주셨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다' 느껴집니까, 아니면 "하나님 참 한평생 나를 괴롭히누만" 그런 생각입니까? 여기서 당신의 겸손 지수를 점검하게 됩니다. 겸손한 사람에게 감사가 있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가 있는 것이에요. 그는 항상 자기만이 아는 신비로운, 넉넉한 능력을 즐길 수 있는 것이올시다. 오늘 본문은 여러분 아시는 대로 예수님께서 지금 눈앞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아시면서 그 시간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십니다. 올라갈 때에 나귀를 타고 올라갑니다. 이것은 전에 있던 일이 아니고요 또 이 행사는 전래적으로 유대 사람들 가운데 왕의 대관식이올시다. 왕이 왕으로 취임할 때 그때에 행하는 행사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일을 어떻게 이렇게 공개적으로 할 수 있는 겁니까? 여기서 우리는 깊이 생각합니다. 먼저 승리하시고 승리를 향하여 밀고 올라간 겁니다. 뭐 천신만고 끝에, 저 끝에 가서 승리한 게 아니고 처음부터 승리하시고 승리를 밀고 나가서 승리하신 것다. 이걸 생각해야 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때 이 종려주일에 있었던 나귀를 타고 올라가시는 행사, 이것을 통해서 설명해야만 십자가의 의미가 설명이 되는 겁니다. 가령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아무 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체포됐다. 혹은 요리조리 도망해 다니다가 어디선가 붙들렸다. 그럼 얘기가 다르죠.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왕의 권세를 만천하에 시위하면서 예루살렘에 올라갔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앞뒤에서 따라오면서 만세를 불러요. 굉장한 행사가 아닙니까? 그리고 성전을 깨끗이 하는 역사를 이루고 십자가를 지십니다. 그런고로 십자가는 자발적이고 자원적이고 선택적인 것이었어요.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조용한 행사, 비록 이 행사는 그렇게 온 유대 사람들에게 알려질 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기다리는 십자가를 향해서 당당하게 나귀를 타고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세요. 이 행사는 놀라운 계시적 의미가 있습니다. 이 속에무한한 말씀이 있습니다. 여유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해학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사람이 힘이 모자라면 목소리가 커져요, 행동이 거칠어지고. 힘이 넉넉하고 자신감이 있으면 자연히 여유가 생깁니다. 그렇지 않습디까? 그래서 돈 잘 버는 남편들은 아내에게 여유가 있지 않습디까. 그런데 돈 못 벌고 처덕에 사는 사람들이 꼭 마누라를 치거든요. 이게 뭐냐하면 힘이 모자라니까 목소리가 커져요. 여러분 부부싸움을 합니까? 저는 여러분 부부싸움 하는걸 못 봤지만 여기 앉아서 제가 판정을 해드릴께요. 누구든 목소리 큰 사람이 진 겁니다. 넉넉한 사람, 여유 능력이 있는 사람은 온유할 수 있습니다. 함께 분해할 것도 억울해 할 것도 없습니다. 게다가 자신만만하면은 웃음이 있습니다. 빙그레 웃으면서 대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이긴 거예요. 예수님께서 지금 저 앞에 제사장과 바리새 교인들이 십자가를 준비해 놓고 시간을 기다리며 카운트 다운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이 그 악당의 소굴을 향해서 나귀를 타고 만세소리를 들으면서 올라가는 모습을 보세요. 이 기가막힌 유머가 여기 있습니다. 여유만만 입니다. 남이 이렇게 생각하든 이렇게 오해를 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여유만만합니다. 여기에 해학이 있습니다. 특히 이 깊은 뜻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 본문 가운데는 권세는 겸손이다. 겸손하여 나귀새끼를 타고 올라간다. 이 초라한 행사 속에 이 조용한 사건 속에 엄청난 능력이 숨어있는 생명력이 계시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그 겸손이라는 것은 곧 능력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빌립보 2장 7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스스로 자기를 비어서 사람이 되고 종의 형체를 입었다고 말합니다. 여기 비었다는 말, '에케노센', 이건 Empty, 없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아나 모르는 자로, 할 수 있으나 할 수 없는 것처럼, 능력이 있으나 아무 능력도 없는 것처럼 그것이 겸손입니다. 여러분 말하고 싶다고 다 합니까? 안다고 다 아는 척 하겠습니까? 그건 겸손이 아니에요. 알고도 모르는 척 하는 게 아니에요, 몰라요. 할 수 있어요. 그러나 할 수 없어요. 그렇게, 그것이 겸손이요. 얼마든지 반항할 수 있어요. 그러나 전혀 반항할 마음이 없어요. 비웠어요. 자기 능력, 자기 존재를 완전히 비워버렸어요. 이것이 겸손이었습니다. 자 보세요.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그 앞에 있는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그리하면 믿겠노라. 장님의 눈을 뜨게 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능력을 행하던 사람이여, 이제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그리하면 믿겠노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죄송하지만 저 같으면 내려오겠어요. 털렁 뛰어 내려서 "봐라 이놈들아" 그랬으면 얼마나 통쾌할까. 그러고 싶을 거예요. 그러나 참았어요. 이걸 비우고 나니 어떻습니까? 능력도 없지요, 남은 살리고 자기는 죽고, 남은 고치고 저는 못 고치고 무능하고 초라하고 형편없어 지는 거예요 지금. 그것이 겸손이에요. 그러나 그 속에 굉장한 능력이 숨겨있죠. 또 하나, 죽기까지 복종했다고 했습니다. 복종해야 될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복종했습니다. 거기에 또한 놀라운 역사가 있는 겁니다. 십자가에 돌아 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 기도하시지 않습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주께 복종합니다. 내 뜻을 포기합니다. 내 의견, 내 생각, 내 판단 깨끗이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복종합니다. 이것이 힘이 모자라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바로 이것이 겸손입니다. 여러분은 당신의 의견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하여 얼마나 복종해 보셨습니까? 아주 기쁜 마음으로 깨끗한 마음으로 복종해 보셨습니까? 복종의 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영영 불행합니다. 어찌 나 하고 싶은 대로만 살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분들은 복종을 하긴 하는데 굴종을 해요. 신세타령하며, 팔자타령하며, "이 원수"해가면서 한평생 살기 때문에 이건 겸손이 아니에요. 겸손이 있어서 복종하게 될 때 바로 여기에 깊은 능력이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또한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랬어요. 우리는 너무 결과를 빨리 기다립니다. 최소한도 나 죽기 전에 결과를 보아야겠다는 거죠. 내 수고와 내 희생에 대해서. 아니요.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엄청난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보상도 묻지 않으십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입니까? 나 죽은 다음에 제자들은 어떻게 되고 내 한평생 수고한 것은 어디로 돌아가는 것입니까? 알 바 아니요. 그저 하나님께 맡깁니다. Total commitment,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그대로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우리는 겸손도 아닌 작은 겸손에 대하여 너무 많은 대가를 요구합니다. 너무 조급한 보상을 원합니다. 그 때문에 겸손도 무위로 돌아가고 맙니다. 여러분 십자가에 죽기까지 겸손하신 거기에 겸손이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자 이제 이 겸손, 겸손한 왕,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권력과 권위는 다른 겁니다. 권력으로 행사할 때는 복종을 이끌어 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충성은 거기에 없습니다. 권위가 있을 때, 영적 권위가 있을 때에 이것은 존경과 자발적 희생까지, 심지어는 순교까지 이끌어 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교만한 자가 권력을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하게 되면 일단은 순종하겠지요. 복종하는 척 하겠지요. 그는 돌아서서 다 맘은 멀어져요. 그러나 권위로 특별히 겸손한 지도자, 겸손한 왕 그 앞에 우리는 꼼짝 못 합니다. 충성하게 되고 마지막에 순교로 희생하게 되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겸손할 때에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겸손할 때에 많은 사람을 얻게 됩니다. 겸손할 때에 자기만이 누리는 높은 권위를 스스로 강요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를 얻고 자신감을 얻고 나아가서는 많은 사람도 얻게 됩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크게 외모로 두 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하나는 키가 커서 좌우간 의자를 따로 맞추어야 했다니깐, 다리가 길어서. 그렇게 워싱턴에 가도 볼 수 있어요. 그 특별한 의자에 앉아있는데 또 키가 컸던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가 얼굴이 하도 못 생겼답니다. 너무너무 못 생겨서 이게 문제였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초등학생이 "수염을 길러 보십시오" 그래서 그 다음부터 그 위장하느라고 못생긴 얼굴을 위장하기 위해서 턱수염을 길러가지고 그 만큼도 보기 좋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야당 국회의원이 아브라함 링컨을 정면에다 대고 비난을 합니다. 비방을 하는데 "저 사람은 이중인격자요 두 얼굴을 가진 남자입니다" 그리고 갖은 욕설을 했답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빙그레 웃으면서 하는 말이 "내가 두 얼굴이 있다면 하필이면 내가 왜 이 못생긴 얼굴을 가지고 여기 나왔겠습니까?" 이렇게 여유 만만하게 대답했다는 게 아닙니까?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북 전쟁을 일으켜 놨을 때 자꾸 전세가 어려워지니까 그런 얘기를 했다지요. 주변이 있는 사람들이 "이런 때에 하나님이 우리편에 서 계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브라함 링컨이 대답하기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나는 하나님이 내 편에 있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네. 그러나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나 그것을 걱정하고 있구만." 여러분 이것이 겸손입니다. 겸손한 자는 하나님 앞에 충성되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비방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그 모습을 명상해 보세요. 이것은 계시적 사건입니다. 이 속에 무궁무진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유능한 해학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적 유머입니다. 남이야 뭐라고 하든 예수님은 충만합니다, 넉넉합니다, 여유능력이 있습니다. 여유가 있고 초연이 있습니다, 초연함이. 나귀를 타고 의연하게 예수님 입성하십니다. 이것을 보고 "세속적 왕권에 행사"라 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아리송하게 "갈릴리에서 온 선지자입니다" 하고 이렇게 하나의 퍼레이드 정도로 평해버리기도 했지요. 그러나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승리의 길이 있습니다. 영원한 승리가 거기에 약속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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