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왕의 왕을 섬기며(마21:1-11)
  • 2013.05.27 22:03:57
  •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바로 전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라고 하는 말의 유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 가실 때에 평화의 왕으로 등극하는 절차가 다 갖추어 졌습니다. 그리고 환영을 받으면서 입성을 하시는데 그 중에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이 종려 나무 가지를 베어서 길을 펴기도 하고 흔들면서 환영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연유가 되어 종려주일이라고 하는 말의 유래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왕의 절차를 다 갖추시고 지금 입성을 하시는데 꼭 나귀를 타고 입성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나 성경에서 보면 말이라는 짐승은 전쟁의 상징으로 나오고 있는데 특히 그중에서도 요한계시록에 보면 거의 말이 전쟁의 상징으로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나귀는 평화의 상징이었는데 이것은 나귀를 타고는 싸우는 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유대 지방에서는 나귀를 많이 기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평화롭게 사용되던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것은 곧 예수님이 평화의 왕이 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때 많은 백성들이 환영하면서 옷을 깔아 펴놓고 그 다음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흔들면서 "호산나!" 하는 찬송을 부르면서 환영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평화의 왕과 영적인 왕으로서 입성을 하고 있었던 것에 반하여 백성들은 자기들을 로마의 정치적 억압에서 구원해 줄 힘있고 능력있는 임금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즉 정치적인 메시야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만왕의 왕으로 입성하실 때에 이런저런 섬김의 모습들을 우리는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그 섬김이 참으로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만왕의 왕되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우리도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이 원리를 따라서 섬기면 참 훌륭한 모습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오늘의 제목을 『만왕의 왕을 섬기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나귀의 봉사(2절) 
    첫째, 매여 있는 나귀(2절) 
    2절 말씀을 보면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보면 헌신적인 봉사에 사람이 등장하지 않고 나귀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귀가 말없이 등장하여 봉사하는 것을 볼 때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분명히 주님은 매여있는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매여있는 나귀만을 골라서 쓰셨다는 말이 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나귀가 매여있지 않고 풀려 있었다고 한다면 나귀는 갈 곳 못갈 곳을 다 다녔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고를 저질렀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쓰실 때에 매여있는 나귀를 고르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주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때에도 이렇게 매여있는 사람을 먼저 쓰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무엇으로 매여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씀과 성령으로 매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원하시는 때에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야말로 우리의 봉사가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 봉사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멍에 메는 나귀(5절) 
    5절을 보면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보면 명에 메는 짐승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유대 지방에서는 우리와는 다르게 일상 생활에서 나귀에게 멍에를 메워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소에 멍에를 메워 사용하듯이 이 나귀도 주인이 멍에를 메우면 멍에를 메야하고 또 벗기면 벗어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는 벗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메워주는 대로 메고 순순히 봉사하는 나귀를 예수님께서는 선택하여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 나귀처럼 봉사라고 하는 멍에, 사명이라고 하는 멍에는 내가 메고 싶다고 해서 메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여러분을 쓰시겠다고 하면 아니라고 발버둥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나를 필요로 해서 부르시거든 순순히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에 이리저리 핑계를 대면서 빠져나가려고 한다면 주인이 나귀를 때려서라도 멍에를 메게 하듯이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메어 주는 멍에와 사명의 멍에 그리고 봉사의 멍에를 묵묵히 메고 주님이 마음대로 쓰실 수 있도록 순종하는 봉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젊어서 메워진 멍에를 메고 순순하게 봉사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셋째, 아무도 타보지 않는 나귀(막 11:2) 
    마가복음 11장 2절에 보면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만 있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어미와 새끼 두 마리를 끌어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미 나귀를 타신 것이 아니라 아무도 타보지 않았던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 어째서 예수님께서 이 새끼 나귀를 타셨는가 하면 누구를 위해서도 아직 봉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제일 먼저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주님 제일주의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일보다도 먼저, 무엇보다도 먼저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무슨 일을 해도 이것은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할때 주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나의 생활 중심에 주님이 주인이 되는 생활을 말하는 것이며, 주님 제일주의로 살아가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고 또 주님께서 기쁘시게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나귀가 주님을 위해서 했던 봉사에서 우리가 배울 것이 참 많이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봉사하면서도 생색을 내거나 자랑하지 않았고 목에 힘주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주님께서 쓰시는 대로 묵묵히 쓰여지다가 말없이 물러갔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는 봉사, 그리고 우리가 섬기는 섬김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위해 하는 것인데 어째서 사람 앞에서 머리를 들고 제 자랑을 합니까? 헌금을 많이 한다, 전도를 많이 한다고 교만해질 것이 아니라 이 나귀처럼 말없이 조용히 봉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만왕의 왕을 섬기는 법입니다. 
    2. 즉시로 하는 봉사(3절) 
    3절에 보면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 저 맞은편 마을에 가면 매여 있는 나귀가 있을텐데 그 나귀를 끌고 오너라. 그리고 나귀의 주인이 무엇이라고 하면 주님이 쓰시겠다고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나귀의 주인이 가만 있을 리 없습니다. 여보시오! 왜 남의 나귀를 풀어가는 것입니까?" 하자 제자들이 "주님께서 쓰실 것" 이라고 말하자 그 즉시로 보내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즉시로 하는 봉사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어떤 주경 신학자는 말하기를 나귀 주인과는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약속이 되어 있었더라면 예수님의 제자들을 제자들을 몰라 볼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 나귀의 주인은 예수님께서 필요하시다고 했을 때 즉시로 보냈습니다. 우리 같으면 키워서 한번도 부려보지 못했던 짐승을 요구할 때 아까워서 오늘은 내가 쓸테니 예수님을 내일 쓰시라고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만약에 나귀의 주인이 그렇게 했다면 예수님에게는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 내일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주님께서 오늘 나에게 봉사하라고 하실 때 '주님 오늘은 좀 바쁘니 급한 일을 먼저 하고 내일하면 안되겠습니까?' 하고 대답하면서 내일로 미루는 봉사는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내일이 아니라 지금 즉시로 하는 봉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미국의 유명한 교육가요, 철학가요, 정치가요, 언론인이었던 프랭클린에게 하루는 한 농부가 달구지에다 자기가 농사지었던 여러 가지 좋은 것들을 싣고 왔습니다. 깜짝 놀란 프랭클린이 농부에게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농부가 하는 말이 "제가 얼마 전에 워싱톤에 왔다가 존경하는 선생님을 뵈옵고 그냥 돌아가기가 섭섭해서 저한테 일생동안 필요한 말씀을 써 주셨던 것을 혹시 기억하시겠습니까?" 그러자 프랭클린은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해서 "제가 무엇이라고 하였던가요?" 하고 농부에게 묻자 이 농부가 하는 말이 선생님께서 저에게 메모해 주신 말씀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너무 좋아서 다른데다 옮겨 적지도 않고 안방 벽에다 붙여 놓고는 매일 보면서 좋아했습니다. 저는 농사를 많이 짓기 때문에 일꾼들이 많이 있는데 이들과 일하면서도 이 말씀을 잊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해서 밀 농사가 아주 잘되었습니다. 그래서 밀을 수확할 때가 되어 밀을 다 베었는데 해가 기울어 들판에 그대로 두었는데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힘들어도 밀을 창고에 다 들여 놓았습니다. 그런데 일꾼들이 얼마나 불평을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룰 수 없어서 일꾼들에게 사정을 하면서 다 들여 놓았습니다. 그날 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우박이 쏟아져서 들판에 있던 밀이란 밀은 우박을 맞아서 못 쓰게 되었지만 저희 밀 만은 하나도 손해 본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선생님 덕분이기 때문에 너무 고마워서 이렇게 예물을 가져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는 이 말은 얼마나 귀중한 말입니까? 이때 바로 예수님께서 네 나귀를 오늘 쓰시겠다고 했을 때에 "주님! 이 나귀는 제가 급히 써야하니 내일 쓰세요" 라고 하였다면 주님께서는 아마 필요없다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께서 우리의 봉사가 필요해서 부르실 때에는 핑계를 대지 말고 즉시로 봉사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즉시로 하는 봉사가 만왕의 왕을 섬기는 방법입니다. 
    3. 명한 대로 봉사(6절) 
    6절 말씀에 보면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대로 하여"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께서 명하시니 즉시로 가서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예수께서 명하셨을때 실천으로 옮긴 사람이 누구냐 하면 이름은 나와 있지 않지만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모두 열 둘이었지만 그 중에서 두 사람이 명하신 대로 봉사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 만민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을 따로 선택하였습니다. 그 택한 민족 가운데 열두 사람을 뽑았습니다. 또 그 중에서도 두 사람이 뽑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는 쓰실 적에 꼭 "뽑아서 쓰신다" 는 것입니다. 뽑힌 중에서 또 뽑힌 사람이 오늘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 봉사했던 두 제자인 것입니다. 건너 편에 가서 끌고 오너라 하실 때 다른 열 제자는 무엇을 했습니까? 쉬고 있거나 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들 쉬고 있는데 왜 우리만 힘들여서 심부름을 해야 하느냐고 불평할 수 있었겠지만 그들은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러워 했던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이렇게 땀 흘리며 봉사할 수 있었다는 것을 기쁨으로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를 쓰시려고 부르실 때에는 기쁘고 감사할 일이지 원망하거나 불평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제자가 갔을 때 둘이서 옥신각신 싸우면서 일한 것이 아니라 서로 협조를 잘하여 하나씩 나귀를 끌고 왔습니다. 우리가 봉사를 할 때에도 서로 협력을 잘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남의 할 일을 빼앗아 하면서 좋아할 것도 없고 또 내가 할 일을 모두 남에게 미룬다든지 하는 것은 원치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시키신 일을 꼭 명하신 대로만 실행한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시키시는 방법으로 그리고 원하시는 데 까지만 봉사하면 주님께서 아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봉사요, 기뻐하시는 봉사이며 주님이 쓰시는 사람의 할 일입니다.

    이런 가정을 우리는 성경 속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는 바로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의 가정입니다. 이 롯의 가정은 소돔과 고모라 성이 유황불로 멸망할 때에 구원을 받은 가정입니다. 그렇지만 온 가족이 다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두 사위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그곳에 남아 있다가 모두 멸망 당했고 또 롯의 아내는 두고 온 재산 때문에 뒤를 돌아 보다가 그만 소금 기둥이 되어버리는 불행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 때문에 구원을 얻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아주 부끄럽고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또 한 가정은 노아의 가정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다 준행했다고 반복해서 기록해 놓았습니다. 노아가 120년 동안 방주를 지으라고 할 때에 방주의 모형이며 배의 재질을 일일이 지적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배 안에 들어갈 짐승 그리고 일년 동안 먹을 양식까지도 일일이 가르쳐 주셨느데 이것을 하나도 어김 없이 다 준행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노아의 여덟 식구가 맑은 하늘인데도 방주에 들어가자고 할 때에 가족이 모두 다 함께 들어갔기 때문에 모두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롯의 가정과 노아의 가정이 이렇게 다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롯의 가정은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의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시키신 대로 순종하고 봉사하였기 때문에 영광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순종하면서 봉사하는 사람을 쓰시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4. 본받아 봉사(7-11절) 
    7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이는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고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그 백성들과 무리들이, 제자들이 어떻게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나귀 위에 타시기 위해 자기들의 옷을 벗어서 깔아놓았습니다. 그것을 본 무리가 저마다 옷을 벗어서 길에다 깔아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앞 서고 뒤서고 하면서 주님을 환영해 주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다가 길에 깔기도 하고 흔들기도 하면서 나귀를 타신 예수님께 호산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다음에는 호산나! 호산나! 하고 주님을 찬송하니까 주변에 몰려서 있던 사람들이 모두 따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저마다 다른 사람의 잘하는 점을 본받아 봉사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들어 갔더니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말하기를 저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 하고 묻자 나사렛에서 온 선지자 예수라고 그들은 외쳤습니다. 여기에서는 선지자라고 하였으므로 모든 선지자가 다 포함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만 헬라어 원문에는 정관사가 있어서 특정한 선지자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마치 모세가 히브리 백성들을 구원하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던 구원의 모형을 말하는 그 선지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말하는 선지자란 보통의 선지자가 아니라 모세와 같이 자기 백성을 구원해 낼 선지자 즉 메시야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대답한 말은 예수께서 메시야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말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겉만보고 예수가 누구냐? 하고 묻는 예루살렘의 거민들에게 따르는 백성들이 서슴없이 대답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앞장서서 봉사를 잘하는 것도 좋지만 남들이 봉사할 적에 본을 받아서 봉사하는 것도 매우 귀한 것입니다.

    슈바이처 박사라고 하면 20세기의 양심이요, 성자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슈바이처는 독일과 불란서 국경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한 때는 독일 국민이 되었다가 또 어떤 때는 불란서 국민이 되기도 했습니다. 슈바이처는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교회를 담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이미 파이프 오르간에 대해서는 당대에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슈바이처는 나중에 의학 공부를 해서 의사가 되었습니다. 왜 그 분이 의사가 되려고 했느냐 하면 아프리카에서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살고 있는 불쌍한 원주민들을 돌보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슈바이처는 그 당시 어느 분야에서도 뛰어났기 때문에 얼마든지 행복하고 넉넉하게 살 수 있었지만 그는 아프리카의 밀림을 찾아가서 '람바네네 오고에' 의 강가에 병원을 짓고 죽을 때까지 그들을 돌보며 살았던 성자였습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신당동에 가면 신일교회가 있는데 지금은 예배당을 잘 지었습니다만 이일선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목사님 역시 목사이면서 의사였는데 슈바이처 박사를 통해서 많은 깨달음을 받고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 가기위해 교회에 사표를 내고 슈바이처 박사를 찾아가서 1년 동안 열심히 보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울릉도로 갔습니다. 그 당시에는 울릉도에 교회하나 제대로 변변한 곳이 없었고 병원도 쓸만한 것이 없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울릉도에다가 병원을 세우고 또 교회를 세우고 슈바이처 박사처럼 죽을때까지 울릉도의 주민들을 돌보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일선 목사님을 가리켜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렇게 본을 받아 봉사하는 것도 매우 귀중한 일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만왕의 왕이 되신 예수님을 섬길 때 말없이 봉사하고 또 즉시로 봉사하며 또 명한대로 봉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만왕의 왕되신 예수님을 우리도 이렇게 봉사해서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기꺼이 영접하고 동참하실 수 있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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