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겟세마네의 기도(마26:31-56)
  • 2013.06.03 20:53:05
  • 오늘(2000년 3월 5일)은 우리 푸른 교회가 설립된 지 1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우리 푸른교회는 IMF가 극심하게 맹위를 떨치던 1999년 3월 1일에 설립된 교회입니다. 제가 처음에 교회를 준비하며 주변의 많은 친구와 선배 목사님들을 찾아가서 교회 설립을 위한 기도를 부탁드릴 때 하나같이 제 주변의 분들은 이 어려운 시기에는 교회 설립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간곡히 만류를 하였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이런 IMF 시기에 교회를 개척해서 6개월 내로 망하지 않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고 말씀을 하였습니다. 전 아직도 궁금해요. 그 분이 정말 장을 지지긴 지졌나 하고 말입니다. (웃음)
    실제로 어렵긴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푸른교회는 주변에서 누가 마이크 하나 사주는 이 없는 어려운 시기에 시작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함으로 1년 동안 무려 3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을 해 온 것입니다. 
    우리 푸른 교회는 처음에 설립될 당시부터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설립된 교회였습니다. 우리 푸른교회는 애초부터 사람이나 어떤 전통이나 기타 가른 것에 의해 이끌어져 가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몇 몇에 의해 주도되고 이끌어져 가는 교회라면 그 주도적인 사람(목사나 혹은 어떤 특정 인물)이 갑자기 교회를 떠나면 교회는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갈팡질팡하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람 하나 있고, 없고에 따라 교회의 존립이 좌우된다면 그 교회는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믿고 의지하며 신앙의 터전으로 삼기엔 너무 불안한 곳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또 누가 있건 없건 상관없이 언제나 교회의 고유한 사명을 가지고 그 사명을 향해 전진해 가는 바람직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고민하다가 목적이 이끌어 가는 교회로 만들기 위해서 성경 속에서 3가지 푸른교회의 목적을 세웠습니다. 우리 푸른교회의 3가지 목적은 바로 이것입니다. 
    "1. 우리는 전파한다"  무엇을요? 하나님을 말씀을
    말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말씀을 가르치기 위한 고민의 일환으로 목사인 저부터 가장 어렵고 스스로 많은 수고와 어려움을 감수해야만 하는 강해 설교를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우리는 가르친다"입니다. 무엇을요? 기독교 교육을! "3. 우리는 키운다"입니다. 누구를요? 청소년들을 말입니다. 이 세 가지 목적은 우리 푸른교회가 누가 있건 없건, 형편이 좋건 나쁘건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재림의 날까지 계속해야할 우리들의 사명인 것입니다. 
    우리 푸른교회는 그래서 이런 목적 아래 젊고 깨끗한 교회가 되기 위해 그 동안 여러 가지 원칙들을 세웠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푸른교회는 예배 중에 헌금함을 돌리지 않고 입구에 있는 헌금함에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헌금을 하도록 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그렇게 하면 헌금이 많이 안나오기 때문에 반드시 헌금 바구니를 돌려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성경 속에서 참된 헌금은 액수보다 헌금을 바치는 사람의 자세가 더 소중하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헌금 바구니를 돌리는 것보다는 헌금함에 자발적으로 헌금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우리는 주일에는 돈을 쓰지 않고(매매 금지) 경건한 하루를 보내기 위해 토요일에 미리 모든 필요한 것을 준비하여 참된 예배에 나아 올 수 있도록 준비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또 우리 푸른 교회는 그 외에도 전 교인이 하나님의 비전과 올바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LTC훈련을 받기로 했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 원칙들이 있지만 이런 원칙들을 제가 정리를 해 보니까 크게 두 가지로 요약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두 가지는 바로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첫째, 목사인 저는 푸른교회에 대한 모든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푸른교회는 개인적으로는 제가 전세금과 15년 동안 목화를 하고 사임한 제 퇴직금을 모두 쏟아 부어서 세운 교회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것들로 인해 제게 어떠한 특권이나 기득권이 주어지기는 것을

    단호히 거절하겠습니다. 제가 푸른교회를 떠나야 할 때가 온다면 그때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떠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세운 교회라고 해서 평생 푸른교회에서 목회 할 것이라는 기득권도 포기하겠습니다. 그래서 6년동안 열심히 목회를 한 후 교인들에게 시무투표를 받겠습니다. 그래서 투표결과에 따라 만약 교인들이 저를 원치 않으면 다른 목회자를 후임자로 모셔들이고 저는 아무 조건 없이 푸른 교회를 떠날 것입니다. 만약 성도들이 저를 계속 푸른교회 목사로 사역하기를 원하신다면 저는 7년째 되는 한 해를 안식년으로 쉬며 기도와 더 나은 목회를 위한 준비로 재충전 한 후 다시 6년간 열심히 목회를 해서 다시 6년이 지나면 교회 앞에 또 재신임 투표를 받을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제가 푸른교회에 있는 동안 평생 진행할 것이며 또 6년이 꼭 다 차지 않아도 제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교회를 이끌어 가는 목사로서 정직하지 못하고 잘못된 일과 부끄러움이 있을 때는 여러분께 솔직히 고백하고 재신임 투표를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난 1년 동안 세운 첫 번째 큰 원칙입니다. 
    두 번째 원칙은 우리 푸른 교회는 제직을 세울 때는 반드시 주일을 성수하고 십일조를 바치는 교인으로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요즘 같이 교회 직분을 돈주고 사는 성직 매매의 시대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일꾼을 세우는 일엔 신중을 기해서 푸른교회에서 집사라면 다른 교회의 장로나 권사보다 더 큰 자부심을 갖는 교회로 만들 것이라는 원칙입니다. 우리 푸른 교회는 이러한 원칙들을 위해 늘 기도하며 오고 오는 우리 후손들에게 복음의 진리와  지역사회와 수도권 일대를 향해 복음의 깃발을 높이 드는 노아의 방주와 같은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를 물려 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줄곧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기도를 보여 줌으로 예수님을 따라 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예수님의 기도를 따라 하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30절에는 예수님이 그 사역의 마지막 완성인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산에 가셔서 기도하셨던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산 중에서도 특히 예수님은 겟세마네란 작은 동산에서 즐겨 기도하셨는데 오늘 본문의 내용이 바로 이 곳에서의 기도를 다르고 있습니다. 
    이 겟세마네에서의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의 절정에 해당하는 기도였습니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이 장면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기도가 어떤 기도였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기도 내용, 기도 자세, 그리고 얼마나 간절한 기도였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눅22:44절을 보면 이 겟세마네에서의 기도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오해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은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만 피같은 땀을 흘리며 기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처음부터 내내 겟세마네의 기도같이 간절하고 목숨을 건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피같은 땀을 흘리며 부르짖는 기도였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 점을 올바로 깨달을 때 예수님의 본질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히5:7을 보면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는 일생동안 내내 심한 통곡과 눈물로 계속된 기도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특히 "육체에 계실 때에"라는 말은 "육체로 사는 날 동안에"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매번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도를 동반한 기도를 드렸을까요? 어떤 학자들은 그 이유를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같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세력들이 예수님을 죽일 음모

    를 계속 꾸미고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를 질 때가 이르기 전까지는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부탁하는 기도를 드리기 위해 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총신대 유상섭 교수의 이론) 참 좋은 이론입니다. 하지만 저는 좀 더 성경적인데서 그 이유를 찾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사역하시는 동안 내내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한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마5:4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5:4에서 친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위로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응답으로 주어지는 위로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기도가 응답을 받는 기도입니까? 그것은 바로 애통하는 기도가 응답 받는 기도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기도란 근본적으로 애통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서러움을 당하고 가난에 복받치고 이웃에게 멸시받아 한이 맺혀서 우는 것이 아니라 세리와 같이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죄악과 무능함과 나약함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애통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바리새인같이 교만한 자에게는 애통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죄악과 나약함과 무능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겸손하게 애통할 때 하나님의 응답이 크게 나타남을 깨달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하신 이 기도는 어떤 기도였을까요?

    먼저, 목적 지향적인 기도가 아니라 관계 지향적인 기도였습니다. 
    눅22:39을 보면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죽기 하룻밤 전에 필사적으로 기도를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기도는 늘 평소에 진행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길러보면 두 종류의 자녀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평소에 말을 않듣고 망나니 처럼 살다가 무슨 다급한 일이 생기면 꼭 뒤늦게 부모를 찾아오는 자녀와 평소에 부모를 잘 따르고 순종 잘하고 부모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자녀 중 어떤 자녀를 부모는 기뻐할까요? 물론 부모는 말 않듣는 망나니 자녀나 착실한 자녀나 모두를 사랑하기에 어려움에 처하면 도와 주기는 합니다. 하지만 평소에 부모와의 관계를 잘 이루어 가는 자녀에게 더 사랑의 마음이 가고 이런 자녀에게 어려움이 생기면 도와 달라고 말하기 전에 미리 부모는 도와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똑 같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기도를 무슨 급한 일 생길 때 합니다. 그래서 가족 중에 누가 대학 시험이라도 봐야 기도하고, 사업이나 부도나야 기도하고, 가정에 무슨 일이 생겨야 기도하고, 우리 자녀에게 무슨 일 나야 비로소 기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실 때에 행한 일 중에 대부분이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에 앞선 것이 언제나 기도였습니다. 반드시 기도하신 후에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두번 도 닦으려고 산에 올라 가신 것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습관적으로, 규칙적으로 산에 올라 기도를 하셨던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하신 이 기도는 천사가 도운 기도입니다. 
    눅22:43은 예수님이 이렇게 피땀을 흘리며 기도할 때 "천사가 돕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왔다는 것은 '힘을 주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너무나 간절하고 목숨을 건 피땀 흘리는 기도였기에 탈진한 상태였기에 천사가 와서 힘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와서 기도를 도왔다는 내용은 성경에서 그 유래가 없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종종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실 때 천사를 보내 하나님의 응답을 전달한 경우가 있습니다. 삼손의 아버지가 기도할 때도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셨고, 히스기야 왕이 기도할 때도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의 군사 18만 5천명을 하룻밤에 몰살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또 다니엘서 9장을 보면 다니엘이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고자 기도할 때 하나님이 천사 가브리엘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또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도 예루살렘 성도들이 간절히 기도하자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베드로를 감옥에서 꺼내 주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오늘 본문을 제외하고는 천사가 나타나서 기도를 도왔다는 구절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를 했던 예수님만 천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사의 도움으로 힘을 얻어 더욱 간절하고 애절하게 하나님께 기도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구절을 보면서 나도 기도할 때 천사의 도움을 좀 받았으면....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사의 도움은 일시적인 도움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일시적인 천사의 도움 대신 영구적인 도움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바로 성령님의 도우심입니다! 롬8:26을 보면 성령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기도의 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연약하고 기도가 힘들 때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공급받고 그 능력을 의지하여 뜨겁고 불타는 기도로 나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

    원합니다!!

    세 번째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임박한 십자가의 죽음과 관련하여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이 직접 가르친 주기도문을 몸소 실천하신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에도 보면 예수님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라고 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쳤었습니다.

    39절 -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이 구절에는 예수님은 자기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두 번이나 언급하였던 것입니다.(할 만 하시거든, 아버지의 원)  예수님은 하나님이 할 수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잔이란 예수님이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마실 저주와 진노의 잔, 즉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죽음을 '잔'이라고 표현을 한 것은 이미 바로 전에 유월절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주시며 세우신 새 언약의 잔과 연관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주는 포도주 잔을 마심으로 새 언약의 축복에 들어갔지만 예수님은 그들은 대신해서 저주와 진노의 잔을 마셔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난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 들였는가는 우리가 38절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38절 -

     우리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까 십자가의 고난도 그냥 장난처럼 쉽게 한번 올라갔다가 내려온 정도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현설이라는 1세기 경에 나타난 이단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지신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심히 고민하고 죽을 것 같은 고뇌에 찬 기도를 올리시면서 할 수만 있다면 지나가기를 원했지만 자기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란 주위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하여 그 뜻에 순종하도록 나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기도일수록 환경을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것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약에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아도 되도록 환경을 바꿔달라고 기도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까요? 그러므로 우리 기도를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는 환경을 바꿔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귀 기울이는 참된 기도를 올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피땀을 흘리는 기도였다. 
    우리가 이미 살펴 본대로 눅 22:44절을 보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핏방울(thrombos haimatos)이란 말은 약간의 핏물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많은 양의 응고된 핏덩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실 때 응고된 핏덩이 같은 땀을 엄청나게 많이 비 오듯이 땅에 흘리며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원색적인 표현을 통해서 예수님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였으며 고뇌에 찬 기도였는가를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관 비유에서 우리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가르치시며 강청하는 기도를 하라고 하셨던 예수님은 친히 몸소 강청하는 기도를 실천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도 한번, 두 번, 세 번 하고 포기하는 기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기도처럼 피땀을 쏟으며 간절하게 강청하는 기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를 보면서 이제 우리의 기도도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나의 기도는 규칙적으로 진행되는 관계 지향적인 기도인가? 나는 무슨 일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아닌가?, 또 나는 예수님이 천사의 도움을 받아 기도하셨듯이 전적으로 성령을 의지한 기도를 올리고 있는가?, 그리고 나의 기도는 전적으로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인가? 아니면 나의 원하는 것만 달라고 하는 기도인가?, 그리고 과연 나는 기도할 때마다 피땀을 쏟는 간절함을 담고 있는 기도인가?  다시 한번 되새겨 볼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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