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6-46)
  • 2013.06.03 21:05:21
  • 오늘은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 주님이 당하신 고난을 묵상하시면서 기도생활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사순절을 보내시면서 주님의 고난을 조금이라도 더 체험하고, 주께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잠잘 것 다 자고, 찾아 먹을 것 다 찾아 먹고, 가보고 싶은 데 다 찾아다니면서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면서 나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었습니다. 이 말은 세례요한이 우리 주님 예수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세상 죄"란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의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 우리의 더럽고 추한 허물과 죄도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우리 주님을 증거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런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철저히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만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살아가는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험한 세상을 왜 살아가는 것입니까?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살아가는 이유가 되십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일생의 목표가 되십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세례요한처럼 예수님만을 높이고 따르고, 자랑하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기쁨을 누리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쇠하여야 하겠고, 예수님은 흥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우리의 자아는 축소되어야 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은 더욱 커지고 팽창되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더욱 왜소해져야 하고, 우리 안에서 주님은 거대해져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볼 때 보잘것없게 보이는 반면 예수님은 가장 존귀하게 보여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주일 아침 런던의 한 교회에서 아주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하는 말이 "오 정말 놀라운 설교자로구나!"칭찬하면서 나왔습니다. 그 날 밤 이 사람은 다시 저 유명한 스펄죤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나오면서 "오 정말 놀라운 구세주로구나!"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오늘 설교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서 우리 주님이 나타나야 합니다. "아무개 과장은 달라 보여, 세상에 없는 사람 같아,예전엔 그렇지 않았다고 하던데, 예수 믿더니만 정말 확 달라졌어, 저 사람 같으면 예수 믿어야 해" 이래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주님이 공생애의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함께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이라는 감람산의 서쪽 자락을 부르는 이름입니다. 본래의 산 이름은 감람산, 즉 [올리브 산]이라는 이름입니다. 이 산의 서쪽 중턱을 겟세마네 동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동쪽 문을 나와 기드론 골짜기를 건너가면 감람산에 이릅니다. 감람산의 남쪽 능선을 따라가면 [범죄자의 산] 또는 [멸망 산]이라는 산이 나오는데 여기까지 감람산이라고 부릅니다. 어찌하여, 이런 험한 이름이 주어졌느냐고 하면 솔로몬 왕이 이곳에 우상의 전각을 짓게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고대의 감람산에는 지금보다 감람나무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이 감람산에는 감람나무가 아주 많습니다. 이 감람산에는 기독교회와 이스람교의 유명한 교회들이 있습니다. 감람산 꼭대기에는 희랍정교회의 [승천 수도원]이 있습니다. 이 예배당은 아주 특색이 있는 종탑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밟으셨다는 돌에 두 발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는데 [승천 수도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가신 모습대로 오신다고 했으니 이곳이 승천교회이며 재림하실 교회라고 말합니다. 감람산의 북쪽으로 올라가면 마리아의 무덤이라고 전해 내려오는 자리에 [마리아의 무덤 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 안에는 희랍 정교회와 콥트 교회가 들어 있습니다. 두 교회가 운영하는 셈입니다. 이 감람산에는 [성 막달라 마리아의 러시아 정교회]가 있는데 전형적인 비쟌틴 양식으로 지은 건물입니다. 감람산에는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셨다는 [눈물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의 이름은 [도미누스 플레빗]이라 부르는데 예배당의 모습이 눈물이 떨어지는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감람산에는 [갈멜 수도원]과 [갈릴리 사람들의 교회]라는 희랍 정교회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감람산 너머에 산에서 가장 가까운 벳바게라는 동리에는 예수님이 나귀를 타실 때 큰 돌을 밟고 타셨다고 하는데 그 돌에 한 발자국이 생겨나서 그 발자국이 난 돌을 보존하기 위한 [인보문]이라는 이름의 이슬람교의 회당이 세워져 있습니다. 감람산에 있는 교회 중에 가장 중요한 교회이며 처음에 세워진 교회로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성 헬레나]가 세운 것인데 이 성소는 [엘레오나]라고 하였습니다. 올리브-감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교회 안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셨다고 하는 조그만 동굴이 있습니다. 이 성소는 7세기 경 페르시아 군대에 의하여 파괴되었으나 후에 1869년에 주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셨다는 뜻으로 [주기도문 교회]를 세웠습니다. 본래의 이름은 [우리의 아버지]라는 교회인데 이 교회는 성소와 그 복도 벽에는 세계 40개국의 주기도문을 각 나라 언어로 새겨놓았습니다. 이 예배당에는 우리 한글로 쓰여진 주기도문도 있습니다. 그리고 기드론 골짜기 가까운 쪽에 유명한 로마카톨릭 교회가 하나 있는데 이 성당 안에는 [주님이 고민하신 바위](Rock of Agony)라는 넓고 큰 바위를 보호하여 그 위에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순례자들이 이 바위를 붙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 뒤에는 아주 오래된 감람나무들이 여덟 주가 있는데 약 1,000년이 지났다고 합니다.

    이 감람산은 신약에 자주 등장하는 산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 있어 마지막 한 주간은 이 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바로 이 산에서 우리 주님이 기도하시다가 유대인들에게 잡히셨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올 때면 중앙의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지 않고 요단강 동편의 베뢰아 지역으로 우회하여 내려오다가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길로 와서 베다니와 벳바게 동리를 거쳐 바로 이 감람산을 넘어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베다니와 벳바게 동리에서 나귀 한 마리를 타시고 이 감람산을 넘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예루살렘에 오실 때마다 낮에는 성안에 들어가셔서 백성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으며, 밤에는 이 감람산에 오셔서 기도하시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주 예수님은 낮에는 성 안에 들어가셨으며, 밤에는 베다니로 나오셔서 나사로의 집이나 문둥이 시몬의 집에 유하기도 하셨으나, 주님이 잡히시던 밤에는 감람산에 오셔서 기도하시다가 잡히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다가 잡히신 동산은 특별히 겟세마네 동산이라고 불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은 참으로 정다운 동산이요, 아름다운 동산입니다.

    이 겟세마네라는 말은 아람어로 '기름 짜는 틀'(Oil press)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감람산에서 나는 올리브의 기름을 짜는 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곳은 조용하고 한적한 곳으로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자주 들른 곳이었습니다. 눅22:39 보면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 갔더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다락방 강화라고 하는 고별설교의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은 기드론 골짜기의 시내를 건너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나아가셨습니다. 그곳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끔 모이는 곳으로 선생님을 팔려는 가룟유다도 이곳을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인간적으로 가장 괴로웠던 수난의 시간을 이 동산에서 맞이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날 밤 동산으로 가시면서 고민하고 슬퍼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1.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고뇌에 찬 참 인간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오늘 겟세마네에서 만나는 예수님은 고뇌의 예수님이십니다.(36-38절)

    겟세마네 동산에 오신 예수님은 8명의 제자들에게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더 나아가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이 주님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그 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시지만,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나사렛의 청년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이 순간을 표현하기를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막14:33)라는 말로 그 감정의 폭을 더욱 심도 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고민하고"라는 말은 '극심한 불안과 근심'을 뜻하는 말입니다. 주님도 이 순간 불안하였습니다. 근심하였습니다. "슬퍼하사"라는 말은 마음에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의 깊은 슬픔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 예수께서 지금과 같은 곤경에 처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겟세마네로 나가시면서 예수의 수난의 고통이 실제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에게 있어 죽음이라는 육체적 고통은 물론이지만 그것보다도 한층 심한 고통을 주는 것은 인류의 죄를 지고 스스로 죄인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詛呪)를 받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고 하셨습니다.

    정녕 이 고통이야말로 견딜 수 없는 것으로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27:46)라는 십자가상의 절규에서 그 고통의 절정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솔직한 심정으로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이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 주님은 시편 42:5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네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라는 말씀입니다. 내 '마음'이라는 말은 내 '영혼'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인간적인 고뇌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인간으로 비하하신 예수님의 심적인 갈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노여움을 한 몸에 지시고 죽어야 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를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음을 알아야 하고, 예수님이 당하시는 고난의 심각성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참으로 말할 수 없는 고뇌 속에서 나온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죽음의 그늘이 그의 앞에 당도하였다는 사실을 확신하였습니다.

    누구든지 33세에 죽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죽어야 한다고 할 때에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은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나 죽어야 한다고 할 때 고통 없이 죽기를 바라지, 십자가 위에서 갖은 모욕과 천대를 받고, 서서히 그리고 엄청난 고통을 받으면서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은 죽음에 대한 고민, 십자가의 모진 고초, 그리고 하나님이 나 몰라라 하시는 버림을 받아야 하는 아픔 때문에 고통과 슬픔에 쌓여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번 기도를 드리셨지만, 정말 답답하고 견딜 수 없는 고뇌에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와 보았지만, 그 자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 때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전적인 자기 혼자의 싸움이었습니다. 신앙적인 결단은 언제나 혼자 결단하는 것이지, 가족이 함께 하지도 않고, 친구라고 해도 그의 결단은 그의 몫이지, 내가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적인 결단은 오로지 자기 혼자의 씨름이요, 결단인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 앞에 서서 나를 용서하신다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2. 예수님의 기도는 아버지의 뜻에 맞추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3제자를 떠나서 다시 돌 던질 만큼 가셔서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렸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가룟유다는 선생님을 팔기 위하여 만찬석상에서 뛰쳐나갔습니다. 이제는 예수님 홀로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왔습니다. 아버지의 원하시는 뜻대로 십자가로 나아가셔야 하느냐, 아니면 거절해야 하느냐 하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바클레이목사님의 말대로 세계의 구원이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에 달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일 거절하거나 물러서신다고 하면 하나님의 목적은 좌절되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예수님은 거절하실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주님이 거절하신다고 하여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교부 시대에 [터툴리안]이라는 신학자가 있었는데 그의 책 [세례론]에서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예수님이 전해주신 교훈 하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혹을 받아 보지 아니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겟세마네가 있으며 누구나 "아버지의 뜻을 이루소서"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선택할 수도 있고, 세상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선택의 기로에 놓였던 것처럼 우리도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선택할 수도 있고, 하나님을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에 악한 사단은 하나님을 거절하라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아니 악한 사단은 다음에 영접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주님은 겟네마네 동산에서 땅에 엎드려 자기를 부정하고 또 부인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어라"고 하셨습니다. (눅22:14) 얼마나 힘쓰고 애쓰고 간절하게 기도하였으면 땀이 비오듯했습니다. 진 액을 쏟아내며 기도하는데 떨어지는 땀방울이 마치 핏방울 같았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셨다는 기록이 세 번 있는데, 하나는 친구 나사로가 죽었을 때 누이 마리아의 우는 모습을 보면서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요11:34) 두 번째는 장차 멸망할 수밖에 없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감람산에서 우셨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5:7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바로 이 말씀은 우리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가리키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의 승리가 있었습니다. 기도는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는 싸움입니다. 자기의 의, 자기 교만, 이기심, 자아 중심의 모든 것을 죽여야 하고 완전히 못박는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를 완전히 바치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이러한 승리가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입니다.

    주님도 인간이셨기에 십자가로 나가신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아픔이요, 정말 수용하기 어려운 자기 희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세 번씩이나 이러한 고난의 때가 지나가기를 원하고, 옮겨지기를 소원하였지만, 그것은 주님의 이기적인 소원이었고, 결코 마음이 편하지 않은 세상적인 욕심이었습니다.

    기도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 내 뜻과 의지를 맞추는 것입니다. 기도 중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기도의 법칙을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법칙에 맞는 기도를 드릴 때면 언제나 그런 기도는 응답을 받습니다. 하늘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2하-3)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하시기 위하여 아들 예수님을 보내어주셨지만, 예수님이 거절한다면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자기를 포기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므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17-18)고 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가룟유다의 배신이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나, 총독 빌라도의 사형선고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그는 자기 스스로 목숨을 버려주셨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주님이 스스로 죽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버리시기로, 잠잠히 십자가 지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순간 아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게 내버려두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놀라우신 그 사랑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자기 외아들을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의 자리로 내 몰아버리시는 우리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당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셨기에 시험당하거나 곤고한 자리에 있는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능히 승리를 가져다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16:31)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나를 도울 수 없다고 하여도 우리 주님은 나를 모른다고 하지 않고 사랑하시고 함께 있어 주시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왜 십자가를 지시려고 결심한 것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세워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면서 살아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 주님의 죽으심을 널리 증거하면서 살아가라고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하나님께 이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결단입니다.

    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이요 이 계명을 실천하기 위하여 함께 가자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

    했기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십자가 앞으로 가까이 나아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

    어나라 함께 가자 하시는 것은 그 사람의 실천에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 뜻에 순종하고 충성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신앙

    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 뜻이라면 자신이 죽음으로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진정한 순교는 목숨이 끊어지기 이전부터 하나님께 목숨을 바친 것입

    니다. 그러므로 매일매일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죽이며 이 몸을 재물로 바

    쳐야 합니다.

    ?

    니다. 그러므로 매일매일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죽이며 이 몸을 재물로 바

    쳐야 합니다. 

    내가...기도할 동안에...여기 앉아 있으리 - 이때 예수의 정확한 장소 지정에 따라

    여덟 제자는 어느 정도 떨어져 있게 되었고 세 제자는 예수와 더욱 가까이 있게 되었

    으며 그들과 조금 떨어져 예수가 위치하여 속깊은 마음을 제자들에게 꺼내보이지 않으

    시고 오직 홀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호소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26: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 - 마가는 좀더 구체적으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막 14:33)이라고 그들의 이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실로 이 세 제자들은 예수께 가

    장 신임받던 자들로서 변화산에서도 예수의 영광을 목격했었다(17:1). 그러나 이제 그

    들은 이곳 겟세마네에서 예수의 '고민과 슬픔'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실로 그들은 예

    수의 영광의 증인이요, 고난의 증인으로 오늘 우리에게 예수의 마지막 행적을 전해 주

    고 있다.

    고민하고 슬퍼하사 - 마가는 이 장면에 대해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막 14:33)라는

    말로 그 감정의 폭을 더욱 심도 깊게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고민하고''(* , 아데모네인)란 극심한 불안과 근심을 뜻하는 말이며(빌 2:26), '슬퍼하사'(* , 뤼페이스다이)란 마음에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의 깊은 슬픔을 의미한다. 실로

    예수께서 지금과 같이 곤경에 처한 적은 없었다. 바야흐로 예수의 수난의 고통이 실제

    적으로 시작되고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때 예수께 있어서 죽음의 육체적 고통은 물

    론이지만 그것보다도 한층 심한 고통이 되는것은 인류의 죄를 지고 스스로 죄인이 되

    어(고후5:21) 하나님으로부터 저주(詛呪)를 받은 바 되는 것이었다(갈 3:13). 정녕 이

    고통이야 말로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

    까?"(27:46)라는 십자가상의 절규에서 그 고통의 절정을 이루게 된다. 

    =====26:38

    예수의 최후의 기도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 70인역(LXX)에 의한 시 42:5을 인용한 문구이다. '마

    음'의 헬라어 '프쉬케'(* )는 '바람'또는 인간의 '영혼'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데, 특히 본문에서는 성육신하신 예수의 인간적 고뇌를 암시하는 용어이다. 즉 인간으

    로 비하하신(빌 2:5-8) 예수의 심적 갈등이 이 단어 속에 침통히 새겨져 있다. 실로

    인간이 되신 예수께서는 신적 노여움의 잔을 마셔야 하는 그의 인성의 고통을 철두철

    미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죽게 되었으니 - 혹자는 본 구절을 너무 괴로워서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는 뜻으

    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구약중의 말투(사 38:1 ; 욘4:9)를 받아들여 슬픔이

    너무 심해서 거의 죽을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좋다(Taylor,

    Hill).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 '나와 함께'라는 문구는 마가복음에는 없는 부분인데 마

    태는 이를 '함께'라는 말과 더불어 부각시켜 스승과 제자사이의 긴밀한 관계성을 보여

    준다.즉 예수께서는 비록 제자들이 자신의 고난에 본질적으로 참여할 수는 없다 할지

    라도 인간적인 연민(憐憫)과 격려로써 그 제자들이 자기곁에 있어 주기를 원하셨다.

    비록 그것이 주의 인간적인 고민의 표현이라 할지라도 당신의 근심은 오직 혼자만 아

    는 근심이었다. 주께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인류 대속의 죽음의 그림자를 분명하게

    보고 계셨다. 한편 예수께서 긴히 당부하신 바 '깨어있으라'(* ,

    그레고레이테)는 현재형 동사로서 계속적으로 잠에서 깨어 일어나 있으라는 의미이다.

    또한 이 말씀은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므로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는

    경계(警戒)의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26:39

    조금 나아가사 - 누가복음에서는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눅 22:41)라고

    되어 있다. 아마 그 거리는 30-50m 사이의 짧은 거리였을 것이다. 따라서 깊은 밤중에

    극한 심적 갈등을 겪으시며 간구하시는(히 5:7) 예수의 기도 소리는 제자들의 귀에 또

    렷이 들렸을 것이며 그 애타는 심정은 그들 제자들의 마음에 넉넉히 전달될 수 있었을

    것이다.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 유대인의 기도 자세에는 서서 두 손을 들고 하는 기

    도(막 11:25), 무릎 끓어서 하는 기도(행 7:60 ; 엡 3:15)등이 있다. 실로 주께서 머

    리를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였다는 것은 자신을 완전히 비운 절대 겸손의 표시로

    서 성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이고 적극적인 복종의 표현이다.

    내 아버지여( , 파테르 무) - 마가는 아랍어적인 표현인 '아바

    (Abba) 아버지여'로 기술함으로써 그 호소의 뜨거운 호소의 뜨거운 정을 더욱 강조하

    고 있다. 진정 최후의 순간을 눈 앞에 둔 예수가 바라볼 수 있는 최선의 대상은 당신

    을 이 땅에 내려보내셨으며 또한 십자가의 쓴잔을 마시게 하실 성부 하나님 밖에는

    없었다.

    만일 할만하시거든 - 평행 구절인 막 14:36에는 '아버지께는 모든것이 가능하오

    니'로 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의 주관적인 '의지'를 나타낸 말로서 예수의 전적순종

    의식이 내포되어 있다. 즉 인성(人性)으로서의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

    이 자신의 죽음 이외에 또다른 그 무엇이 있다면 차라리 그것을 이뤄 달라는 애타는

    호소를 하고 계신 것이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 '잔'은 구약 성경에서 축복이건(시 23:5)저주

    이건(시 11:6 ; 75:8 ; 사 51:17, 22) 하나님에 의해 전달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잔'은 분명 사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전달되는

    잔을 예수께서 자발적으로 마시는 것을 의미한다(요 10:17, 18 ; 18:11). 한편 예수께

    있어서 이 '잔'은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서 예수께서 친히 감당하실 십

    자가에서의 죽음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야심에찬 요청을 하려고 왔

    을 때,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 말을 사용하여 '나의 마시려는 잔'(20:22)이

    라고 하신 바 있다. 물론 이는 단순한 생물적 죽음 이상의 의미로서 하나님과의 단절

    이라는 영적 고통도 내포하고 있다(27:46). 이와 더불어 본문의 '지나가다'라는 동사

    는 유월절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출 12:23에서는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

    엘의 집에는 재앙을 내리지 않고 '지나가는'라는 장면이 나온다. 따라서 '지나가다'는

    말은 죽음의 재난을 피한다는 의미와 함께 하나님의 안전한 보호를 소망하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 예수의 인성(人性)에 의한 불안과 고뇌에 찬

    갈등의 시간이 다하고 신성(神性)에 의한 전적인 순복(順服)이 이뤄낸 궁극적 결론이

    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의 의지를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굴복시킴으로써 그잔을

    마시기로 결연히 다짐하신 것이다. 이제 예수의 기도의 주제는 이 '잔'을 마실터인데

    충분히 그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 능력을 더하여 주십사는 것으로 변

    하게 된다(눅 22:43). 한편 성부 하나님은 성자의 이 순결한 호소에 '부활'로써 응답

    하신다(히 5:7, Homer A. Kent Jr.). 

    =====26:40

    제자들에게 오사...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 예수는 당신의 고난의 헌장에 함께 동

    참하기를 원하시고 그렇게 당부하셨던(38절) 세제자에게로 돌아왔으나 그들은 하나같

    이 잠들어 있었다. 누가는 이 장면에 '슬픔을 인하여' 잠들어있었다는 말을 첨가함으

    로(눅 22:45) 그들의 수면을 좀더 동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의 질문은

    비록 베드로에게 향했지만 복수형으로 되어 있으므로 그들 세 제자 모두를 포함한다

    하겠다(16:15, 16).

    너희가 나와 함께...깨어 있을수 없더냐 - 제자들은 얼마전 주와 함께 죽겠다고 단

    호한 어조로 맹세하였었다.그러나 그들은 주와 함께 깨어 기도조차 하지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녕 그들은 육체와 감정이 모두 인내의 도(道)를 넘어서고 있는 터에 영적

    긴장마저 헤이해져 있었기 때문에 잠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

    서는 이처럼 조그마한 당부마저 너희들이 감내할 수 없느냐는 투의 연민에 찬 질문을

    그들에게 하신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홀로 외로이 서야 하며 홀로 결정해야 하셨다.

    한시 동안도 - 이는 문자적으로 정확히 한시간 동안을 뜻한다고 볼 수 없다. 오히

    려 그들 제자들이 충분히 감당해낼 수 있는 적절한 시간동안으로 보는 것이 좋다. 정

    녕 '깨어 있음로써' 오는 시점을 직시할 수 있고 '기독함로써' 그 시점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the Pulpit Commentary). 한편 '깨어있으라'는 명령은 이

    미 24:42절과 25:13에서 강조된 바 있다. 특히 오늘밤에 제자들이 배신할 것이라는 조

    금 앞서의 예고(31절)는 그들이 기도해야 한다는 시급한 요청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오직 기도만이 다가오는 '시험'에서 그들을 구해 줄 수 있다고 말

    하는 것이다. 늘 깨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갈대같이 약한

    우리의 뜻은 쉽게 꺽이고 말 것이다. 

    =====26:41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 이는 '깨어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 ,프뉴만)은 뒤이어 나오는 '육신'과 반대 개념

    으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나누어 주신 신의 형상, 곧 '영혼'과 사리를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을 의미한다(사 31:3 롬 7:25). 진정 '육신'적 유혹과 충동은 이 '마음'의

    선한 의지를 무참히 짓밟아 버릴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이 지닌 유약성(柔弱性)이다.

    여하튼 닥쳐올 것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어려움보다 훨씬 덜한 제자들의 어려움을 염려

    해 주셨던 것이다. 실로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육신의 본성을 지닌 인간은 당면한 시험

    을 이기지 못한다. 육신의 약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깨어서 기도하는'길 뿐 다른 대

    안은 없다. 

    =====26:42

    아버지의 원대로 - 두번째 기도는 첫번째 기도와(39절) 내용이 유사하지만 분명

    새로이 아뢰어진 것이다. 특히 이 기도는 첫번째 기도와는 달리 고난의 잔은 당신이

    필연적으로 감내해야만 하는 것임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다. 이제 더이상의 인성(人性)

    의 갈등은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즉, 철저한 자기 부정과 완전한 순종만이 있을 뿐이

    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는 주기도문(6:10)과 표현이 일치한다. 헬라어 원문에

    는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로 되어 있다. 어쨌든 이 기도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성자의 절대적인 복종을 나타낸 것이며(빌2:8), 예수 공동체의 모든 기도의 모범과 근

    거가 된다. 실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자신이 가르친 순종의 교훈을 가장

    잘 실천한 모범을 보이셨다. 처음으로 창조된 인간이 살던 동산에서 '당신의 뜻이 아

    닌 나의 주장함으로써 낙원이 광야로 변하였고,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겟세마네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 '나의 뜻이 아니라 당신히 뜻을 따르겠다'고 기도함으

    로써 광야같은 세상을 천국(天國)으로 바꾸셨고, 그 결과 고통의 갯세마네 행로는 영

    광으로의 문이 된 것이다. 

    =====26:43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 죽음을 눈앞에 둔 채 찢기고 상한 심령으로 간절

    히 기도하신 예수와 대조적으로 제자들은 졸음에 겨워 잠에 빠져 있었다. 여기서 '눈

    이 피곤함일러라'는 헬라어로 과거 완료 수동태로 그들의 눈꺼풀이 무거워져서 내려

    감겨졌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제자들의 영적 게으름을 반영하고 있는 문구이다. 한

    편 마가는 이때의 상황을 좀더 세밀하게 '저희가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막 14:40)를 표현함으로써 그들의 잠에 취한 상태가 얼마나 깊었으며 그들

    의 생각이 얼마나 안이해 있었던가를 넌지시 나타내 보이고 있다. 

    ======26:44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후 - '동일한 말씀'은 두번째 기도의 반복이었을

    것이다(42절). 이때 예수께서 기도하신 예수에 대해 복음서들 간에 조금씩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지만 마태븍음에서는 예수께서 세번 기도하신것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이 세번의 기도는 (1) 예수의 기도의 간절성과 (2)그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던 위기

    상황의 긴박감 및 (3) 예수의 아버지께 대한 순종의 절대성과 적극성등을 강조해 주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도', 그 자체의 중요성이 은연중 강조되고 있다. 

    =====26:45

    이제는 자고 쉬라 - 본문의 의미는 확실치 않다. 이 문구는 직설법으로 또는 명령

    법으로 번역될 수 있어서 그 해석도 다음과 같이 매우 다양하다. (1) 이 말씀을 문자

    적 의미로 받아들여 주께서 체포당하시기 전까지 잠을 자둠으로 다가올 시련에 대비하

    여 고단한 몸의 피로를 풀라는 권면으로 해석한다(A.L. William). 이례게 해석할 경우

    다음 절과의 관계가 자연스럽지 못하다. (2) '나로서는 너희들이 이제는 무한정 자고

    쉬어도 상관치 않겠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녀희들의 주의 깊은 관심을 필요로 하지 않

    는다'고 해석한다(Bruce). (3) '기도하라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졸고 있구나'라는 의미

    로 해석한다(Mcneil). (4) '이 후에 자고 쉬라', 즉 지금은 말고 나중에 다른 때에 쉬

    라는 것이다(Knox). 이중 어떠한 견해만을 취하기는 힘들지만 (2)의 견해가 가장 적절

    할 것 같다.즉 예수께서는 이 부분에서 부드러우면서도 비꼬는 투의 풍자적(諷刺的)인

    명령을 하고 계신 것이다. 즉 수난의 시간이 가까왔고 기도하거나 닥쳐올 시험에 대비

    하여 힘을 얻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다. 이제는 잠을 자도 무방한 것이다.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 예수의 갑작스런 이 선언은 완료 시상으로서 바로 그 시간

    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즉 예수께서 원수의 손에 잡히어 최악의 순간을 맞을 그 수난

    의 때가 이미 온 것이다. 예수께서는 적어도 등불을 들고 기드론 시내를 걸어 겟세마

    네로 통하는 길을 따라 당신을 잡으러 접근하는 무리들의 험악한 발자욱소리를 멀리서

    부터 듣고 계셨을 것이다.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 여기서 '죄인'은 배신과 고발의 첫 행위자인

    가룟 유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 '죄인'은 산헤드린 공회원, 백성의 지도자, 일

    반 백성, 그리고 로마 행정 당국자들 모두를 내포한다. 더욱이 이 '죄인'은 미래적 관

    점에서 예수의 십자가 형을 필요로 했던 거의 모든 인류를 가리킬 수도 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 예수께서는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회피하지 않으시고 의

    연(毅然)하게 맞으시려 하셨다(요 18:4). 그리고 그들 세 제자들에게도 그러한 의연함

    을 요구하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담대한 태도는 성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 순

    복의 한 단면이었다.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노니 - 6절에서는 '때가 가까왔다'고 말하셨었다. 여기서

    도 완료시상이 사용되어 유다에 의해 예수께서 죄인들의 손에 넘겨질 때가 이미 곁에

    온 것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주께서는 번민 중에 기도하기 시작하셨으나 이제는 당

    신의 '때'에 대한 분명하고도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침착하게 일어나셔서 자신을 팔

    자를 맞으러 나가신것이다. 

    ======26: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 예수께서는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회피하지 않으시고 의

    연(毅然)하게 맞으시려 하셨다(요 18:4). 그리고 그들 세 자들에게도 그러한 의연함

    을 요구하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담대한 태도는 성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 순

    복의 단 한면이었다.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 45절에서는 '때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었

    다. 여기서도 완료시상이 사용되어 유다에 의해 예수께서 죄인들의 손에 넘겨질 때가

    이미 곁에 온 것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주께서는 번민 중에 기도하기 시작하셨으나

    이제는 당신의 번민 중에 기도 하기 시작하셨으나 이제는 당신의 '때'에 대한 분명하

    고도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침착하게 일어나셔서 자신을 팔 자를 맞으러 나가신 것이

    다. 

    주님의 생애는 짧고 외로운 생애였습니다.날 때부터 헤롯에게 붸기어 다녔고 30세 때까지 가난한 목수의 집에서 생활하며 성장기를 보냈습니다.그리고 때가 되어 주님은 제자들을 모으고 그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며 인간을 돌보셨습니다.주님은 집도 머물 곳도 없이 여기 저기 다니면서 외롭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그들 곁에는 언제나 주님께서 함께 계셨습니다.이윽고 약3년의 공생애가 끝나고 마지막 사명인 십자가를 져야할 때가 오고 있었습니다.

    이제 본문 36절을 보십시다."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주님의 사역의 마지막은 죽음입니다.십자가에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는 것이 주님의 사명입니다.이제 그 죽음을 불과 몇칠 앞두고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듭니다.바로 앞에 있는 17-35절의 내용입니다.그 식사를 마치고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며 밤을 보내기 위하여 겟세마네라는 언덕으로 온 것입니다.

    여러분 죽음을 앞둔 사람의 심정을 생각해보신 일이 있습니까.

    사랑하던 가족과 자녀들과 친구들과 가꾸던 정원과 아끼던 모든 것들과 떠나야 합니다.눈부신 태양과 강들과 아름다운 꽃들을 다시 볼수 없습니다.다시는 돌아 올수 없습니다.인생의 추억들 마져도 다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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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녀들은 차가운 내 무덤에 한줌의 흙만 뿌리고 돌아설 것입니다.그러나 그 보다 더 두렵고 절망스럽게 하는 것은 그 죽음 후에 홀로 남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외로움입니다.다시는 만나지 못할것 같은 고독감,이런 생각들이 모든 사람이 가지는 죽음에 대한 공통적인 생각일 것입니다.

    주님도 역시 인간의 인격과 마음을 가지셨습니다.이밤이 지나면 주님은 홀로 죽음의 길로 가야합니다.사랑하던 제자들과 말씀을 듣기 위해 따르던 군중들,이제는 그들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주님은 자주 제자들을 보내고 홀로 산에서 들에서 기도하셨습니다.그러나 이 날밤은 홀로 기도하시기를 원치않으셨습니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제자와 함께 밤을 지새고 싶으셨습니다.죽음을 앞둔 인간적인 고독과 외로움 때문이셨습니다.마지막 밤을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있고 싶었던 것이 주님의 마음이셨습니다.그래서 주님은 8제자와 함께한 가운데 가장 사랑하는 제자인 3제자를 데리고 기도하러 가셨습니다.37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죽는 그 시간이 찾아 온다면 그 순간에 누구를 여러분 곁에 두고 함께 있고 싶습니까.누가 여러분의 손을 잡아주기 원합니까.아마 나를 가장 잘 이해해 주던 사람,마음속으로 사랑하던 사람일 것입니다.어쩌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듣는 한 마디의 따뜻한 위로와 받고 싶어서 일지도 모릅니다.

    베드로, 야고보,요한,그들은 아마도 맨 처음 만났던 정때문일까요.그러나 사실 성경을 보면 그 어느 누구도 주님의 마음과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같은 부분인 요한복음 16:5절에는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하였도다."라고 하셨습니다.이어 겟세마네동산으로 가시기 전에 16절에서 주님은 또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며 말씀하십니다."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보리라".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17-18절에보니 이렇습니다."우리에게 말씀하신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아버지께로 간다는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하며 제자들은 의아해 하며 서로 수근 거렸던 것입니다.

    왜 입니까.제자들의 관심은 전혀 다른데 있었기 때문입니다.그들은 주님을 통하여 세상의 영광을 얻으려하기 때문이었습니다.로마의 정부를 부수고 새 나라를 만들어 출세

    해 보겠다는 것입니다.얼마전에 예루살렘성에 입성할때 자기들을 환영한 백성들의 지지열기와 환호소리가 아직도 귀에 가시지 않은 것입니다.그래서 심지어 높은 자리를 누가 맡을 것인가를 두고 서로 말다툼을 하며 싸우기까지 하였습니다.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주님께서 가장 필요로하는 이 밤에 잠을 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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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절을 보십시다.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가복음 14:33에는 "심히 놀라며 슬퍼하사"라고 기록합니다.이 부분 의 헬라어 뜻은 "죽음에 처할 정도의 극한 슬픔""극심한 불안과 근심"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인간으로서 격을수 있는 극한의 슬픔을 말합니다.

    주님의 슬픔은 영적인 이유에서 오는 슬픔입니다.십자가에서 인류의 모든 죄를 홀로 지셔야하는 현실,가장 저주받은 모습으로서 매달려야하는 비애감,실제로 십자가에서 주님은 이렇게 절규하셨습니다."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십자가를 지는 순간이야말로 아버지인 하나님으로 부터 철저히 외면 당하는 것입니다.그 순간은 인간의 죄를 대신 심판하는 심판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주님께서 혹 어떤 죄가 있어서 징계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오로지 인간의 죄를 대신하시는 것 뿐입니다.그 순간 세상사람에게 버림받는 것보다 하나님께로 부터 버림받는다는 것이 고독한 것입니다. 아무도 대신할수 없고 주님 홀로 가야하는 사명의 길이기에 외롭고 슬픈 길인 것입니다.

    주님의 슬픔은 인간적인 이유에서 오는 슬픔입니다.함께 고생하며 쫓겨다니며 동역했던 많은 친구들과의 이별,이제 육체로는 다시 만날수 없는 사랑을 베풀었던 많은 사람들,무엇보다 아직도 아무 영문도 모르고 있는 있는 제자들을 두고 떠난다는 사실이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더구나 조금전 만찬상에서 떡 조각을 주며 회개의 기회를 주었지만 배신의 눈빛을 감추고 나갔던 제자 유다에 대한 인간적인 서운함,이제 이밤이 지나면 조롱과 멸시와 야유를 퍼부어 댈 수많은 군중들,주님의 마음은 온통 연민과 배신의 아픔과 이별의 슬픔으로 메꾸어져 있었습니다.

    또한 주님의 슬픔은 육체의 고통에서 오는 슬픔입니다.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주님은 당시 행해지던 십자가의 사형법과 무서운 고통을 알고있었습니다.십자가를 지기 전에 온 몸에 매를 맞아야 합니다.거기서 거의 많은 피를 흘립니다.그리고 그 몸으로 십자가를 자신 스스로 지고 올라가야 합니다.올라가면서 또 째찍을 맞아야 합니다.십자가에 달려서는 온 몸의 물과 피를 다 쏟아야 합니다.몸에는 창과 못자욱으로 상처가 납니다.뜨거운 태양 아래서 목마름과 싸워야 합니다.그렇다고 금방 죽는 것이 아닙니다.조금씩 조금씩 고통을 맡보며 죽는 것입니다.벌거 벗은채 온갖 모욕을 참아야합니다.어느 누가 육체의 고통을 원한단 말입니까.주님은 이 육체의 고통을 홀로 당해야 합니다.조금도 감함이 없는 완전한 고통인 것입니다.

    신이라면 고민하지 않습니다.신은 완벽한 판단과 한치의 오차도 없습니다.신은 눈물이 없습니다.아픔도 느끼지 않습니다.신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초대교회시대에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있었습니다."하나님이 어떻게 죄악과 더러운 욕망으로 가득찬 인간의 몸을 입을수 있단 말인가.하나님이 어떻게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고 고민을 하는가" 라며 주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였습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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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우리와 같은 인격과 육체를 가지셨습니다.병든 나사로의 무덤가에서 주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과 같은 마음을 가지시고 같은 동정을 가지시고 같은 느낌을 가지신 것입니다.

    주님은 육체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을 느끼셨습니다.오늘밤 주님의 고민과 슬픔은 인간으로서 갖는 극한 고통과 슬픔인 것입니다.

    38절 하반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부탁합니다."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무슨 의미입니까.너희가 비록 내가 가는 이 고난의 길을 갈 수는 없다 할지라도 고통스런 내 마음을 위하여 함께 기도를 해 달라는 것입니다.너희들 만이라도 나 홀로 기도하는 이 밤에 함께 깨어 기도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이 부탁 후에 주님은 조금 나아가서 기도하셨습니다.누가복음에 의하면 돌 던질만한 거리입니다.분명히 함께 머물러 기도하기 원하셨지만 주님은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그들과 함께 있고 싶으나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길을 가야하는 이 중대한 일을 위해서는 인간적인 연민과 연약함을 물리쳐야 했습니다.아무도 대신할수 없는 일이기에 주님은 홀로 이일을 위하여 기도해야 했습니다.제자들에게 위로 받기를 거부하고 사명을 위하여 홀로 나가신 것입니다.주님께서 가야할 길과 그들이 가는 길은 달랐습니다.주님이 가시는 길은 아무도 대신할수 없는 길입니다.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만이 하나님과 인간의 막힌 죄의 담을 무너뜨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골1:14에는 "그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생명을 건 기도였습니다.39절을 보십시다.얼굴을 땅에 대시고 기도하셨습니다.누가복음에는 무릅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땀이 핏방울 같이 될 정도 였습니다."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이것이 거듭된 주님의 기도였습니다.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무엇입니까.할수만 있다면 이 고통의 길을 가지 않는 것입니다.그러나 꼭 그 길 만이라면 그 길을 아버지의 뜻대로 가겠다는 기도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을 울리는 간절하고 슬픔에 찬 주님의 기도가 어둡고 긴 밤을 밝혔습니다.그것은 오로지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택하는 길입니다.진정 인간을 사랑하는 길은 인간과 잠시동안 더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영원히 하나님과 화목할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비록 잠시의 고난이 있다할지라고 주님 스스로가 한알의 밀알이되어 희생하고 썩어짐으로 많은 사람이 생명을 얻는 다면 주님은 그 길을 선택하시겠다는 것입니다.죄인이 마셔야할 심판의 쓴잔을 주님이 마심으로,형벌의 쓴잔을 주님이 마심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과 은헤의 단잔이 주어질수만 있다면 주님은

    그 잔을 마시겠다는 기도입니다.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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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은 우리의 참 친구가 되시기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말로만 친구가 아닌 진실한 친구의 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립니다.세상의 어떤 종교도 자기들이 믿는 신앙의 대상을 이렇게 약하게 만들지 않습니다.다른 어떤 신보다도 위대하게 만듭니다.인간과 같은 신은 없습니다.이웃 부족에서 만들어 놓고 절하는 바위보다 더 큰 바위를 찾아 절하며 섬기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입니다.인간이 만든 신은 모두 위대합니다.오늘의 말씀을 이런 의미로서 이렇게 해야 비로서 조금 신의 모습다워질수가 있을 것입니다."예수는 죽음을 겁내지 않았다.여유있고 당당하게 자신있게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나아갔다.그들은 예수의 담대함을 보고 놀랐다. 그의 자세와 표정은 하나도 흐트러짐이 없었고 완벽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은 인간에게 매를맞습니다.눈물을 흘립니다.제자들의 위로를 필요로 합니다.약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죽음을 앞두고 고민합니다.이 잔을 할 수만 있으면 옮겨달라고 기도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예수그리스도는 철저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대속의 원리는 무엇입니까.만일 미성년인 아들이 죄를 지어 감옥에 가야하는데 그 아들이 가지고 놀던 강아지를 보낼수 있습니까.로보트를 보낼수 있습니까.다른 어떤 것도 안됩니다.그 아들과 같은 인격으로 감옥 속에서 구속의 고통을 느 낄 수 있는 사람인 아버지나 어머니만이 대신 형벌을 받을수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면 그 사람과 똑같이 고통을 느끼는 사람만이 대신 죄를 할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절저히 인간이셔야 했습니다.우리와 완전히 같은 사람이셔야만 합니다.우리가 당해야할 고통과 아픔과 눈물과 육체의 저주를 우리와 똑같은 몸으로 주님은 대신하셨습니다.그러기에 오늘 주님의 마음은 어떤 위선이 아닙니다.어떤 목적을 가진 제스츄어가 아닙니다. 비우리들이 느끼는 마음 그대로입니다.

    비록 십자가로 가는 길이 제자들이 함께 갈수 없는 길이지만 그들과 마지막 밤의 슬픔을 함께 나누고 싶었던 주님의 마음,머리를 땅에 대며 죽음의 용기를 구했던 주님의 마음,몸을 가진 인간으로서 끈질기게 붙드는 삶의 미련과 생의 애착을 단절해야하는 몸부림,하지만 인간을 사랑하셔서 우리의 형벌을 대신 받기위하여 고난의 쓴잔을 선택하는 사랑의 마음,밤이 맞도록 육체의 안락을 요구하는 본능과의 투쟁끝에 인간을 위하여 스스로를 고통 가운데 내던지기로 결단하는 희생의마음,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동시에 인간이었기에 고통스런 선택의 길목에서 긴 밤을 세웠던 것입니다.

    누구 때문 입니까.바로 죄로 병들어 영원한 멸망에 처한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여러분은 이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십니까.동정어린 눈으로 제자들을 바라보며 이 밤에 나와 함께 깨어있자고 부탁하시던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십니까.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식어질때 그리스도인은 그때 부터 추하게 됩니다.아름다움의 빛이 사라지는 것입니다.오늘 이시간 주님께서 우리들 마음 가운데 다시한번 인격적으로 만나주실 것입니다.꺼져가는 사랑의 심지를 돋우워 주실것입니다. 


    겟세마네의 길

    마태복음 26 장26 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겟세마네의 길이 곧 자기 부인의 길이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이요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입니다. 겟세마네라는 이름을 '기름을 짠다'

    히브리이고 여기서 온몸에서 기름을 짜내듯 몸부림치며 기도한 동산입니다. 예수님

    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인간적으로 가장 괴로웠던 수난의 시간을 이 동산에서

    맞이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날밤 동산으로 가시면서 고민하고 슬퍼하시면서 말씀

    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

    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님은 조금 밀어진 곳에 나아가 얼굴을 바위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첫째,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겟네마네동산에서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기도하

    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예수님께서 힘쓰고 애

    써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어라"(눅22:14)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의 승리가 있었습니다. 기도는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자기를

    이기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싸움입니다. 자기의 의, 자기 교만, 이기심, 자

    중심의 모든 것을 죽여야 하고 완전히 못박는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뜻앞에 자기를

    완전히 바치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이러한 승리가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입니다. 

    둘째,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을 시험하는 마지막 훈련입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함께

    있기를 부탁합니다. 성숙한 신앙은 내가 예수님에게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서 제자를 택하실 때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3:14)-15) 제자들은 함께 하지 못하

    고 첫번 시험에 넘어졌습니다. 믿음이란 단순한 소원이나 의지나 지식이 결코 아닙

    니다. 믿음은 생명이며 사랑입니다. 믿음은 전 생명을 그리스도께 바치는 것이며 그

    리스도와 연합하여 같이하는 것입니다. 제자의 길이란 예수님 계신 곳에 함께 그곳

    에 나도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곧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

    며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함께 있어야 합니다. 

    셋째,하나님께 이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결단입니다.

    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이요 이 계명을 실천하기 위하여 함께 가자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

    했기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십자가 앞으로 가까이 나아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

    어나라 함께 가자 하시는 것은 그 사람의 실천에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 뜻에 순종하고 충성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신앙

    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 뜻이라면 자신이 죽음으로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진정한 순교는 목숨이 끊어지기 이전부터 하나님께 목숨을 바친 것입

    니다. 그러므로 매일매일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죽이며 이 몸을 재물로 바

    쳐야 합니다.

    ?

    니다. 그러므로 매일매일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죽이며 이 몸을 재물로 바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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