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의 침묵(마27:11-14)
  • 2013.06.03 21:11:54
  • 모든 일에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있습니다. '때'란 '시간'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때에 대하여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말씀은, 전도서입니다. 전도서 3장에 보면,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전3:1-4)라고, 계속적으로 '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1절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라고 하는 '때'에, 천지를 아름답게 창조하셨고, '오늘'이란 시간에,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만들어 주시고 존재케 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간도, '하나님이 정하신 때'의 한 부분입니다. 

    또 전16:9절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말씀했듯이, 결국은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우리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때'라는 시간을 잘 선용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같은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0년전 오늘은, 우리 민족 역사상 잊을 수 없는 때입니다. '6월 25일'이라는 틀에 박힌 날짜 개념보다는, '6.25'라는 말에 더 익숙해진 '동족상잔의 비극'이 있던 때가 바로 50년전 오늘입니다.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가듯이, 그 날의 비극은 벌써 반세기가 흘러갔습니다. 그동안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사랑하셔서,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습니다. 이제 50년이 지난 오늘,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이산가족 상봉문제가 거론되고, 통일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과 의지가 표출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50년'을 가리키면 매우 뜻깊은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 50년마다 '희년'이란 절기를 지키고 있는데, '희년'이란 자유가 선포되는 아주 경사스러운 날입니다. 노예로 있던 사람들은 자유로운 몸이 되어 풀려나고, 가난 때문에 졌던 빚은 희년이 되면 모두 탕감받고, 경작하던 땅도 쉬게 되는 해가 바로 50년마다 찾아오는 희년입니다. 

    이와같은 시각에서, 오늘 우리 민족의 역사를 조명해 본다면, 하나님의 개입하심의 손길이 있음을 다시한번 분명히 느낄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나의 작은 본분이라도 중히 여기며,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야 하고,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늘 끊임없이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속에서 선한 본을 보이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신문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당신이 유대인의 왕인가?" 그러자 예수께서는 "당신이 한 말대로요"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슨 죄를 범했는지 도무지 찾을래야 찾을길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었습니다. 도리어 약한 병자들을 고쳐 주었고, 심지어 죽은 자까지 살려 주었으며, 여러 가지 기적을 나타내신 분을 죄인 취급해서 빌라도 법정에 끌고 온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고발하며 떠들어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저 사람들이 저렇게 여러 가지로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고 있는데, 들리지 않소?" 

    빌라도의 이 말속에는 "당신이 저들의 말을 반박하고 변명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권한으로 당신을 풀어줄수도 있소"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대답도 않으시고, 침묵하셨습니다. 빌라도는 도무지 예수님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들의 말은 거짓이다. 나는 죄가 없다" 이렇게 말 한마디만 해도 풀려날 수 있을 텐데, 왜 저토록 침묵만 하는 것인지, 빌라도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하나님은 영원히 침묵하신다. 그러나 역사는 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침묵 속에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까닭은 바로 나 자신, 나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그 원인이, 내게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마디라도 좋으니 말씀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응답해 주십시오. 주님의 음성을 들려 주십시오"하고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진실로 하나님의 침묵속에서도 하나님의 응답을 들을 줄 아는 자입니다. 

    오늘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죽음의 갈림길에서 침묵하셨는지, 그 침묵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말씀의 제목은 "그리스도의 침묵"입니다. 

    1. 사랑의 침묵-- 죄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침묵하셨습니다. 

    철수라는 어린 아들이 젓가락을 가지고 놀다가, 그만 뭣도 모르고 전기 콘센트에 젓가락을 끼우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위험한 짓입니다. 그 순간, 언뜻 철수를 바라보던 철수 엄마가 기겁을 하며 "철수야!"하고 불렀습니다. 깜짝 놀란 철수는 뒤돌아서 호통을 치는 엄마를 보고 마구 울었습니다. "이 놈의 자식, 젓가락을 가지고 놀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여기가 어디라고 젓가락을 집어 넣" 버럭 화를 내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철수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방에서 신문을 보던 철수 아빠가 나와, 그 진상을 알고는 철수를 조용히 방안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철수야, 아빠 쳐다봐!" 철수는 울먹이며 아빠를 쳐다 보았습니다. "또 다시 혼이 나겠구나"하는 순간, 아빠는 철수를 꼭 안아주었습니다. 아무말도 없이 말입니다. 호통을 치줄 알았던 아빠가 철수를 꼭 안아 주자, 철수는 감격해서 더욱 크게 울었습니다. 

    아빠는 철수에게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철수는 아빠의 마음을 느꼈습니다. 아빠가 얼마나 철수를 사랑하는지, 또 젓가락을 가지고 노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범하며 살아갈 때, 엄하게 호통만 치시는 분이 아니라, 때로는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침묵하시며, 우리곁에 다가오셔서 우리를 꼬옥 안아 주십니다. 

    비록 죄 중에 살더라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순간 순간 들려오는 하나님의 침묵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님이 침묵하신 이유는, 죄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침묵을 깨트리시고 "나는 죄가 없다. 도리어 나를 고소하는 저들이, 외식하는 자들이다"라고 반문하며, 자기 변호에 급급하였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의 형벌을 모면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죄인들을 구원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죽기까지 침묵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요10:18에 보면 예수님은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라고 하시면서,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양같이 어리석고 무능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침묵입니다. 

    요12:24에서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지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무 말없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얼마든지 안 질 수 있는 것을, 내가 자원하고 선택해서 기꺼이 지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능히 피할 수 있고 변명할 수도 있지만, 피하지 않고 변명하지 않고, 그져 묵묵히 지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내게 주어진 십자가, 묵묵히 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 속에서 침묵하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죽기까지 침묵하신 그리스도의 침묵뒤에는, 부활의 열매가 맺혔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셨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침묵뒤에 따라오는 부활의 영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그 가사 첫머리에 보면, "빛이 없어도, 환하게 다가오시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음성이 없어도, 똑똑히 들려 주시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라고 적혀 있습니다. 

    빛이 없어도, 비록 우리가 어두운 고난의 터널을 통과할 때도, 예수님은 우리 곁에 환하게 다가오셔서,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주님의 직접적인 음성이 들리지는 않지만, 우리의 심령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들을 수 있는 심령의 귀가 열려져 있습니다. 

    소리의 속도는 1초에 340m를 갑니다. 그 소리의 파장으로 전달되는 주님의 음성이 비록 우리 귀가에는 들리지 않지만, 매 순간 순간마다 침묵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1초에 30만km나 가는 빛의 속도보다도 더 빠르게, 우리의 심령속을 파고듭니다. 

    그리스도의 침묵을, 가슴깊이 느껴 보십시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에 품어보십시오. 그리하면, 우리도 침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 법정에서 끝까지 침묵하신 그 이유는, 죄인까지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침묵은 사랑의 침묵입니다. 

    '누구 때문이라'고 변명할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에 품고 있다면, 그리고 이웃과 형제를 퀤실로 사랑한다면, 우리도 그리스도의 침묵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좀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침묵할수 있게 됩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침묵을, 생활속에서 묵묵히 실천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화평의 침묵-- 그리스도의 침묵은 화평을 위한 침묵이었습니다. 

    다툼이 일어나는 가장 커다란 원인은, 서로 잘잘못을 따지는데 있습니다. 서로간에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면, 반드시 다툼이 일어납니다. 우리 속담에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한 사람이 떠들어 대도, 다른 사람이 침묵하고 있으면, 싸움이 될 수 없습니다. 서로 부닥칠 때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시장 골목에서 개싸움하는 투견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힘이 센 개가 덮썩 상대방의 개 목덜미를 물고 있으면, 다른 개는 처음에는 발부둥을 치다가 끝내는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가만히 있게 됩니다. 그러면 싸움은 끝이 납니다. 서로간의 힘 겨루기를 할 때,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한쪽 편에서 일방적으로 몰아 부치거나, 또는 한쪽 편에서 전혀 싸울 의지가 없다면, 싸움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 예화가 그리스도의 침묵과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곳에서 다툼이 일어난다는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 받아들일수 있는 예화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아무리 물어 보아도, 예수님은 한 마디의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마26:53에서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라고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은 마음만 먹으면 하늘의 천군천사도 부를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악한 무리들을 일순간에 없앨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화평을 위해서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내가 너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권세를 갖고 있는데, 왜 너는 한 마디도 변명하지 않느냐?"라고 말하면서, 살려주려고 애를 씁니다. 어쩌면 빌라도의 이 말은, "너는 아무런 죄가 없는데 왜 말 없이 죽으려 하느냐, 왜 침묵하느냐"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전해 들은 예수라는 청년은, 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심지어는 죽은 자까지 살리고,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좇아다니며 그의 진리의 말씀을 들었다고 하는데, 왜 그러한 예수가 이 죽음의 자리에서는 한 마디 변명도 하지 않는지, 도무지 빌라도는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깊은 뜻이 숨겨 있습니다. 그것은 화평을 위한 침묵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 막혀진 죄의 담벽을 허물기 위하여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말보다도 강한 것은, 침묵입니다. 천마디의 말보다도, 단 한 번의 침묵이 중요합니다. 침묵보다 더 강한 웅변은 없습니다. 

    강직하기로 소문이 났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화중에,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국무위원들의 기강이 헤이해지고 정책이 혼란해 빠지자, 대통령이 국무 위원들을 질책하기 위해 긴급 소집을 명했습니다. 각 부서 장관들이 신속히 회의 석상에 모여들었습니다. 장관들은 대통령의 따끔한 질책을 기대하면서, 초 긴장속에서 회의실에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대통령이 들어와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말이 없었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오랜 시간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한참후에 대통령은 한 마디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알아서들 하시오!" 얼마나 준엄하고 단호한 말입니까? "알아서들 하라"는 것입니다. 

    침묵속에 한 마디는, 수 천마디의 말보다도 강한 위력이 있습니다. 

    말하기는 쉬어도 침묵으로 참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지난 번에, DCD 두레 공동체 훈련에 참가했을 때, [침묵의 시간]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다음날 아침 침묵의 시간을 해지하는 선언이 나올 때까지, 어느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는 프로그램입니다. 

    여러 사람들을 접하면서 서로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하고 힘든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이 침묵의 시간을 통해서 모든 참가자들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삶을 조용히 돌이켜 보는 시간이 되었고,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좀 더 새롭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침묵은 백마디의 말로도 얻을 수 없는 소중한 것을 얻게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곳, 세상에서 가장 침묵하고 있는 곳이 어디인줄 아십니까?" 그곳은 바로, 공동묘지입니다. 죽은 자들은 영원히 침묵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면서, 산 자로서 죽은 자처럼 침묵하며 사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가시는 길이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어야 할 길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의 밀알처럼 죽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리하여 화평의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막혔던 죄의 담벽을 허무시고, 화평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시고 죽기까지 침묵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침묵으로 일관하신 주님께 감사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서, 우리도 이웃들과 또 직장동료들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 침묵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서로 자신의 주장이 옳아도 좀 양보하고 언성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라는 공동체속에 화평을 이룰수 있습니다. 

    이웃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침묵'을 본받는, 성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3. 믿음의 침묵-- 그리스도의 침묵은 내일에 대한 확신과 믿음에 대한 침묵입니다. 

    예수님은, 반대자들의 모함과 술수앞에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침묵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믿음과 소망때문이었습니다. 요18:36에 보면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항상 예수님의 마음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찼습니다. 그래서 비난도 무릎쓰고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이 세상 나라나 현실 자체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현상보다도 깊은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섭리에,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침묵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침묵은 또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적 고통과 수치를 주는 빌라도를 본 것이 아니라, 빌라도 위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 본 것입니다. 그러기에 빌라도가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빌라도 위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침묵하신 것입니다. 

    믿음을 소유한 자는, 묵묵히 순종합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우는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야할지 갈 바를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져 하나님 말씀이기에 순종하여,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왜 떠냐야만 하는지? 나를 어디로 인도하실지" 묻지도 않고, 그져 순종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도, 아무 말도 없이 그져 순종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바치라니요. 이게 말이나 될 소리입니까"라고 대꾸하거나 또는 반항하지도 않고, 그져 묵묵히 순종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확신에 찬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묵묵히 순종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와같은 '믿음의 순종'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굴욕과 치욕을 받으면서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하신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고 했습니다. 믿는 자는 최후의 승리자가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고 위탁하시고 침묵으로 일관하셨듯이, 우리들의 삶도 그져 묵묵히 주님께 내 앞길을 맡기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는 자녀들을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일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묵묵히 순종하는 믿음의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현대는 참으로 말이 많은 세대입니다. 물론 자신을 나타내는 PR시대요 광고시대이기 때문이라고도 하겠지만, 아무튼 다변(多辯)이 능변(能辯)으로 인정받고 있는 세대입니다. 그러므로 말 없는 사람은 무능력한 사람이요 죄인이요 또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대를 거스려 '그리스도의 침묵'을 본받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침묵은 죄인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침묵하신 '사랑의 침묵'입니다. 그리스도의 침묵은,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막혀 있던 죄의 담을 허무신 '화평의 침묵'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침묵은, 하나님께 대한 확신과 믿음의 침묵입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십자가를 바라보시면서 침묵하신 그리스도의 침묵을 오늘 우리가 바라보면서, 우리도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과의 화평을 도모하며, 또한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더욱 확신에 찬 삶을 살기 위해서, 묵묵히 응답하는 자세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실 때, 때때로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뜻과 섭리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침묵의 의미를 깨달아, 주님께 감사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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