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기 너 있었는가?(마27:15-26)
  • 2013.06.03 21:14:48
  •  오늘은 새천년의 첫번째 고난주간입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고난이란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전생의 업보, 혹은 자신이 평소에 행한 일의 대가로서 고난을 겪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고난이 오면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생각하며,
    전혀 알 수 없는 고난이 오게 되면, '내가 전생에 무슨 잘못이 있었는가'라고 한탄을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고난주간에 묵상하게 되는 고난이란 것은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죄값을 치르신 분에 대한 고난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대신 죄값을 치르신 분에 의하여, 우리의 심판과 고통이 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의 죄값을 대신 지고 치르신 고난이 있고,
    바로 그 고난에 의하여, 새로운 희망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
    고난주간에 선포되는 중요한 기독교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나를 대신하여 고난받으시고 죽으신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실제론 내가 당하여 했을 고난을 생각할 뿐 아니라,
    나의 어떤 죄가 주님을 죽음으로 몰고 갔는지도  묵상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직접적으로 관여했었던 사람들을 살펴 볼려고 합니다.
    그리고, 저들의 모습속에서
    우리의 모습 역시 숨겨져 있음을 찾아 볼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가장 크게 관여하고 책임을 져야 할 무리가 있다면,
    그들은 바로 대제사장과 서기관 무리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초창기 사역때부터,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사람을 파송하여, 그 죽일 죄를 엿보았던 이들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기회를 잡아 예수님을 십자가 사형대로 보내었습니다.

    가장 경건하고 거룩해야 할 사람들이 이들입니다.
    누구보다 더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길 좋아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구보다 더 자비로운 마음의 소유자였었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람을 죽이는 일에 음모를 꾸몄습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하여, 군중들을 선동하기까지 했습니다.
    마치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였던 것입니다.

    왜 이렇게 이들이 잔인한 사람이 되고 만 것일까요?

    성경은 이들에 대하여 한마디 말로써 대답하고 있는데,
    그들의 심리상태를 바로 빌라도에 의해서 진술되고 있습니다.

    18절 말씀입니다.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그렇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은
    시기심에 의하여 눈이 먼 상태였습니다.
    질투심의 화신이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질투에 눈이 먼 이들에게 보이는 것이란 오직 예수님을 죽여 없에야 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백성들의 환호성과 찬사,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권세있는 가르치심과 능력
    이 모든 것들이 저들에게는 질투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나도 모르게 질투심의 종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질투의 종이 되면
    눈앞에 보이는 것이란 
    오직 어떻게 하면 질투의 대상을 없에 버릴까하는 것뿐입니다.

    최초의 살인은 가인의 질투심 때문에 생긴 것이었습니다.
    최초의 왕인 사울왕을 파멸로 몰아 넣은 것 가운데 하나가 다윗을 향한 질투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사람들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질투심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반대말 중의 하나가 질투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질투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곳에는 질투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그 숱한 어둠의 열매들이 있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도 우리들이 그 대상이 누구든 질투심에 의하여 몸부림 칠 때,
    우리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밖은 대제사장, 서기관들과 한 통속이 되어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질투심으로 주의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사랑으로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질투와 시기심 - 바로 이것들이우리로 하여금 
    또 다시 주님을 십자가로 내 몰게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사랑으로 질투와 시기심을 이길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현장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두 번째 인물은 바로 총독 빌라도입니다.
     예수님에게 사형언도를 내린 법정에 있어서 실제적으로 사형언도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빌라도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이 법정에 있어서 최고책임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무죄라는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그의 아내로부터 '예수님에 관하여 아무 상관을 하지 말라'는 언질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예수님을 풀어주기 위하여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의 일로 인하여 민란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속에서,
    이 사건에 대하여 손을 씻고, 예수님을 무리들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사도 신앙고백에 의하면, 
    예수님에 대하여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로서는 얼마나 억울한 일이지 모릅니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빌라도에 대하여, 그는 억울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실제적인 최고책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이 죽고 사는 것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있는 최고책임자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유대의 총독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른 재판이 그의 책임이었고,
    그가 무책임하게 자신의 책무를 다른 이에게 넘겼을 때,
    한 의로운 자의 생명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정의와 진실과 공의를 책임져야 할 위치에 서 있었던 사람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였다는 것은 결코 작은 죄가 아닙니다.
    책임져야 할 자리에 무책임하게 일하는 사람
    그가 바로 빌라도이며,

    우리들은 오늘도 도처에서 무책임한 지도자들인 또 다른 빌라도를 보게 됩니다.

    자국의 국민들이 강도와 납치를 당하고, 사고를 당하였는데도,
    관할타령이나 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었던 영사관 대사관 직원들이 있었다고 신문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오늘날의 빌라도이며, 그 빌라도에 의하여 무죄한 생명이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책임질 일은 아에 하지 않으려고하는 공무원들도 간혹 보게 됩니다.
    오늘의 빌라도입니다.

    이런 무책임한 빌라도가 우리 사회의 공무원이 되고, 지도자가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될 때,
    수없이 많은 생명들이 억울한 고난을 당하게 되고, 피해를 보게 된다는 것이 십자가의 사건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역시 빌라도법정에서처럼
    무책임적 존재로서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책임
    나라가 우리에게 주신 책임
    시민으로의 책임,
    교인으로서 책임이 있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혹은 주부로서의 책임도 있습니다.

    이런 각각의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누군가가 억울한 고난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황페하여 병들어 가는 조국산하를 보면서도, 아무 생각없이 과소비를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이 아름다운 세상을 보존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며,
    오늘도 조국의 안보를 위하여 총을 잡고 밤을 지새우는 군인들이 있기에,
    우리들이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아들만큼은 군에 보내지 않겠다고 모든 연줄을 다 동원할 때'

    우리들은 주님을 죽게 만든 빌라도의 법정에
    빌라도로서 서 있는 것입니다.

    3. 주님의 십자가 현장에서 발견하게 되는 세 번째 무리는 바로 군중들입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놀라움이 바로 이 군중들에게 있습니다.
    그들은 얼마전까지만해도, 이제 메시야가 임하였다고 소리 소리를 지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모두 이들이지는 않을 것입니다만,
    그때 호산나를 부르던 이들은 다 어디를 갔으며,
    그러면, 그 때 지금 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성경은 대제사장들이 이들을 선동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이들은 선동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아무런 생각도 없이 흥분하여 예수님을 죽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들이 아무런 생각없이 그저 흥분된 마음으로 외쳤다는 것을 우리들은 성경을 통해서 아주 쉽게 알수 있습니다.
    23절 말씀입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 질ㄹ j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예수님께서 어떤 악한 일을 하였느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대하여
    이들은 한마디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근거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그저,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겠다는 말만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들은 선동자에 의하여 감정적인 선동만 당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엔 아무런 이론도 근거도 증명도 필요없었습니다.
    그저 자신들의 감정을 달래줄 희생양만 필요했던 것입니다.

    요즘 우리들은 여론의 힘을 새삼 심각하게 거론하고 있습니다.
    조작된 여론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는 지성적이고 이성적인 존재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순한 사람들에 의하여 얼마든지 놀아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번 총선결과를 아침신문에서 보면서,
    '경상도에 사는 부끄러움 때문에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다른지역에선 영향력을 미쳤던 총선연대의 '낙천,낙선대상자'들이 경상도지역에선 거이 그 영향력을 발휘 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한분 한분의 표는 귀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분들의 표에 대하여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고,
    또 그렇게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총선결과분석한 신문을 보니,
    지역색을 이번에도 극복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지역색이란 감정앞에선
    어떠한 논리나 증거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저 싫다는데 무슨 말을 하느냐는 감정만 살아 있을 뿐입니다.

    비평적이고 논리적인 생각을 없이
    그저 남들이 외치는 소리만 듣고,
    감정적으로 반응할 때,
    십자가란 억울한 죽음을 낳았다는 생각을 우리들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흥분하여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할 때,
    우리는 또 다른군중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4. 네 번째로 십자가 사건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은 바로 바라바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뜻밖의 축복을 받은 사나이입니다.
    살 소망이라곤 전혀 없었던 인물이 바라바입니다.
    죽을 날만 기다리며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갑자가 석방이란 말이 떨어졌습니다.
    그는 왜 이런 행운이 자신에게 찾아온 것인지 어리둥절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대신하여 죽은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게되었을 것입니다.
    그 예수란 분은  전혀 죄가 없는 분으로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바라바가 나중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게 되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십자가 밑에서 우리들이 발견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뜻밖에 죽음에서 구원받은 축복을 받게 된 바라바
    그가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들이란 사실입니다.
    죽음과 심판과 지옥을 향한 운명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인하여,
    내가 살아나게 되었다는 
    이 놀라운 복음의 소식을 듣게 되었고,
    또 영생을 얻게 된 것이 아닙니까?

    십자가의 현장에서 발견하게 되는 최고의 축복은
    바로 뜻밖에 구원을 받은 우리 자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를 깊이 묵상할 때 우리들은 깊은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금번 고난주간에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주의 은혜를  충만히 받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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