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냐, 바라바냐?(마27:15∼26)
  • 2013.06.03 21:15:45
  • 오늘 드릴 말씀의 제목이 "예수냐 바라바냐?"인데, 이 바라바라는 사람은 오늘 등장하는 인물로서 많은 상징성과 깊은 인상을 남겨주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바로 그날에, 죽을 사형수였는데, 예수님 때문에 사형을 면제받아 살아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금주 고난주간에 체포되어 서기관과 장로들, 그리고 그들의 사주를 받은 군중들에게 끌러서 빌라도의 법정에 서게됩니다. 빌라도는 당시 로마의 총독으로서 팔레스틴-즉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법에는 일반재판은 유대인들이 자체적으로 할 수 있었으나, 사형선고만은 총독의 권한에 두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왔던 것입니다. 주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와서는 예수를 사형에 처하라고 데모를 벌인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를 심문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아무런 죄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지도자들은 군중들을 충동질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칩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다시, 예수님을 심문해보았지만,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기는커녕, 무슨 죄를 하나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군중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고 있으니 빌라도의 처지가 난감할 때 이었습니다. 

    이때 재판정으로 한 사람이 급히 달려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은 빌라도의 귀에다 대고 무엇인가를 속삭입니다. 이 사람은 빌라도 총독의 아내가 보낸 사람이었는데, 그 속삭인 내용은 그의 아내가 꿈을 꾸었는데 꿈에 수많은 군중 남녀노소가 원망 어린 목소리로 "빌라도! 빌라도"하고 이름을 부르는 꿈을 꾸었다고 의로운 사람을 재판하는 일에 상관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전갈이었습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더욱 난감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군중의 소리를 들어주지 않으면 작게는 민심을 잃어버릴 수가 있고, 나아가서 자칫하면 민란(民亂)이 일어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에게 사형을 선고하면 뻔히 죄 없는 줄 알면서도 사람을 죽이게 되는 자기의 양심이 고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자기의 아내가 꿈을 꾸었다고 그 재판에 관여하지 말라고까지 전갈을 해왔으니 그로서는 더욱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빌라도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때가 유월절기인데, 그 유월절에는 총독의 권한으로 사형수 한 사람을 특별 사면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당시 살인 강도죄로 이미 사형을 선고받은 바라바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군중들에게 이 바라바와 예수 중 누구를 특사할 것인가를 선택케 하면 이 군중들이 설마 흉악한 바라바를 살려주고 예수를 죽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빌라도는 죄없는 예수를 불의한 사람들의 요구에 죽이는 부담을 덜기 위해서 이런 처방을 내어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군중들에게 묻습니다. 

    "오늘 내가 유월절에 한 사람을 특사할 수가 있다. 그런데 너희들에게 그 결정권을 주겠다. 내가 예수를 특사하랴 아니면 바라바를 특사하랴?" 

    "바라바냐? 예수냐?"

    .......?????????????????????????????????????????????????????????

    그런데 군중들에게서 어떤 대답이 나옵니까? 

    "바라바를 놓아주라. 예수를 죽여라"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죽이라는 군중들의 함성에 빌라도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다시 군중들에게 묻습니다. "예수가 죽을 만한 죄가 없는데 왜 그러느냐? 바라바냐 예수냐?" 그러나 군중들은 계속해서 외칩니다.

    "바라바라! 바라바라!" 그래도 빌라도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죽이라"고 외치는 군중들에게 세 번째 묻습니다. 그것은 책임전가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핏값을 누가 받을 것인가? 나는 이 핏값에 책임이 없다." 그러자 군중들이 외칩니다. "그 핏값은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에게 돌려라." 

    이렇게 해서 무고한 예수님은 결국 사형을 언도 받았으며, 흉악한 죄인 바라바는 특사를 받아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군중은 의인 예수를 버리고 죄인 바라바를 택했으며, 빌라도는 양심을 버리고 대세를 따랐던 것입니다. 

    예수를 버리고 바라바를 택하는 이 엄청난 불의, 이 세상의 역사, 여기서 우리는 우리인간들의 불의함과 어리석은 세상의 역사를 생각해보면서 그 일을 나와 관계지어 내가 지금 그 재판정에 섰다면 어떤 길을 택했을까? 나는 어떤 신앙을 가져야 할까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군중들의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 혹은 예수님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가지는 자세를 둘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를 그리스도 즉, 나의 죄 나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구세주로 받아드리는 사람과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좋은 교훈을 말씀하시는 인류의 선생으로 받아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실례가 요한복음 12장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요한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한 바라새인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 한 옥합을 깨서 주님의 발에 부어드립니다. 이 향유는 300데라리온이라고 했으니, 엄청난 돈이었습니다. 지금의 돈으로 1000만원이 넘는 돈이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성경에는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마리아는 예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경배의 대상으로 섬긴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향유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립니다. 

    그런데 이것을 본 가롯 유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행동을 비난하고 나섭니다. 무어라고 비난했습니까?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주어야지 낭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죄의 문제, 혹은 구원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이 예수를 사회운동가, 자선사업가, 혁명가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가 예수를 배반하게 된 동기도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꼭 은 30이 욕심이 나서만 아닙니다. 예수를 3년이나 따라다녀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혁명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유다는 실망과 두려움 속에서 예수를 배반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를 누구로 보느냐? 예수를 구원자로 보느냐 윤리가로 보느냐? 여기에 따라서 사람이 예수의 주변에 있었지만 예수를 택할 수도 있고 바라바를 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철학이나 윤리를 논한 선생으로 본다면 십자가는 아무런 뜻이 없습니다. 도리어 어리석은 죽음일 뿐인 것입니다. 예수를 스승이나 혁명가로 본다면, 부활도 사실이 아니라, 정신적이요, 상징적인 것일 뿐입니다. 물론 기도와 예배의 대상이 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잘못 알면은 유다와 같이 실망을 느끼고 바라바를 선택한 군중과 같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에 나타난 예수는 너무나 순진합니다. 너무나 융통성이 없습니다. 시대에 맞지 않습니다. 나약합니다. 더구나 그는 인간적으로 33세밖에 되지 않는 새파란 젊은이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인간 예수만을 생각하면 예수는 소크라테스만도, 공자만도, 석가만도 못한 것입니다. 

    교회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졌습니다. 어느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선지자라 하더이다." 예수님은 다시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은 쉽게 답을 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자들은 주님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분명 이들은 예수님의 행사를 다 보았습니다. 물위를 걸어오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5개로 5천명을 먹이시고, 심지어 죽었던 나사로까지 살리시는 놀라운 일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또한 자기들과 함께 자고 먹습니다. 자기들과 똑같이 생겼습니다.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이 삽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동생들도 이런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출세하려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고 합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세상적인 풍조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 베드로가 일어나서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신 주님께서 아주 기뻐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것을 네게 알게 한 이는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니라. 내가 너의 그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교회는 바로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고백 위에서만이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고백을 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백을 한 사람에게는 음부의 권세- 즉 죽음과 어둠의 권세가 그 사람을 삼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누구입니까? 그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상함은, 그 하나님의 아들이 찔림은, 그 하나님의 아들이 채찍에 맞음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요, 죄가 있어서가 아니며, 마귀가 이겨서가 아닙니다. 그러면 왜 그 하나님의 아들이 찔렸으며, 죽었으며, 고난을 당해야했습니까?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이미 600년 전에 예언을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인함이라고.

    그러므로 여러분, 교회는 수양으로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윤리강연이 아닙니다. 찬송은 노래가 아닙니다. 기도는 자기성찰이 아닙니다. 그런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결국 예수에게 실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와 바라바를 택하려고 할 때 예수를 버리고 바라바를 택하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믿음으로 교회를 나온 자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저를 이기지 못합니다. 이 고난주간에 우리는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받아야할 죄의 값을 대신하신 주님, 내가 받아야할 형벌을 대신 받으신 주님을 우리가 믿을 때, 우리의 인생은 사죄의 감격과 모든 운명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권세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빌라도의 비겁함을 생각해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죄가 없음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군중들이 예수를 억지로 죽이려고 하는 것도 알았습니다. 더구나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서 꿈 이야기까지 하면서 불의하게 예수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것까지 말했습니다. 그에게는 양심을 지키고 의로운 편을 택할 기회가 여러 번 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진실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양심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회주의자였으며, 비겁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조금도 손해를 보기 싫어서 의로움을 외면했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자기의 희생이 없이 예수를 택할 수는 없습니다. 적당히 양심이나 종교심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다 어떤 기로에서 빌라도와 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칸트는 "소극적인 악도 없고 소극적인 선도 없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옳습니다. 우리가 나는 악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다고 자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거짓입니다. 사실 악 중에 제일 교묘한 악이 비겁한 악입니다.

    빌라도는 그렇게 주어진 기회를 외면하고서는 대야에 손을 씻으면서 "나는 예수의 피에 대하여 무죄하다."고 자위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빌라도의 아내의 꿈이 맞았습니다. 그 부인의 꿈대로, 그 이후에 기독교인들은 예배를 드릴 때마다 남녀노소가 다 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지금까지 아니 영원토록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의 비겁한 악을 경멸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그 때의 핏값을 우리와 우리의 자손들에게 돌리라고 했던 유대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정말 이스라엘백성들은 무서운 핏값을 지불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후에 로마의 티토 장군의 침략에 온 나라가 완전히 초토화되어 산산이 흩어진 민족-곧 디아스포라란 백성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 후에 2천년동안 그들은 나라가 없이 살면서, 히틀러에게, 유럽의 여러 왕들과 정치가들에게 그야말로 짐승 취급을 받으면서 2000년을 살아야했던 것입니다. 옳지 못한 자기의 목적을 이루려고 함부로 신앙을 파는 일들은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십자가에 대해서 반드시 취해야 할 두 가지 자세가 있습니다. 하나는 믿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도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십자가가 다가오는 것은 얼른 보면 고난입니다만, 사실은 기회입니다. 주님의 편이 될 수 있는 기회요, 축복 받을 수 있는 기회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끝임 없이 반복하는 어리석은 오산이 오늘 성경에 있습니다. 

    "예수가 아니라, 바라바를 놓아주라" "예수가 아니라, 바라바를 놓아주라" 이런 군중들의 외침은 오늘도 우리인간들이 계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아니라, 돈을 원한다. 예수가 아니라, 권력을 원한다. 예수가 아니라, 평안을 원한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만약 내가 그 때 거기에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권력자들이 돈을 준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비난한다. 그때 나는 그런 대세를 물리치고, 그런 매수공작을 물리치고 예수를 택한다고 혼자라도 소리칠 수 있는가? 내가 조롱 받고 있는 예수 편에 설 수 있겠는가? 유행이나 대세에 따르지 않고, 나는 "바라바가 아니라, 예수를 놓아주라"고 외칠 수가 있겠는가?

    사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날마다 빌라도의 법정에 선다. 즉, "예수냐? 대세냐? 예수냐? 내 자랑이냐? 예수냐? 돈이냐?"의 기로에 서게된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런 시를 썼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주일

    오늘 말씀의 요지는 이것이다.

    예수냐 바라바냐?--"예수가 교훈이냐, 구세주냐?"의 물음이다.
    예수냐 바라바냐? --"십자가를 질 것인가, 말 것인가?"에 있는 것이다. 
    부디 오늘 우리들 결심하자. 예수는 나의 구세주입니다.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대세보다도 돈보다도 안락함보다도 진실을 택하겠습니다. 예수를 택하겠습니다. 
    우리들의 이 결심 위에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또한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 있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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