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시로 엮은 면류관(마27:27-31)
  • 2013.06.03 21:19:36
  •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악한 무리에 의해 고난 당하신 한 장면을 성경에서 읽었습니다. 총독의 사병들이 예수를 총독 관정 안으로 끌고 들어가서 온 부대를 다 그의 앞에 모아 놓았 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옷을 벗긴 다음에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 고 나서 오른손에 갈대를 들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 만세! 하 고 외치면서 희롱했습니다. 또 예수에게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쳤습니다 (마 27 : 2 7 - 30 새번역).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얼마나 낮아지 셨습니까? 저희가 예수님을 조롱할 때 주님은 자기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늘의 열 두 영(營)의 천사를 발동시킬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처럼 말로 다할 수 없는 천대와 멸 시, 희롱과 고난을 받으시면서도 아버지의 궁정에서 볼 수 있었던 그 영광스러운 권위를 그대 로 간직한 채 어엿이 서 계셨습니다. 그는 이제 나사렛의 소박한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주님이 원하신다면 그의 불꽃같은 눈초리로 단숨에 로마 병정들을 없애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침묵을 지키시던 그 의 입술에서 한 마디가 나오는 날이면 빌라도의 궁정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릴 것입니다. 주님 이 원하신다면 우유부단한 통치자와 악당들을 산채로 땅 속에 매장시킬 수 있으실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 우리의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그는 하늘에서 사랑을 받으시고 이 땅에서는 왕이 되시는 분이신데 지금 고통스러운 가시관을 쓰시고 앉아 계십니다. 그는 마음과 육신에 동시에 상처를 받으시고 견딜 수 없는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그의 왕다운 얼굴에서는 쉴 새없이 흐르는 피와 상처로 창백해지고 기력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 모습은 기 품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동정어린 마음으로 가슴 아프게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질고를 당하시 는 그 주님과 더욱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쓰고 계 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주님께서 쓰신 가시면류관이 어떤 것이었나 하는데 대해서 추측으 로 길게 말씀드리고 싶지 아니합니다. 랍비나 식물학자들에 의하면 팔레스틴에 자라고 있는 가 시돋힌 식물의 종류만 해도 20내지 25가지의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생각에 따라서 어떤 특정한 나무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왜 많은 가시나무 가운데서 한 가시나무를 말합니까? 우리 주님은 한 가지 질고만 당 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질고를 당하셨습니다. 어느 하나의 가시이건 모든 가시이건 상관이 없 습니다. 어떻든 죄가 세상에 만연되므로 가시와 엉겅퀴가 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 면 주님께서는 세상에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질고를 당하시고 종일토록 슬픔을 당하시게 되었 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시로 엮은 면류관은 우리 주님의 머리를 상 하게 했고 그에게 수치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쓰신 주님에게서 무엇을 바라보십니까? 성령께서 우리 마 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주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와 어떤 상관이 있는 것을 분명히 바라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선, 가시로 엮은 면류관 쓰신 예수님의 모습 그 자체가 슬픈 일입니다. 사랑과 인자가 한없이 많으신 주님이, 인간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주신 주님이 그처럼 냉대 와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생명의 왕이시요, 영광의 왕이신 예수님이 악한 군인들에게 희롱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가시밭에 핀 백합화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죄악된 세상 가운데 홀로 의로우신 그리스도를 연상케 합니다. 예수님은 평민들이 입는 아주 평범한 옷을 입었었습니다. 그런데 군인들은 그 옷을 벗기고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난폭하게 떠들며 희롱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얼굴을 보세요. 얼마나 온순하게 보입니까! 난폭한 군인들과 얼마나 대조가 됩니까! 그렇게 비난해도 한 마디 의 대꾸도 없이 침묵하시므로 자신의 위엄을 나타내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때문에 예수님께서 연약한 자처럼 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우리를 위하 여 주님은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영광을 버리셨습니다. 그는 우리 의 구원을 위하여 굴욕을 당하셨습니다. 그가 굴욕을 당하실 때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는 우리를 데려가시기 위하여 보좌를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 를 비웃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 사랑의 주님을 세상 사람처럼 무정하게 대하지는 않았습니까? 더구나, 주님께서 자칭 왕이라고 했다면서 조롱했습니다. 그래서 네가 왕이라니까 머리에는 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으라고 하면서 금면류관이 아닌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만들어서 예수님 께 씌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왕이라고 하니까 가이사를 몰아내고 왕이 되려는, 요샛말로 쿠 데타 음모자로 착각을 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저희들은 그리스도의 참된 영광에 대 해서는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그 당시의 악당들이 생각하던 것 같은 왕이 아니라 가장 진실하고 가장 강조적인 의미에서 왕이셨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가 왕이 아니었다면 그는 일개의 사기꾼 으로 조롱을 받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진실한 왕이셨기 때문에 그의 모든 말씀 이 그의 왕 되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의 모든 어조가 그의 왕의 정신을 잘 나타내 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땅히 찬양을 받아야 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같이 모욕을 당해야 하니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그리고 가시로 엮은 면류관은 단순한 조롱 뿐만 아니라, 잔인하고도 모욕적인 고통을 더하는 것입니다. 만일 저들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조롱할 의사만 있었다면 짚으로 면류관을 만들어 씌워도 되 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리스도를 고통스럽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예수님께 씌웠습니다.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이 밤에 자리에서 일어나시다가 잘못해서 넘어지면서 벽에 머리가 닿 아 그만 목의 뼈가 상했습니다. 서울대학병원에 계신 친구인 정형외과를 보시는 집사님에게 급 히 연락을 해서 구급차로 병원에 모셔다가 치료를 했습니다. 몇 달 동안을 머리를 움직이지 못 하게 장치를 하는데 그것이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머리에 맞을 정도의 둥글한 쇠로 머리에 씌우고 전혀 움직이지 못하게 여러 곳에 나사못으로 죄어서 고정을 시키는데 조금만 움 직여도 고통을 줍니다. 그때 병실에 들렀더니 그 집사님은 눈물을 흘리면서 예수님의 가시면류 관은 이보다 더 아프셨겠지요. 저는 이 고통 속에서 주님이 쓰셨던 가시면류관을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하는 말씀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가시로 엮은 면류관! 주님은 우리가 범죄해서 징계를 당하는 것 같이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죄가 없이 우리는 수치를 당할 리가 없고 그리스도께서 고난없이 수치를 당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악의 더러워진 옷을 입고 그 죄가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덮였기 때문에 그리 스도께서 수치의 옷을 입으셔야 했고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셔야 했습니다. 주님이 당하신 고 통을 우리가 무엇으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말로 하는 것보다 여러분이 사랑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가시로 엮은 면류관은 위선적인 신앙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군병들은 주님의 머리에 왕관을 씌웠지만 그들이 그리스도를 왕으로 인정해서 그렇게 한 것 은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주님의 손에 홀을 들려주었지만 그것은 진정한 왕권을 의미하는 상아 로 만든 홀이 아니라 연약한 갈대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오늘도 그리스도는 성실하지 못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조롱을 당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중심으로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주님께 하는 말은 주님을 조롱하는 것이나 다름 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세상의 최대의 순교자는 주기도문이다 고 말했습니다. 주기 도문을 하루에 몇 번이고 아무 생각없이 드리고 그 기도와 상관없이 사는 사람이 너무 많이 있 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중심이 바르지 못하면 이것은 주님의 머리에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씌 워드리는 일이 됩니다. 우리의 진심을 주님께 바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손에 갈대 홀을 들려 드리고 조롱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죄를 회개치 않고 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그리 고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주님을 우리의 왕으로 인정치 않는다면 이것이 곧 주님을 조롱하는 일 이 됩니다. 명목상의 선심과 거짓된 존경심과 충성의 구실로 또 다시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지 마십시다. 여러분, 우리가 범한 죄로 주님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지 마십시다. 가시관을 쓰신 우리 주 님은 슬픈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쓰신 가시관은 소극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적극적인 면도 있습니다. 주님의 가시면류관은 승리의 노고를 의미합니다. 그는 누구에게도, 무엇에게도 정복당하실 수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수치에서 도 승리하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대속의 질고를 담당하셨습니다. 따라서 그 고통을 당하심에 있어서 절대로 회피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우리는 죄인들입니다. 죄의 값은 고통과 죽음입니다. 그러므 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마셔야 할 공의 의 쓴 잔을 마셨습니다. 그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흔드셨습니다. 그리고 소리쳤습니다. 내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게 하옵소서. 주님은 인간으로서 이러한 슬픔과 싸우실 때에 전력을 다하여 세 번씩이나 기도하셨습니다. 그의 영혼은 격해지는 슬픔 때문에 극한 감정에 싸였고 그의 온 몸은 피땀에 흠뻑 젖어 있었습 니다. 주님은 이 쓴 잔을 마시므로 우리가 당할 멸망을 없이 해주셨습니다. 성경은 선언합니다. 누가 정죄하리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 시니 ...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하였습니다. 여러분,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쓰시고 모욕과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주님은 겁내지 아니하시 고 정해진 자신의 목적을 이탈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셨고 결국 완 성하셨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세요. 그리고 주님께서 슬픔의 고통을 인내하신 그 인내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담당할 수 없는 고통을 주님께서 담당하셨습니다. 우리도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으면 분노합니다. 이런 모욕을 당하고도 분노하지 않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끝까지 인내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대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 하라 하였습니다. 주님은 고통을 당하셨으나 그 모든 것을 참으셨습니다. 주님은 그 고통에서 조금도 위축되거나 겁내지 아니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인내의 모습은 무지한 병사들에게 오히려 큰 감동을 준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 면 복음서를 기록한 마태가 예수님이 모욕당하신 현장에 없었습니다. 마가 역시 그곳에 없었습 니다. 군사들 외에 아무도 거기에 없었습니다. 거기에 유일한 목격자가 있었다면 이 사람이야 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라고 말한 백부장이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건의 내용은 직 접 그 사건을 본 사람에 의해서 전해졌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것 보면 예수님께서 그처럼 모 욕과 고난을 당하시면서도 끝까지 참으신 것이 결국 가장 잔혹한 사람들에게까지도 큰 감동을 준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가시로 엮은 면류관은 우리의 심령을 치료합니다. 이 가시로 정욕의 열정을 뽑아냅니다. 교만의 열을 감소시킵니다. 타오르는 육욕과 죄로 인 한 고통을 놀랍게 치료해 줍니다. 가시면류관을 쓰신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통회의 눈물없이 바라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가시가 가슴에 박히면 감사의 노래가 나오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 몸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곡히 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네가 약한 데서 강하게 됨이라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래서 그의 약한 것을 오히려 자랑했습니다. 가시 그 자체가 우리에게 즐거운 것은 아 닙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 심령에 유익과 축복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가시는 우리의 심령을 치료해 주는 기구입니다.가시는 모든 세상 근심을 치료하는 약입니다. 가시면류관은 세상의 허영에 대한 욕심을 치료해 줍니다. 따라서 가시면류관은 인간의 허영을 연기와 같이 사라지게 합니다. 빌리 그래함과 같이 전도하며 훌륭한 성가를 부르는 죠지 베브리 쉐아(George Beverly Shea) 가 쓴 유명한 성가를 여러분은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1.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2.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이전에 즐기던 세상 일도주 사랑하는 맘 뺏지 못해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왕좌 옆에 세상의 아무리 훌륭한 왕이 앉는다 해도 초라해 보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밝은 빛을 바라보다가 세상의 영화를 바라보면 사실 보이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주님이 가시관을 쓰셨는데 우리가 무슨 영화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 이 헐벗으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사치스럽게 옷을 입을 수 있습니까? 주님이 천대받으시는데 우 리가 어떻게 영광 누릴 수 있겠습니까? 가시관은 우리의 허영을 치료해 줍니다. 끝으로, 가시로 엮은 면류관은 주님이 세상을 이기신 왕관입니다. 인간이 범한 죄를 완전히 승리하신 죄의 왕관, 그것이 가시로 엮은 면류관입니다. 가시는 저 주로부터 생겨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이 아무리 크다한들 주님이 당하신 고난만큼이야 크 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가시로 엮은 면류관은 주님이 세상을 이기시고 쓰신 면류관입니다. 그러므로 가시관 쓰신 주님을 바라보고 그 주님을 따라갈 때 우리는 승리의 면류관을 쓸 수 있 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 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 이니,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 : 7 - 8)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우리의 신령한 눈을 열어 가시로 엮은 면류관 쓰신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그 슬픈 모습을 바라보십시다. 그래서 과거의 위선적인 신앙을 버리고, 세상의 영광도 버리고,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도 버리고, 교만한 마음도 버려서 가시로 엮은 면류 관이 영광과 승리의 면류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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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 2013.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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