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론 >
인간의 신체기관 중 손은 참 묘한 것입니다.
손은 남을 위해서 한없이 좋은 일을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재산이나 생명에 결정적인 손상을 끼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손이 어떤 손인가에 따라서 인생의 가치는 결정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시던 마지막 주간, 성경에는 세 사람의 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남을 해한 사람의 손, 남을 위해 끝까지 붙들어주려고 했던 손, 부드러운 손길을 뿌리쳤던 손....
우리는 다시 부활절을 맞으며 나는 어떤 손인가? 어떤 손이 되어야 할 것인가? 오늘의 설교가 우리의 손들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1. 빌라도의 손은 책임 회피의 손입니다.
평소 예수님을 미워하던 유대 기득권자들은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며 호령하자 그 분노가 폭발해버렸습니다.
그들은 하인들로 구성된 민병대를 동원하여 예수님을 체포했고 사형집행을 위해 당시 총독이었던 빌라도에게로 갔습니다.
빌라도는 그 지방의 행정장관이었습니다. 행정장관은 최소한 27세가 되어야 했기에 빌라도는 그 이상은 되었고 결혼한 사람입니다.
빌라도는 야전지휘관을 지낸 사람이기에 용맹도 패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서는 무책임하게 처신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임을 알았습니다.
아내에게서 예수님은 좋은 사람임을 알았고 사형에 내주어서는 안됨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빌라도는 망설입니다. 빌라도가 망설이는 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빌라도와 유대인들 간에는 평소에 관계가 좋지 못했습니다. 빌라도가 강압 정책을 썼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군기는 깃발이 아니고 장대의 꼭대기에 독수리상(像)이나 황제의 상(像)을 달았습니다. 독수리는 유대인들에게는 부정한 동물입니다. 황제 숭배도 유일신을 믿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조금도 납득할 수 없는 우상입니다.
유대인들의 정서를 알고 있는 통치자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유대인들의 증오심을 사지 않기 위해 독수리상이나 황제상을 제거했습니다. 빌라도는 강직한 군인입니다. 그는 깃발에서 상(像)을 제거하지 않고 들어와서 유대인들의 분노와 반발을 샀습니다.
또 하나, 빌라도는 예루살렘에 좋은 물을 공급하기 위해 새 상수도 건설을 했습니다. 물을 공급하는 일은 좋은 일이었으나 거기에 드는 비용을 성전 재정에서 충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의 헌금은 성전을 위해서만 사용해야 하는 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성전의 헌금을 사용했으니 분노가 폭발할수 밖에 없습니다.
유대인과 빌라도 사이에는 이처럼 극심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개인적 비리와 약탈, 학정을 고발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만약 집단적인 민원이 들어가면 빌라도의 출세에 지장을 초래할 것입니다.
유대인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라고 요청합니다.
빌라도는 양심의 소리도 있었고 아내의 간청도 있었지만 평소에 유대인들과 갈등을 겪었던 것이 약점이 되어 소신있게 행동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리 보전을 위해서 예수님을 성난 유대인들에게 내주고 맙니다. 그래도 양심의 가책과 역사의 준엄한 심판이 두려웠는지 대야에 손을 씻으면서 아무 책임도 없다고 발뺌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어주는 손, 그리고서도 책임이 없다며 물로 씻어내는 손. 빌라도는 여러 사람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진리를 생각했고 옳은 것을 생각했다면 이렇게 무책임한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잘못은 단순히 무고한 사람을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만 아닙니다. 재판관의 자리에 있다보면 잘못 재판할 수도 있고 실수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재판관은 잘못된 실수를 자신이 책임진다는 투철한 책임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빌라도는 자기의 책임을 회피합니다. 너희들이 잘못했으니 나는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양심적인 행동같지만 사실은 자신의 자리보전을 위해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야비한 수법을 봅니다.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 자신의 감정이나 자존심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을 내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서도 내 책임은 없다며 발뺌하는 모습은 없습니까? 책임있는 손이기를 바랍니다.
2. 유다의 손은 배신의 손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에게 제자로 선택을 받았습니다. 3년을 함께 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신임을 얻었겠습니까?
그러나 3년의 생활 속에서도 마음의 눈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통한 자신의 입신출세입니다. 예수님이 조금씩 조금씩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을 때 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예수가 왕위에 오르면 자기는 회계 일을 오래 보았기에 재무장관 정도는 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가까이 다가가시면서 예수님께서 영 이상한 말씀만 하십니다. 자꾸 십자가에 달리신다는 것입니다. 스승이 십자가에 달리시면 자기들도 같은 운명이 될 것입니다.
유다는 배신을 꿈꾸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최후의 만찬장에서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바라보며 깜짝 놀랐습니다. "누구냐?"고 여쭈었더니 "나와 같은 그릇에 손을 넣은 그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고기나 빵을 먹을 때 소스를 찍어먹습니다. 일종의 장국이지요. 바로 이 소스 그릇에 손을 넣을 때 예수님과 유다의 손이 동시에 장그릇 속에서 부딪쳤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릇에 손을 넣은 자니라"
유다는 깜작 놀랐습니다. 자기의 계획이 탄로된 줄 알았습니다. 더군다나 그 때 그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알아야 했습니다. 배신은 혼자의 음모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 아셨다면 예수님은 생각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시요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그 앞에 꿇어 엎드리어 회개해야 합니다.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기대해서 노골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유다는 은 30을 팔고 예수님을 적들에게 넘겨버립니다. 그의 손은 배신의 손이었습니다. 스승을 팔아서 은 30을 움켜쥐고 있는 탐욕의 손입니다.
천재적인 예술가 미켈란젤로는 나이 70이 넘어서 <최후의 심판>을 그렸습니다. 폭이 30미터, 높이가 40미터인데 내용은 3단계입니다.
상단은 천국, 하단은 지옥, 가운데는 중간 부분. 천사들의 손에 이끌리어 천국으로 가는 사람과 뱀을 칭칭 감고 지옥으로 끌려가는 장면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케 하는 명작 중의 명작입니다.
<최후의 심판>의 인물은 모두 나체. 출생할 때 나체였으니 심판을 받을 때도 나체여야 한다는 화가의 지론입니다.
교황은 거룩한 성당에 나체그림이 가득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 그림에 옷을 입히기로 결심하고 화가를 수소문했지만 당대의 대가 미켈란젤로의 그림에 덧칠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교황은 거금(巨金)을 내걸었습니다. 거금에 눈이 어두운 화가 한 사람이 나체 그림에 덧칠을 했습니다. 그후 이 용감한 화가는 `기저귀 채우는 화가'라는 수치스러운 명예를 얻게되었습니다. 그는 욕심에 눈이 어두어 대작(大作)을 훼손한 손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지금도 인간 세상에는 이런 손들이 많습니다.
배신의 손, 남을 배신하고 골탕먹이고 사기치고 그래서 거두어 드리는 그 돈을 세고 있는 손, 남을 곤경에 빠뜨리고 돈을 세고 있는 손, 남을 십자가에 매달려놓고 돈을 세고 있는 손... 이런 손들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손은 희생과 용서의 손입니다.
예수님은 30년을 목수 일로 굳어진 노동의 손입니다. 그분은 부지런한 분이십니다. 생계를 책임지시고 열심히 노동하던 군살박힌 손입니다. 그 손은 떳떳한 손이요 부끄러움이 없는 손입니다.
그분은 3년을 공생애생활을 했습니다. 넘어진자, 외로운자, 죄지은자, 병든자, 슬픔에 빠진 자를 위로하고 일으켜 세우시고 붙들어주시던 손이었습니다. 그 손 아래 많은 사람들이 새 삶을 얻었고 일어섰습니다. 참 아름다운 손입니다.
예수님의 손은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던 손입니다. 나병환자들을 만나면 나병환자들의 손을 만지시고 중풍걸린 사람을 만나면 중풍걸린 손을 만지시고 결핵환자들을 만나면 결핵환자들의 손을 잡으시며 어루만지시며 상처를 싸매시며 고쳐주시는 자기 희생적이던 손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그의 손은 못에 박혀 고통당했고 피흘렸습니다. 죄인들을 위해 못박히고 찢어지고 피흘리신 손입니다. 평생을 남을 위해 사시더니 마지막 생애조차 남을 위해 피흘리고 사랑을 나누어주신 아름다운 삶이었고 손이었습니다.
여러 해 전, 외발산동에 <사랑의 집>이라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 지 모르겠습니다 .
<사랑의 집>은 왕년의 권투선수였던 장진남 목사님이 정박아를 키우며 함께 생활하던 시설입니다. 목사님 내외 분은 정박아들에게만 사랑을 주고자 자식을 낳지 않았답니다.
장 목사님 사모님이 얼마나 빨래를 많이했던지 손금이 다 지워져 버렸다고 합니다. 주민등록증을 만들려 갔더니 지문이 나타나지 않더랍니다. 지문이 문드러진 손, 그러나 그 손은 참 아름다운 주님의 손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나타나셔서 손을 내미시며 만져보라고 하십니다. 그 손은 의심많은 도마를 붙들어 주신 손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번씩이나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을 확인하시며 양들을 맡기십니다.
그 손은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다시 일으켜 세우시며 사명과 책임을 주신 손입니다.
예수님의 손은 아름다운 손입니다. 예수님의 손은 구원의 손입니다. 예수님의 손은 하나님의 손입니다.
1490년 대, 알브레이드 뒤러와 프란츠 크닉스타인은 같은 동네 친구였습니다.
두 사람은 그림에 소질이 있었지만 생계가 어려워 그림공부를 할 수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약속했습니다. 제비뽑기를 해서 이긴 사람은 노동을 해서 돈벌어 다른 친구의 그림공부를 도와주기로.
알브레이드가 제비뽑기에서 이겨 도회지로 나갔습니다. 그는 열심히 공부했고 프란츠는 수도원에서 장작을 패고 노동을 해서 번 돈을 친구에게 보냈습니다. 알브레이드는 부지런히 공부하여 미술계에 명성을 떨치는 유명한 화가가 되었습니다.
알브레이드는 돈을 갖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프란츠, 그동안 고마웠네. 이제는 자네가 그림공부를 하게나"
그러나 알브레이는 친구의 손을 보는 순간 그 친구가 너무나 자신을 위해서 큰 희생을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친구의 섬세했던 손가락은 이미 굳어있었고 필수적인 섬세한 붓 터치를 더 이상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알브레이드는 너무 미안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느날 알브레이드는 사전 약속도 없이 친구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프란츠는 마침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가 없습니다. 내 친구 알브레이드가 크게 성공하여 아름다운 그림을 많이 그리도록 해주십시오" 그 기도를 들으면서 눈물흘리던 알브레이드는 얼른 그 기도하는 손을 스케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그림이 그 유명한 <기도하는 손>입니다.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그 손, 우리 주님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의 손은 너무 매끄럽고 냉정한 손은 아닙니까?
< 결 론 >
로마의 관광코스 중에 희안한 게 있었어요.
사람의 손주먹보다 약간 큰 구멍이 있는 데 심판의 구멍이라는 것입니다. 손으로 지은 죄가 없는 사람이 넣으면 아무 일도 없지만 만약 죄지은 사람이 넣으면 악마가 그 손을 절단해버린다는 전설의 구멍입니다.
관광안내원이 어떻게나 겁을 주는지 시골 할머니들은 정말 그러는 줄 알고 구멍속으로 손을 넣지 못해요.
사실, 옛날에는 이 구멍에 손을 넣었다가 짤리는 일이 있었답니다. 영주들이 구멍 안 쪽에 칼을 든 사람을 세워놓았다가 미운 사람이 손을 넣으면 그냥 잘라버렸대요. 그러니 그런 전설이 나올만도 하지요.
오늘 여기에 손을 집어넣는 구멍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쉽게 구멍 속에 집어넣을 수 있는 당당한 손입니까?
우리의 손은 어떤 손입니까?
책임회피의 손입니까?
내 떡이 아닌 것에 손을 넣고 있는 탐욕의 손, 배신의 손입니까?
우리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셨던 예수님의 손입니까?
세상은 우리의 손에서 하나님의 손을 보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손으로 다듬어져 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