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죽어 너 살아(마27:26-53)
  • 2013.06.03 21:23:00
  • 오늘은 십자가의 고난에 대해서 은혜를 받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오늘은 예수님의 수난 주간의 시작이다. 
    먼저 그리스도의 고난의 현장에 서자 먼저 군중의 소리에 양심의 눈이 멀어지고 여론에
    굴복하는 빌라도의 모습을 보자.
    눈이 어두워진 빌라도이다. 예수가 죄 없는 줄을 알았지만 다수의 힘 즉 여론에 밀려서 
    법정 양심이 어두워졌다. 여론에 밀려 죄인 바라바는 놓아주고 의인은 예수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군병들은 희롱 속에 예수를 왕으로 증거 한다. 예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고(왕의 옷),가시면류관을 씌우고(왕의 면류관), 갈대를 들리고(홀) 유대인의 왕으로
    부른다. 희롱 후에 원점으로 돌아 와서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끌고 간다.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없을 만큼 지친 예수그리스도 대신에 구레네 시몬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운다.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예수를 못박고 마지막 주님의 자존심까지 빼앗아
    가버린다. 죽음 앞에서는 동정이 일어날 수도 있건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 오라"고 아우성이다. 십자가 주위의 군중들은 주를 모욕하고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은 목적 달성을 자축하며 옆에 있는 강도들까지도 함께 욕한다. 죄에는 모두가
    하나되는 모습이다. 자연이 고개를 돌리고 주님이 절규하시다가 영혼이 떠나셨다.
    이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성전휘장이 위로부터 찢어지고 무덤이 열려서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 주님이 생명과 같이 사랑하시는 당평의 성도 여러분! 한 시라도
    주님의 고난의 자리에 동참할 수는 없을까요? 
    고난의 현장에 서신 주님의 반응은?  모든 모욕과 고통 가운데서도 주님은 침묵하신다.
    쓸개 탄 포도주(진통제)를 거절하시고 스스로 고통을 받으신다. 주님은 인간적인 
    고통과  영적 문제로 절규하시고 돌아가셨다.(26,50) 우리는 예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참을 수 있겠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의 비명과 신음과 절규의 의미를 여러분은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을 보면서 당신의 생각과 반응은?
    감격하는가? 대단한 믿음이다. 나를 위하여, 내가 질 죄악과 내가 담당할 고통을 대신 
    당하시고 죽으시는 주님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는가?
    덤덤한 교리적인 반응인가? "맞았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었는데, 금년에도 한 주간
    새벽기도회 해야겠지. 다른 교회는 40일인데 우리는 다행이군---" 화가 나는가?
    예수 죽이는 사람들 때문에 화가 나고 비웃는 사람들에 대한 연약하고 무능력한
    예수님의 반응 때문에 화가 나기도 하는가? 본때를 보여 주면 좋겠는데 당장에 요절을
    내어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 주고 전도의 기회를 삼으면 좋을 텐데. 
    풀리지 않는 의문은 왜 주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했는가? 십자가 전의 예수는 말씀의 
    지혜자로 누구도 당할 자 없었다. 능력의 예수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고 38년 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어서 썩어 냄새가 나는 자를 살리고 5병이어로 5천명을 먹인
    예수님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행동하지 않으시고 무리를 가만히 보고만 계실까?
    인내만 할까?
    지금 주님이 당하시는 일은?
    예수님이 당하시는 모습은 우리의 의미로 보면 바보같다. 그러나 더욱 주의 깊게 보자 
    무리들과 제사장들의 조롱의 말이 무엇인가? 40절에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여기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란 용어이다. 이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간 금식을 한 후에 사단이 시험을  할 때 던진 말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이 떡이 되라고 했고 성전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고 했다.
    이때 주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거절했다. 주님은 사탄의 요구를
    충족시킨 것이 아니라 거절하므로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시고 사탄을
    이기셨다. 주님에게 패한 사탄은 얼마동안 예수님을 떠나 물러갔다(눅4:13).
    그런데 마16장에 다시 돌아와 예수님을 시험하는 모습을 본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냐고 묻자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앙 고백을 하자 이를 주님이 칭찬하신 후에 비로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날 것을 말씀하신다.
    이때 베드로가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고 하자
    주님이 돌이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오늘의 본문에서 이제 우리는 사탄과의 한 판 싸움을 본다.잠시 떠난 사탄이 다시
    주님께로 다가 와서 십자가 위에서 최후의 싸움을 하고 있다. 처음 광야에서 주님에게
    도전했던 조건으로 싸움을 건다.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너를 구원하라"이다. 결국 예수님은 로마 병정이나
    빌라도나 예수님을 빈정되고 삐쭉되는 유대인들과의  싸움이 아니라 사탄과의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군중들과 병정들은 자기의 말의 의미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사탄의 
    도구 노릇을 할뿐이다. 살피자 혹시 내 자신이  사탄의 도구가 되지 않는가?
    죽음을 죽이시는 그리스도 주님의 싸움은 사탄과의 싸움으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싸움이다. 첫 번째 아담을 사탄은 넘어뜨렸다.
    그래서 죽음이 들어왔고 사탄이 죽음의 왕 노릇을 하게 된 것이다. 지금 두 번째 아담과
    사탄이 싸우고 있다. 이 싸움에서 주께서 지시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하고 이겨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는 절대로 주님이 내려오면 안될  십자가이다.
    무리가 주님을 아무리 꼬이고 성질 나게 해도 신경질내면 안되고 참으셔야 할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를 우리는 응원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산다.
    주님이 모든 것을 참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주님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을 사로잡고 있던 죽음을 죽인 것이다.
    이는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 생명 길로 가는 생명 길을 만든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이 주님이 죽는 순간에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지고 땅이 
    흔들리고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가 살아났다.
    주님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죽음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모세가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 "(요3:14) 하나님이 뱀으로 뱀의 문제를 해결하셨듯이 주님이 죽으심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사탄이 주님의 죽음을 방해 하지 못한 것 처럼 죽음이 
    또한 주님을 죽음에 머물러 둘 수가 없었다. 이는 부활이 이미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죽음은 이미 부활의 시작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고난의 날은 초상집은 아니다. 
    고난주간에 나의 죄 때문에 죽으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죄의 심각성을 느끼나
    또한 주님의 죽음으로 나의 죄 문제를 해결한 것을 생각하며 감격하고 찬송을 할 수가 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는 분인데도 끝까지 십자가 지고 고난 당하신 주님을 우리는
    사랑한다. 주님의 십자가의 메시지는  "나 죽어 너 살라 "는 메시지이다.
    주님이 죽으심으로 내가 살았다. 이제 내가 죽어 남을 살리는 삶을 살자.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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