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속의 고난(마27:27~50)
  • 2013.06.03 21:23:39
  • Ford라는 목사님이 농장을 경영하는 성도의 가정에 심방을 갔습니다. 부인은 열심히 믿는 집사님이었지만 남편은 전혀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유인즉 '예수가 나를 위하여 죽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한다'면서 전혀 믿어지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심방을 가니까 그날 따라 남편이 전에 없이 목사님을 반기면서 '오늘 저는 희한한 것을 봤습니다. 이리와 보시죠. 이 닭좀 보세요' 합니다. 목사님이 보니까 머리에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 있는 어미 닭이 있고, 주위에는 노란 새끼 병아리 10여마리가 삐악거리며 놀고 있었습니다. 농부의 말에 의하면, 아침에 일찍 농장 정리를 위하여 나와 보니, 어미 닭이 꼼짝 않고 있어서 건드려 보았더니 툭 쓰러지는데, 날개 아래에 병아리 새끼들을 품은 채로 목에 피를 흘리며 죽어 있더란 것입니다. 간밤에 족제비가 병아리를 잡아먹으려고 들어왔다가, 암탉이 병아리를 품은 채 완강히 버티니까, 어미 닭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피를 다 빨아먹고 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어미 닭이 병아리 새끼들을 버리고 도망갔으면 살 수 있었겠지만, 새끼들을 위하여 대신 피를 흘리고 생명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마침 좋은 기회를 만났다고 생각한 목사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설명하였습니다. '이 어미 닭처럼 예수께서 우리와 당신의 죄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고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대신 살게 되었습니다' 농부는 '아 이제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하더니 그 다음 주일부터 열심히 교회를 나오기 시작하여 독실한 성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 보좌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려 대속의 죽음을 죽어 주신 것입니다. 代贖이란 말은 Redemption 혹은 Atonement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 뜻은 '대신하여 갚아 준다' '값을 주고 되찾아 준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속의 고난이란 죄값으로 마귀의 종이 되고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피흘려 죄값을 치러 주시고, 우리를 마귀의 권세 사망 권세에서 해방 시켜 구원해 주신 것을 말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당하신 조롱과 멸시,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십자가의 고통이 매우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있습니다. 십자가는 반역죄, 전쟁터에서 이탈한 죄, 해적, 암살, 소요죄 등을 범한 자들을 벌하는 사형 틀입니다. 십자가형이 선고되면, 먼저 죄수에게 채찍질을 하고, 죄수로 하여금 형장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한 후, 형장에 이르면 죄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굶어 죽기까지 내버려두던가, 못을 박아 죽이기도 합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특히 유대 나라처럼 날씨가 더운 지방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열대 지방의 열기와, 못 박힌 상처에서의 출혈로, 온 몸에 열이 나는데 몸의 당김과 갈증으로 열은 더 심해 간다고 합니다. 거친 못에 찔린 상처는 부풀어오르고, 찢어진 힘줄과 신경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더해 간다고 합니다. 머리와 위장의 동맥은 출혈되어 무서운 두통이 따르며, 정신은 공포로 혼미해지고, 온 몸에 일어나는 경련은 상처를 더 크게 찢어 놓으니, 실제로 죽기 전에 벌써 여러 차례 죽음을 맛보다가, 마지막에는 피와 물이 다 쏟아져 기운이 진하여 죽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로마 사람들은 십자가 형벌은커녕, '십자가'라는 말만 들어도 몸서리를 쳤다고 합니다.

    십자가형이 결정되자, 빌라도 총독의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겼습니다. 인간이 발가벗김을 당한다는 것은 최대의 모욕과 수치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난 날 군사 독재 정권 시절에 저질러졌던 악랄한 범죄 가운데 하나가 소위 '성 고문'이라는 것이었는데, 이성 앞에서 발가벗기는 극도의 수치감을 통하여, 억지로 범죄 사실을 자백하게 한 못된 고문 방법이었습니다. 이렇듯 발가벗기는 것은 최대의 수치와 모욕을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그 많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죄를 덮고 가리워 주시려고, 자신이 벌거벗음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입혀 줄 성결한 '흰 옷'을 위하여 자신이 벌거벗기우는 부끄러움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 '흰옷'은 몰론 '의의 옷'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죄 씻음을 받은 사람만 입을 수 있는 옷을 말합니다. 이 '의의 옷'을 우리에게 입혀 주시려고, 주님 자신은 모멸과 수치의 벌거벗김을 당하신 것입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홍포를 입히었습니다. 마가복음 15:7이나 요한 복음 19:2에는 '자색 옷'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홍포는 왕들이나 황제가 입었던 옷입니다. 빌라도와 헤롯도 이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낡은 주홍색 홍포를 입게 한 것은, 왕으로서 입게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왕이라고 하신 데 대하여 조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의 죄는 주홍과 같이 붉고 진홍과 같이 붉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입은 홍포는 그의 피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눈과 같이, 양털 같이 희고 정결케 하여,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채찍질을 하는 것은 십자가형에 의례히 수반되는 형벌이었습니다. 그 채찍질은 실로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보통 길다란 가죽 끝에 납이나 못을 달아 채찍질함으로 도중에 죽는 수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신 것은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한 예언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원수들은 우리 주님의 거룩하신 머리에 억지로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면류관은 승리자들이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군병들은 주님께 금면류관 대신,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씌우고, 예수님을 왕으로 가장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오른 손에 갈대를 들리어 주었습니다. 갈대는 왕권을 상징한 홀을 대신한 것으로서, 이 역시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하며, 그 거룩하신 주님의 얼굴에 더러운 침을 뱉었습니다. 실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무서운 모욕이었습니다. 인간의 불신앙은 거룩하신 주님께 이토록 참람한 죄를 지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부끄러운 죄악과 수치를 덮으시고, 영원한 제사장으로써 우리에게 사죄의 은총을 주시기 위해서, 이러한 모욕과 수모를 받으신 것입니다.

    45-50은 예수님의 최후에 대한 기록으로서, 인류의 죄와 저주를 한 몸에 짊어지고, 죽어 가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후 '제 6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9시까지 계속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6시부터 9시까지, 즉 우리 시간으로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그 뜨거운 팔레스틴의 태양이 빛을 잃고 있었습니다. 이같은 어두움은 천추만대 모든 인간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였습니다. 당시의 놀라운 어두움에 대하여, 아드리안 황제의 윤허를 받아 자유의 몸이 되었던 노예 출신 후레곤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시던 그 시간과 동시에 태양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그처럼 완전하고 무섭고 기이한 완전 일식은 세상에서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순간이었던 제 9시가 가까워지자, 매우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외치셨습니다. 이 말은 아람어로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뜻입니다. 이 외침이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습니까? 인류의 모든 고통과 질고와 죄와 형벌과 죽음의 전부를 한 몸 걸머지고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하나님을 불러 가며, 고뇌 속에서 절규하는 주님의 처절한 모습, 이 모습을 우리가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과연 누구를 위한 고난이고 아픔이며, 누구를 위해서 흘리는 피였습니까?

    루터는 주님의 고난 전체 과정 속에서, 가장 의미 심장하고 감동적인 이 부분 '곧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신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중에, 오랫동안 음식도 먹지 않은 채, 같은 자세로 꼼짝 않고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섬광처럼 떠오르는 생각에 놀라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버리셨다! 누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 F. W 크룸마허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신 주님의 부르짖음에 대하여 '나는 그 고난의 잴 수 없는 깊이를 접근한다는 생각이 날 때, 오히려 두려울 뿐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 소리에 대하여 글을 쓰거나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긴 침묵을 지킨 체 얼굴을 묻고 울고 싶을 따름이다!'고 하였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렇게 사랑하는 아들이 절규하건만, 하나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일언반구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위로의 말씀 한 마디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겠습니까? 사고를 내고 고생하는 아들의 고통을 차마 볼 수 없어 가슴아파 하는 어머니도 있고, 건강치 못하여 몸이 축난 아들을 보고 안쓰러워서 견딜 수 없어 하는 어머니도 있습니다. 수두로 앓고 있는 어린 자식의 고통을 보면서 며칠 씩 밤을 새웠다는 부모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울부짖을 때, 과연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사랑하는 아들의 피흘리는 모습, 고통에 찬 신음 소리를 듣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도대체 얼마나 쓰리고 아프셨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끝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고 절규하는 독생자를 외면하십니다. 왜 그러했습니까? 오직 한 가지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말하기를, 십자가 속에 들어 있는 이 같은 하나님의 고뇌하시는 아픔을 모르는 사람은, 함부로 십자가라는 말을 입에 담아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짊어지셨던 십자가입니다.

    마침내 주님께서는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외치신 후, 그의 영혼이 육체로부터 떠나셨습니다. 주님의 영혼은 그의 몸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으며, 실제로 운명하셨습니다. 이것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에게 일어났던 일과 관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죽음은 그 자체가 첫 언약을 파기한 결과로 찾아오게 된 것이었으므로, 새 언약의 중보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죽음을 대신해야 했으며, 그것을 통해 인류의 죄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을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죽으심을 그저 슬프게 감상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죄인의 생명을 구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죽음이었음을 깨닫고 확신해야만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고난 주일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가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부르짖었던 주님의 고뇌에 찬 저 절규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독생자의 처절한 절규를 들으면서도, 끝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외면하셨던, 하나님의 그 저미는 아픈 마음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유명한 화가 렘브란트는 십자가상에서 고난받는 그리스도를 그리고 난 후, 거기 둘러서서 구경하는 군중 틈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리고 울면서 고백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를 못박았다. 나는 그 일에 동참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수난 주간을 보내면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그 모진 채찍질과, 그 부끄러움과 수욕을 다 겪으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외치시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그 사랑의 넒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하는 다짐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시기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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