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이 되면 성 프란체스코 교단에서는 한 형제가 십자가를
지고 이스라엘의 십자가의 길을 행진하고 실재로 십자가에 못 박
힙니다. 그렇게 하여 예수님의 고난을 체험하고 자신의 죄를 속
죄하려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지난해 여름, 청송감호소에서
10년과 7년의 형을 마친 두 형제가 예수를 영접하고 자신들의 죄
를 속죄하는 뜻에서 400km 십자가 행진을 하였습니다. 20kg이 넘
는 십자가를 지고 400km나 되는 이곳 고양시 삼송동에 있는 한
선교회까지 보름에 걸쳐 걸어서 왔습니다. 그들은 불볕더위나 폭
우속에서도 행진을 계속하였다고 합니다. 발이 부르터 발톱이 빠
지고 양 사타구니가 헐어서 진물이 나는 속에서도 십자가 행진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이 십자가를 지고 간거리로 따
지면 예수님이 가신 거리보다도 멀었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들이 십자가를 지고 400km를 걸어서 이곳 삼송동에서 못 박힌다
고 하더라도 그것은 주님의 고난과는 다른 것입니다.
프란체스코 교단의 형제나 청송감호소를 나온 두 형제는 모두 죄
인 된 인간입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사함 받고
자 하는 마음에서 십자가를 진 것이니 사실상 고난이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천년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물리
적인 거리나 십자가의 무게와는 대조 할 수 없는 고난입니다. 하
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 자체가 고난입니다. 십자
가는 당시 참혹한 사형도구였습니다. 십자가가 그렇게도 끔찍한
것이었기 때문에 로마인들끼리는 십자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금기였습니다. 예수님은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했습니다. 저들이 예수님의 머리 위에 쓴 죄패에는 '유대인의 왕'
이라 하였지만 왕을 처형하듯이 하지 않았습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릴 때, 예수를 강도들 사이에 둠으
로써 포악한 강도쯤으로 취급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강
도 같은 몹쓸 인간들 사이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예수께서 십
자가에 못 박히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예수를 모욕하여 "네가 만
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고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영적 무지는 극에 달하였습니다. 주
님은 자기를 구원하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내어주
러 오셨다는 것을 저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과 장로들도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 찌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 구원에 대해서는 그들 말처럼 무능
했습니다. 그렇게도 당신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자들 앞에서 주님
은 절대적으로 무능하였습니다. 오늘 분명히 아실 것은 십자가에
서 그 절대적 무능이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만약에 그때, 주님이 조롱하는 이들 앞에서 능력을 행하여 십자
가에서 내려오셨다면 그들은 예수를 믿었을지 몰라도 우리가 믿
을 대상은 못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멸시와 천
대를 받으셨고 철저하게 버림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악과
못난 자아도 십자가에서 함께 버림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완전하게 버림받고 다시 살아나야 할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님이 버림받았습니다. 예수를 조롱하던 자들은 십자가에서 내려
오면 믿겠다고 하였지만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때 주님이 십
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우리는 망한 것입니다. 주님이 그 때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기에 저와 여러분들이 십자가에서 내
려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난이 뭡니까?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내려올 수 있는데 안 내려오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안 내려오는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내려 올 수 있는데 거기 있어야만 하는 것이 고난입니다. 하나님
의 아들이 아들 됨을 포기하고 죄인으로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고난입니다. 45절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자 온 땅이 어두
워졌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어둠이 땅을 지배할 때 주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쳤습니다. 이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
나님은 예수의 고난에 대해 침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
이라고는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고통 당할 때 땅을 어둡게
한 것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위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요단강에 세례를 받으실 때와 변화
산에 오르셨을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
라"는 말씀이 있었지만 골고다에서는 한 마디도 없었습니다. 멸
시하는 자들이 그렇게도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라고 조롱하였지
만 하나님은 끝내 예수의 아버지 됨에 대해 침묵하셨습니다.
히브리말로 '엘리'라는 말은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여
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공생애 기간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늘 '
아버지'로 불렀지만 이때만은 '하나님'이라고 부르셨다는 것입니
다. 예수께서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 하
나님은 예수에게 있어서 아버지가 되지 못하고 하나님 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분리를
봅니다. 이 분리가 고난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
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당신이 왜
버림받는지 몰라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신 것
은 아닙니다. 이 소리는 이유를 아는 자의 외침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하나님께 버림받음으로 인하여 당신의 구속사업을 다 이
루셨습니다. 요한복음 19:30에 "다 이루었다 하시고 돌아가셨다"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하는 말씀은 메시아로
서의 사역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란 말은 헬
라어로 '텔레스타이'입니다. 이 말은 승리자의 외침입니다. 자기
의 과업을 완수한 사람은 '텔레스타이'라고 외칩니다. 우리를 위
해 고난 당하고 죽는 것이 '다'였습니다. '텔레스타이'는 사흘
후의 부활을 예고하는 승리의 외침이었습니다. 우리 함께 이번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와 성금요일 기도회를 통하여 고난의 의미
를 깨닫고 부활주일에 그 승리의 외침을 확인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