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 개의 십자가(마27:35-38)
  • 2013.06.03 21:28:28
  • < 서 론 > 

    골고다 언덕에 세 개의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가운데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양쪽에는 죄수들이 달려있습니다. 
    세 개의 십자가는 세 갈래의 인생 길을, 거기에 달려있는 죄수들은 세 부류의 인간상(像)을 보여줍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나, 그는 어떤 것에 박혀서 살아왔던 사람이었나? 그리고 지금은 어떤 상태인가? 
    저는 3주 동안 연속으로 세개의 십자가에 대해 말씀드릴려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무엇에 박혀서 살아가고 있는가, 세 개의 십자가 중 지금 나는 어디에 달려있는가?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는 묵상의 시간들이 되고자 합니다.

    오늘은 왼쪽(?) 편의 십자가를 생각하겠습니다. 
    사실, 왼쪽이라고 했지만 구원받은 강도가 오른쪽이고 버림받은 강도가 왼쪽이라는 말이 성경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최후 심판 때 구원자들은 오른편에, 심판받을 사람은 왼쪽에 세우셨기에 설교자들은 편이상 끝까지 구원을 거절한 강도를 왼쪽 강도다, 라고 말해왔습니다.

    1. 왼쪽 강도는 죄에 박혀 헤어나오지 못했습니다.

    당시 십자가는 최악의 흉악범들을 위한 사형수단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악질적이고 반인륜적인 도구는 없습니다. 사람을 나무에 매달아놓고 살인적 더위에, 들 짐승에, 들 까마귀떼에 살 한 점까지 다 뜯기도록 하는 처형도구는 인간 속에 잠겨있는 잔인성, 폭력성, 악마성을 보여줍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육체적 고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모든 형벌이 담겨져 있습니다. 벌거벗기고 조롱하고 침뱉고 때리고... 
    아무리 무자비한 살인마조차도 떠날 때에는 수의를 입히고, 땅 한평이라도 그의 몫으로 내 주고 그것도 안되면 화장해서 강에 뿌리든 흙위에 뿌리든... 마지막 길에 예의를 갖추는 것이 인간의 도리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형은 발가벗깁니다. 땅도 하늘도 그를 받아주지 않고 허공에 떠있는 버림받은 몸으로 세상을 추악하게 떠나갑니다. 세상 말로 표현한다면, 그야 말로 구천을 떠도는 영혼이 되어 살아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두고두고 한이 되고 수치가 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형틀입니다. 그러니 여간한 사람을 위해서는 십자가에 매달지 않습니다. 로마에 반역했거나 살인죄 등, 그냥 감옥에 가두거나 곱게 죽여서는 안되는 죄질이 나쁜 흉박범들을 위해 십자가 처형을 했습니다. 

    왼쪽 강도의 죄질(罪質)은 대단히 나빴습니다. 그가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나와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릴 정도라면, 십자가에 달려서도 무정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아서는 아주 악질입니다. 
    그의 죄로 보아 십자가에 달려 죽어도 무방했습니다. 누구든지 십자가에 달린 그 사람을 보면 동정심보다는 "싸다, 싸!" 하면서 십자가 처형을 공의로운 심판으로 인정할 만큼 죄와 함께 행동해 온 악한 사람입니다. 살아온 날들을 계산해볼 때 당연히 십자가 감이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죄에 박혀 살아오다가 오늘은 죄의 처리장인 십자가에 달려있습니다. 아무도 원망할 수 없는 자업자득입니다. 

    우리의 운명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의 삶은 죄에 박혔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와 허물로 죽은 너희를"이라고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무수한 죄악들, 티끌이 모여 산을 이루듯 죄의 티끌이 모여 산을 이룹니다. 죄성(罪性)이 강한 사람들은 더 큰 산을 이룰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죄에 박혀 살아갑니다. 
    바울 같은 이도 고백하기를, "내 속에 두 사람이 산다. 영으로 살아가려는 마음과 육신의 죄를 좋아하는 마음, 나는 영을 좇아 살아가고 싶지만 내 육신은 죄 쪽의 성향을 나타낸다. 아뿔싸! 나는 형편없는 사람이다!"라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죄에 박히지는 않았습니다. 죄에 끌려가기는 했고 자신도 모르게 나타나는 죄의 성향(性向)에 괴로워하기는 했어도 죄에 정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죄에게서 멀리 떠날려 애썼습니다.

    불량한 어떤 소녀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목사는 새 사람이 되겠다는 서약을 받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세례받은 이후에도 죄된 행동들을 계속하고 있다는 소문이 목사의 귀에까지 들렸습니다. 목사는 소녀를 방문하여 죄된 행동을 하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러자 소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예전에나 지금에나 죄를 짓고 있는 것은 사실이예요. 그러나 옛날에는 죄에 박혀 있었지만 지금은 죄에서 탈출 중입니다"

    우리는 죄에게서 완전히 떠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죄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죄의 모습으로 부끄럽기도 하지만 죄에 박힌 인생으로는 살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죄에 박혀 인생을 살면 하나님의 영원한 십자가에 못박힐 것입니다. 
    죄에게서 계속 탈출하십시오. 죄의 모양을 하나씩 버립시다. 하나님의 형벌은 우리에게서 멀어져 갈 것입니다.

    2. 한 강도는 십자가에 못박히지 못했습니다.

    한 강도에게 최후의 기회가 왔습니다. 그것은 최선의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는 그 기회는 행운이었습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어도 이제 예수님 앞에 나와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눈앞에 예수의 삶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원수들을 향해 용서하셨습니다. 효도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대속의 죄의 문제로 고뇌하셨습니다. 육신의 고통으로 몸부림치셨습니다. 아무도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 말씀하셨습니다. 영혼을 아버지 손에 의탁하셨습니다.

    왼쪽 강도는 예수님의 인격과 사랑과 위대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자신을 수신(修身)할 수 있는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지금까지는 어떻게 살았다 해도 하나님은 마지막 가는 삶에 예수님을 동행케 하셨습니다. 얼마나 귀한 축복입니까?

    우리 주변에서 훌륭한 인격자와 같이 살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입니다. 
    남을 위해 평생을 살아갔던 테레사 수녀와 같은 사람들, 장기려 박사 같은 이들, 한경직 목사님처럼 고고하셨던 목사님들... 그런 분들이 동시대에 살았고 아름다운 생애를 보고 살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인생에 큰 행운입니다. 
    우리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있고 교우들이 있으면 그들을 아끼며 그들에게서 좋은 것들을 배우며 살 수 있는 행운인 줄 알고 좋은 사람들의 인격과 명예를 지켜주며 감싸주며 배워가며 자신을 수신해 갈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좋은 기회들을 너무 많이 놓칩니다. 하나님께서 내 옆에 동행하게 해주신 좋은 사람들을 우리는 오히려 해끼치며 미워하며 모함하며 살아가버립니다.

    "우리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사람은 가까운 친구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도로시 딕스)

    왼쪽의 강도는 예수님의 인격과 행동을 보며 자신의 삶을 뉘우쳐야 합니다. 지난 날은 어떻게 살아왔어도 지금 예수님 앞에 나와서만은 그분의 삶에 감동을 받아야 하며 죄성(罪性)을 죽여야 합니다. 그러나 한 강도는 육신은 십자가에 못박혀 꼼짝 못하면서도 죄를 짓습니다. 
    물론 그는 손과 발로는 죄짓지 않았습니다. 살인하거나 도둑질하는 죄는 짓지 않습니다. 그는 입술로 죄를 짓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해 44절, 욕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욕설은 십자가 아래서의 손과 발로 저지른 범행보다 더 악하고 더 비정합니다. 
    지금 십자가 위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막 떠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손으로 그를 어루만지고 발로는 그를 업고서라도 위로해주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는 손과 발이 못박혀있습니다. 손과 발로는 선행을 할 수 없고 남을 위로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제 남아있는 것은 입 밖에 없습니다. 그 입을 통해 그는 마지막 자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자기처럼 불쌍한 사람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그 입술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마음대로 죄 지으며 살아왔습니다. 예수여, 나를 용서해 주소서"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입은 못박히지 않고 남아있습니다.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입은 남을 조롱하고 흉보고 비웃는, 십자가 위에서마저 죄짓는 추악한 입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은혜를 뿌리친 입술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있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못박혀야 하는 것이 손과 발이었다면 지금 이 마지막 길에는 입술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했습니다. 십자가에 박혀야 할 때 박히지 못했기에 그의 이름은 아쉬움과 후회와 버림받은 자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손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손을 갖고 있습니까? 탐욕의 손? 손가락질하는 손? 넘어뜨리는 손? 
    이제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내 자신에게도 물음을 던집니다. 
    "어떤 입술입니까? 가장 가까운 이웃들에게 어떤 입술입니까? 당신들처럼 상처받고 곤고함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어떤 입입니까?" 
    왼쪽 강도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예수님에게 고통을 더 안겨주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지 못한 나의 입술 때문에 사람들이 울고 있습니다.

    고난절이 다가올 때마다 예수 십자가 생각하며 괜히 센치하지 마십시오. 그 신앙이 바로 머리만 키우는 관념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감성적인 추억을 원하시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삶을 원하시며 실천을 원하십니다. 십자가 생각할 때마다 십자가에 못박히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입술이 십자가에 못박히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입술이 십자가에 못박히지 못할 때 그 입술은 남의 가슴에 아픔을 줄 것이고 그만큼 우리는 자신의 인격을 하나하나 허물어 가고 결국은 외롭고 부끄러운 날이 올 것입니다. 제발 십자가에 못박히십시오.

    3. 왼쪽 강도는 지옥에 영원히 박힐 것입니다.

    왼쪽 강도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는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은 영벌(永罰)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한번 박힌 지옥은 헤어나올 길이 없습니다. 그 문을 열 사람이 없으며 그 안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간다 했습니다. 
    왼쪽의 강도. 그에게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죽음을 모면할 길이 없습니다. 한번 십자가에 박혔기에 죽어서야 내려오게 될 것입니다. 
    그에게도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강도는 그 기회를 놓쳤습니다. 성령님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그에게 권고하셨지만 그는 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옥에 영원히 못박혀버렸습니다. 예수님 왼쪽에 서 있는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는 심판의 십자가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자기의 생애로 심판받습니다. 죽으면 내가 왜 이렇게 오래 살며 이 많은 죄를 지었나, 탄식하게 될 것입니다. 많이 산만큼 죄도 많이 지었기에 심판도 클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은 일대일로 설 것입니다. 아무도 우리의 변호사가 되어주지 못합니다.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은 나와 상관없는 분으로 계십니다. 
    "내가 저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어요" 
    "저 사람은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외로울 때 힘이 되어주었어요" 
    그러나 지옥에서는 아무도 우리의 선행을 기억해 주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고발할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괴롭혔어요. 자 사람의 말의 화살로 내가 이렇게 상처받았어요" 
    그 말을 들을 때 얼마나 후회가 되고 두려움에 떨것입니까?

    우리에게는 아직도 기회가 있습니다. 생명이 있을 동안에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언제 그 생명이 끝날지 모릅니다. 살아있을 때에 죄에서 우리의 못이 빠져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정과 욕심을, 특히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 입술이 못 박혀야 합니다. 특히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입의 저주를 삼가야 할 것입니다. 
    세상 십자가에 박혀 살아가는 사람들은 허무하게 끝날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부질 없는 것에 너무 마음을 주고 생각을 주고 살아왔음을 탄식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박혀 살아간 사람들은 천국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입니다.

     

    < 결 론 >

    얼마 전에 석방된 장기수들을 보며 어디에 박힌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사상에 박혔기에, 평생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그 사상이 정말 일생과 가족을 버려가며 박혀있을만한 가치가 있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그만도 못합니다. 평생을 자신의 아집에 박혀 꼼짝도 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과 명예에 박혀 인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왕 박힐 십자가라면,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남을 위한 대속적 사역에 당당히 박혀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선 자리를 돌아보십시오. 
    우리는 지금 어디에 박혀있습니까? 어느 쪽에 박혀있습니까? 
    이제 자리를 옮기십시오. 
    다른 한쪽으로 옮기십시오. 같이 욕하다가 입술의 자리를 이동하여 "나를 용서하소서,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라고 외쳤던 그 구원의 자리로 옮겨가십시오. 여러분은 구원받을 것입니다. 아직도 기회는 있습니다.

    다시 한번 묻습니다. 
    "당신은 어느 쪽에 박혀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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