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마27:38-44)
  • 2013.06.03 21:29:12
  •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이러한 재미있는 우화가 있습니다. 생쥐 한마리가 있었습니다. 이 생쥐는 항상 '발발' 떨며 살았습니다. 왜냐하면은 고양이가 무서워서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어딜 가도 고양이가 나타나고 또 저기에 가도 고양이가 나타나는 것 같고 눈을 감아도 고양이 꿈을 꿉니다. 도저히 견딜수가 없어서 발발 떨다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더랍니다. "하나님 난 고양이가 무서워 못살겠는데 어떻게 좀 나를 고양이로 만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긍율히 여기셔서 고양이로 만들어 주었답니다. 그러면은 기뻐하고 당당해야 되겠는데 또 발발 떱니다. 무서워서 견딜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너는 또 왜 이렇게 두려워 하느냐?" 했더니 개가 무서워서 못 살겠습니다. "어딜가나 개가 '멍멍'거리고 따라다니는데 못살겠다"고... "그래 그러면 내가 개로 만들어 주마." 개가 된 이 생쥐는 또 무서워서 벌벌 떨고 도대체가 구멍에서 나오지를 못합니다. "너 또 이렇게 개가 됐는데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했더니, "호랑이가 무서워서 못살겠다"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애야, 내가 아무리 애써도 네 마음이 생쥐라면 아무 소용도 없겠구나. 뭐 벌벌 떨바에야, 다시 생쥐로 돌아가라” 그래 다시 생쥐가 되었더래요. 여러분, 마음의 변화가 없으면 외적 조건이 아무리 달라진다고 해도 그 매한가지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모든 책임을 환경에 돌리려고 합니다. "환경이 이렇기 때문에 내가 이렇다. 저가 이렇기 때문에 내가 이렇다." 라고 말합니다만은 환경과 처지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라 말입니다. 변화가 바뀌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내 마음도, 내 성격도, 내 인격도, 달라 질것이라고 말합니다만은, 이것은 잘못된 인간의 아주 원초적 변명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부부싸움을 할 때, 남편이 화를 벌컥 벌컥 내니까 "여보 당신 왜 이렇게 자꾸 큰 소리를 내는 거요?" 하니까 남편 하는말이“난 원래 안 그랬는데 너하고 살면서 이렇게 나빠졌다” 이런 사람은 참 힘든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 돼요. 어떤 변화가 바꾸어지기를 바랍니다. 환경과 나 어느쪽이 먼저입니까? 내가 환경을 바꾸는 것입니까? 환경이 나를 이렇게 만드는 것입니까? 때로는 우리가 욕망에 대해서도 이 끝없는 욕망, 욕망이 채워지면 될 것이라고 전제 합니다. 그래서 집없는 사람은 집이 있으면, 병든 사람은 건강만 있으면, 또 직업이 없는 사람은 직업만 있으면, 아무 소원도 없을 거라고 말은 합니다만은 그저 뭐 그것 주어 줘도 마찬가지에요. 욕심은 점점 더 커져요. 그 채울 수 없는 끝없는 욕망에 사로 잡혀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근본적으로 이 욕망의 문제를 완전히 제어하고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물질로도 출세로도, 명예로도, 그는 절대로 평안할 수 없습니다. 자, 이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밖에서 오는 변화 이건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이런 것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밖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이런 큰 역사 이 속에서 특별한 기적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굴을 이렇게 들어다 보면 긴 굴 저 끝에 구멍이 조그만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그와 같이 내가 생각하는 세계를 요렇게 꼭 굴을 들여다보듯이 보고 거기에다 맞추어달라는 거에요. 여기에 맞지 않는 것은 뭐든지 내가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바로 그러한 내 방식, 내 방법대로, 내 세계관 안에서 하나님의 세계를 이해하겠다고 고집을 부리게 됩니다. 기적은 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모든 것이 기적입니다. 기적 아닌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기적이 없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하면 믿겠노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십자가 밑에서 소리 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다 못박아 놓고 자기들이 말이요, 자기들이 못박아 놓고는 하는 말이 "뛰어내리라. 거기에서 덜렁 뛰어내려 그러면 믿겠노라." 그렇습니까? 정말 믿을까요? 저는 어떤 분을 한 분 아는데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사랑해요. 병원에 한번 가보니까 그 며느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라요. 그런데 이 시아버지는 예수를 안믿어요. 그 며느리는 예수 믿는데 지금 죽어가는 며느리를 놓고요. 그 시아버지가 하는말이 "얘가 기도해서 병이 낳고 얘가 다시 건강을 회복할 수만 있다면, 그 다음에 나는 예수 믿겠습니다." 뭐 그러더라구요. 정말 기적적으로 그 며느리가 건강을 회복했어요. 그 영감탱이 교회 안나왔어요. 마찬가지더라구요. 그렇게 장담을 해놓고, 큰 소리 해놓고, 나하고 약속했는데..... 그러니까 마찬가지에요. 마찬가지입니다. 자, 오늘 십자가 밑에서 소리 지르는 사람 보세요.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놓고는 " 뛰어내려! 뛰어내리면 믿겠노라" 누구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겠노라. 당신이 하나님이기를 믿겠노라." 이런 얘기지요. 그러나 이것은 허구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병자를 고쳤지요. 장님의 눈을 뜨게 했지요. 그리고 죽은 자를 살렸지요. 5천명을 먹였지요. 예수님의 생애는 온통 이적과 기사로 충분합니다만은 바리세인 교인과 서기관들 끈질기게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면서 괴롭힌게 뭡니까? 하늘로 부터 오는 표적을 보이라. 표적을 보이라. 또 다른 표적, 지금 보인 것 말고, 또 다른 뭐 좀 화근한 뭔가 좀 천지개벽같은 좀 기가 찬 기적을 보이라고 추구합니다. 재촉합니다. 예수님 바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친 것 같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것이 없도다." 거기에 암시 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요나가 고래 뱃속에 사흘 동안 있었지요.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내가 죽고 사흘만에 부활 할 것이다. 이 부활 사건외에는 아무 표적도 더 보일것이 없다. 그 완악한 무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결국은 기적에 대한 기적을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기적을 잊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기적을 기적으로 받아들이는 수용성이 필요합니다. 기적을 해석하는 해석 능력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건강만이 기적이 아니에요. 병드는 것도 기적이에요. 안되던 사업이 잘되는 것만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멀쩡하던 사업이 무너지는 것도 기적이에요. 문제는 '그 기적, 그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해석능력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아마도 기적중에 가장 큰 기적은 모름지기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기적이에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이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가장 우주적 기적이요. 대표적 기적입니다. 그리고 임마누엘이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는 이보다도 더 큰 기적이 없어요. 또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 알고보면 십자가 지시는 것 자체가 기적이요. 왜 예수가 죽어야 합니까? 이보다도 더 큰 기적이 없어요. 가장 결정적 기적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기적입니다. 예수님 심히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한 알이 떨어져 썩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말씀하실 때 예수님 뭘 생각했습니까? 내가 죽어야 열매를 맺느리라. 이 길외에 다른 길이 없음을 예수님 말씀 하십니다. 저는 오래전에 시카고 대학에 강연하러 갔을때, 잠깐 쉬는 시간에 친구하고 같이 박물관을 방문해 보았습니다. 마침 거기에서 이집트에서 가져온 미라를 특별 전시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거기에 좋은 것을 보았습니다. 미라를 많이 보았습니다만은 미라를 해부해 놓은 것은 본 일이 없습니다. 3천년된 미라를 쪼개서 해부해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미라에 들어있는 사람은 불쌍하다고 생각했어요. 꼭 그저 북어 같아요. 북어 바짝 말려가지고 말이에요. 그게 뭐 남아 있으면 뭐하고 썩어 있으면 뭐 하겠습니까? 차라리 불태워버리는 것만 못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그 미라를 보는데, 거기서 들은 얘기는 아닙니만은 거기서 생각난 것입니다. 오래전에 TIME지에서 읽었습니다. 3천년전 미라를 해부했더니 그 미라의 손에 밀알 몇 알이 있었답니다. 신기하게 생각해서 그 밀알을 소중하게 땅에다가 심어보았더니 싹이 나더랍니다. 믿거나 말거나 입니다. 책에 있는 내용이니 그대로 믿어 봅시다. 여기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믿알이 죽은 사람의 손에 들려 있으니까 3천년이 가도 그대로 있습니다. 이것이 땅속에 들어가서 썩어야 죽어야 싹이 나고 열매가 맺혀요. 이 중요한 이치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요새 우리는 개혁을 원합니다. 새로움을 원하고 새로운 변화를 요구합니다. 옛것의 죽음, 옛 가치관의 매장, 완전히 죽어야 사는 역사가 있어요. 바득바득 안죽으려고 하니까 되는 일이 없어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새로운 변화란 바로 이 죽음에서 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밀알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날 거기에서 싹이 나는 거에요. 그것이 아니면 한 알 그대로 있다. 얼마나 기쁜말씀입니까? 오늘 본문에는 대단히 중요한 만남의 관계가 있습니다. 보세요. 바로 이 십자가를 지시는 이 장면속에 예수님 계시고 예수님 옆에 강도가 있습니다. 참 대조적이지요. 예수님하고 강도가 가지런히 만납니다. 또 이야기도 합니다. 죽어가면서 이야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입니다. 아주 극적인 만남이요. 믿음과 불신앙의 만남입니다. 특별히 사랑과 증오의 만남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극치요. 바로 예수를 죽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증오의 극치입니다. 세상에 사람을 이렇게 미워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이렇게 악해질수 있습니까? 극단적인 악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인간적 이성의 만남입니다. 보세요. 신앙의 사건으로 볼 때는 엄청난 구원의 사건이요. 합리적 사건이요. 그러나 불신앙적 이성으로 볼때는 저들의 외침에 일리가 있습니다. "뛰어내려! 그러면 믿으리라. 십자가에서 뛰어내려! 그러면 믿으리라." 가장 똑똑한 말 같은데 이것은 가장 어리석은 말입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사람들은 이만큼 잔악하다는 것입니다. 철학자이며 저명한 저널리스트인 '알렝 핑킹 그라운트'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쓴 책에 '잃어버린 인간성'이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 주제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동물과 사람을 구별할라고 합니다. 이것은 동물적인 것이요, 이것은 인간적인 것이다. 이것은 동물이고 이것은 사람이라고 말하지만은 이상하게도 사람은 동물만 못하다. 왜냐하면은 사람은 유독히 자기 같은 동족인데, 같은 종자인데, 같은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 하지 않는다. 그것이 동물에 없는 인간만이 가지는 악이라는 것이에요. 보세요. 고양이는 고양이를 대할때 고양이로만 대합니다. 고양이를 쥐로 대하지도 않고 고양이를 개로 대하지도 않습니다. 각각 모든 동물은 같은 동족은 꼭 같이 대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렇게 같은 사람인데도 사람을 죽입니다. 아프리카에 가서 선교하는 선교사님이 계셨는데 거기에 있는 식인종 추장과 같이 앉아서 얘기를 하는데 마침 오래전에 나온 신문이 있었습니다. 그 신문을 보면서 선교사가 걱정을 했습니다. 전쟁이 났습니다. 구라파에 전쟁이 났는데, 1차대전이 났는데,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많은 사람을 죽인다고, 걱정을 하니까 그 식인종 추장이 묻기를 "몇 사람이나 죽었어요? 열 사람 죽었어요?" "아니요." "백사람 죽었어요?" "아니요." "천사람 죽었어요?" "아니요." "그 참 이상하구만. 사람의 고기도 안먹는다면서 왜 이렇게 많이 죽이노?" 식인종 추장이 이해를 못하더라는 겁니다. 맞아죠. 사람의 고기도 안 먹으면서 왜 이렇게 사람을 많이 죽여요. 그 식인종 만큼도 못 한거에요. 왜 동물만도 못한거요? 동물 가운데는 적어도 자기 동족을 죽이지 않아요. 동족을 잡아 먹지 않아요. 우리 사람은 이상하게도 서로를 같은 인간 대접을 하지 않아요. 이렇게 죽여요. 나찌때 보면은 육백만이나 되는 사람을 죽여요. 오늘도 남을 죽이고 그렇게 잔악해요. 오늘 본문에 보는데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어요. 그리고 그 앞에서 소리를 지릅니다. 뛰어내리라고 못 박아 놓고 무슨 짓입니까? 계속 이같이 모욕을 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놓은 것은 육체적 고통입니다만은, 모욕과, 희롱과, 욕과, 조롱, 이 조롱은 정신적 고통이에요. 십자가에 못 박고 죽이면서 그를 계속 짖밟는 거에요. 존재차원에서 그를 짖밟아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나님의 아들이면 뛰어내리라!" 또 그의 능력을 희롱합니다. 남을 구원하고 많은 이적을 행하고 뭐 어쩌고 어쩌고 하면서 "어디 한 번 더 이적을 해봐라. 뛰어내려!" 그건 능력을 비방하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는 관계를 또 비방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며 어디 하나님이 구원하시나 보자. 하나님이 네 편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너를 버렸느냐?" 이러고 또 비난을 합니다. 이 많은 저주와 이 모욕 그리고 조롱 이 속에서 본문을 보세요. 예수님은 조용히 끝까지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인내하시고, 이해하시고 믿습니다. 보세요. "하나님, 저들의 죄를 사해 주시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상에서 맨 처음 하신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이 완악한, 이 엄청난 죄인들을 아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러면서 그대로 십자가에 죽어갑니다. 이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있습니까? 예수님도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마귀가 와서 시험할때의 얘기와 똑같은 얘기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해 먹어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성전에서 뛰어내려라. 그러면 믿겠노라." 오늘도 자기 나름의 조건을 만들어 놓고 "이것이 이루어지면, 내 뜻대로 되면 그러면 믿겠노라."고 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무서운 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도 엄청난 사랑의 계시가 있고, 큰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지혜가 여기 있습니다만은 사람들은 이렇게 끝끝내 하나님 앞에 대들고 있습니다. 그러면 믿겠노라고요. 여러분 잘 아는 유명한 독일에 작곡가 '멘델스존'이 있습니다. 그 '멘델스존'의 할아버지가 '모세 멘델스존'인데 이 '모세 멘델스존'은 키가 작고 꼽추였다고 합니다. 꼽사등이에요. 그런데 어느날 돈 많은 장사하는 집에 상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갔었는데 그 집에 딸 하나가 있는데 '프롬체' 라는 딸을 보는 순간 너무너무이뻐서 그만 순간적으로 사랑에 빠집니다. 참을수가 없어서 그의 방에 조용히 들어갔습니다. 물론 그 아가씨는 본체도 하지 않습니다. 말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용기를 내서 이렇게 물어봤다는 것입니다. "아가씨, 아가씨는 결혼 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 부부관계를 이렇게 하나님이 맺어주신다고 하나님의 뜻을 믿습니까? " 그러니까 "믿고 말고요. 당신은요.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요?" "저요? 저는 물론 믿지요. 
    그런데 이런 일이 있습니다. 내가 어느때 환상에서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예쁜 아가씨를 소개하면서 '이 여자와 네가 앞으로 살아야 되겠는데 그런데 이제 태어날때는 네가 한 평생 사랑해야 할 여자는 꼽추로 태어날 것이다. 너는 꼽추와 살아야 할 것이다.'는 것입니다. 그 모세는 대답하기를 '아니올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꼽추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정 그러시다면 내가 꼽추가 되겠습니다. 내가 되신 꼽추가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러면 네가 꼽추가 되라.' 그래서 내가 꼽추가 된것입니다." 그 때에 이 '프롬체'가 "그렇게 아름다운 사랑을 마음에 가지고 있느냐?"고 그래서 감동이 되어서 결혼했데요. 그렇답니다. 여러분, 내가 대신 꼽추가 되겠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지금 우리를 구원 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다. 엄청난 사건 앞에 이들이 이렇게 소리를 지를 수 있는 것입니까? 사랑은 참는 것이요. 능력을 받는 것이요. 십자가요. 그리고 부활이 있는 것이요. 믿는자의 마음으로 십자가를 쳐다본다면 이것이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나 자신을 위한 것인데 오직 감사와, 감격외에 다른 무슨 생각이 있겠습니까? 여기서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렇습니다. 나를 위한 십자가요. 내 자신을 위한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그 사랑의 엄청난 계시 앞에 전혀 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맙시다. 이대로 사랑으로 받고, 이대로 감사· 감격하고,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하여 사랑과 믿음으로 응답하는 그런 생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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