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 개의 십자가(마27:38)
  • 2013.06.03 21:30:00
  • < 서 론 >

    예수님은 이번 주 목요일에 체포당하시고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십니다. 인류의 성인 중 십자가의 처형이라는 무서운 형틀로 세상을 떠난 사람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며 그분의 죽으심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여기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이제 성찬예식을 하려고 합니다. 성찬예식은 단순히 예수님의 제삿날이 아닙니다. 이 소강단에 떡과 포도주잔을 올려놓았다고 하여 기독교식의 예수님 제사를 드린다 생각하면 그분께서 제정해 놓으신 이 예식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성찬예식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 십자가의 의미들을 되새겨보는 것입니다. 
    성찬예식은 예수님의 그 거룩한 정신으로 우리를 회귀(回歸)시켜 주는 것입니다. 
    성찬예식은 우리 속에 있는 거룩한 영을 분발시켜 육신의 소욕을 물리치고 거룩한 성령의 소욕을 좇아가도록 힘을 북돋아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예식을 단순히 예수님의 고난, 고통 쪽으로만 생각하고 눈물짖는 종교적 감동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성찬예식은 값싼 눈물이 아니라 주님의 고귀한 삶과 정신을 이어가려는 굳은 결의, 주먹 불끈쥐고 입술을 깨무는 새로운 각오와 헌신을 필요로 합니다. 


    1. 예수님은 강도의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태어나실 때 마굿간에서 출생하셨습니다. 마굿간은 냄새나고 소란스럽고 춥고 더러운 짐승들의 거처입니다. 예수님은 짐승에게나 해당될 대접을 받으셨습니다. 창조주이신 그분이 세상에 오실 때 정작 그에게는 짐승의 거처가 제공되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33년을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습니다. 그분을 인정하고 따르는 사람들은 제자 그룹과 여제자 그룹의 소수였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별 영향력을 갖고 있지 못한 천민들이었습니다. 소외계층들만이 예수님을 대접했습니다.

    고난주간, 성례식에서 정말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야 될 이는 로마 가톨릭의 성직자들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전 세계를 여행하고 가는 곳마다 살아있는 신(神)처럼 추앙받는 교황이 먼저 황금빛나는 관을 벗고 사람들의 눈을 홀리게 하는 그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고 하나님의 유일한 대리인인 것처럼 행세하는 그 지팡이를 던지고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마차 한번 제대로 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교황은 예수의 후계자로 자처하면서 전용비행기로 세계 각국마다 돌아다니며 온갖 찬사와 영광을 홀로 다 받고 있습니다. 
    정말 이 고난 주간에 예수님의 생애와 그분이 받으셨던 고난을 생각하면서 낮아지고 송구스러운 마음을 가져야 하는 사람은 바로 교황을 비롯한 가톨릭의 고위성직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마굿간의 대접을 생각하면서 그분의 가난하고 외로운 삶을 본받아야 할 사람은 평신도들인 여러분들이기 전에 바로 교회의 목사인 저요,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입니다. 
    지난 주간에 대심방을 했습니다. 모두들 피곤하고 수고한다 했지만 가는 곳마다 분에 넘치는 대접과 환영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덕분에 이런 대접을 받으면서도 그 사실을 잊어버릴 때가 많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만찬을 앞에 놓고 우리 주님의 걸으셨던 그 배척의 생애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환영받지 못하고 대접받지 못한다 해도 예수님을 생각함으로 참아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33년 동안 대접받지 못하셨다가 지금 죽음 직전에서는 강도로 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좌우편에 강도 두 사람이 함께 달려있습니다. 십자가는 강도나 반역자들이 달려있기에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 그들의 신분을 알길이 없는 사람들은 대부분 강도이겠거니,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강도 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런 일로 한번이라도 자존심 상해하거나 불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털깍는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 양처럼 수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매하신 인격과 순종, 겸손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형에 분노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도록 사주했던 대제사장들, 관리들, 유다, 그리고 제자들마저 욕하며 비난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희생, 겸손을 거절합니다. 그러기에 자꾸 입으로만의 예수님 찬양이 나오고 삶에서는 예수님을 뿌리치는 이중적인 행동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강도 취급을 받으면서도 아무 저항도 불평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사소한 일에 너무 반응이 거셉니다. 조그만한 일도 참지 못하고 대응하며 함께 싸우려 들며 하찮은 말에도 자존심이 상해서 펄펄 뜁니다. 
    요즈음 크리스찬들은 왜 이리도 팔짝팔짝 뛰는 사람들이 많은지요. 그만큼 설익은 신자들이 많다는 것이겠지요. 
    강도 취급을 받으면서도 침묵지켰던 예수님의 그 모습을 이 시간 본받으려 할 때 우리가 나누는 이 떡과 포도주는 영혼의 양식이 될 것입니다. 


    2. 십자가의 못은 영원한 박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못박히셨습니다. 그의 손에 대못이, 발에도 대못으로 박혔습니다. 
    기독신문에 광고가 하나 나왔어요. 
    예수님의 손과 발을 십자가에 박았던 그 실물크기의 못을 제작해서 판다는 거예요. 광고문안을 보니 `십자가의 못'은 길이가 18cm, 무게가 140g에 이르는 차가운 쇳덩이었다고 합니다. 보기에도 섬뜩한 이 못은 못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작은 창'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이걸 제작해서 개당 4000원씩 판다는거예요. 그만하면 장삿술도 좋아요. 
    18cm면 얼마나 큽니까? 이만하겠지요? 
    이만한 못으로 손과 발을 박혔으니 이제 박힌 사람의 인생은 끝난 것입니다. 이후의 삶은 십자가와 함께 끝납니다. 
    못박힘은 그 십자가에서 죽임을 의미하며 십자가만이 그의 세상의 전부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이들은 더 이상의 세상이 없습니다. 오직 그 안에서 살아야 하고 그 안에서 삶을 마감해야 합니다. 
    지난 세월,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던지 관계없이 그는 이제 십자가 위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 안에서 부서지고 녹아지고 못에서 흘러나오는 녹물로 썩어져 가야 합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못이 있습니까? 한번 그 분에게 못박혔으면 생애가 박혀야 하는 데 너무 자주 우리는 십자가에서 달아납니다. 
    이제 떡과 포도주를 대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아직도 느슨하게 달려있는 부분이 어떤 것입니까? 
    우리의 입입니까? 입은 너무도 자주 십자가에서 달아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마음입니까? 마음은 너무 자주 무너지고 육신으로 세상의 정욕으로 자꾸 달아나려합니까? 
    우리의 눈입니까? 눈은 세상의 화려한 것들에 취해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더 큰 못을 주십시오. 더 큰 대못을 주십시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게 하십시오"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는 죽어감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와 함께 육신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하고 죽어가갸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시고 그분이 말씀하시고 그분이 행동하도록 자리를 내드려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그게 그들 세상의 전부입니다. 그들에게는 십자가 외에는 더 이상의 생활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십자가의 고통을 잘 감당할까?' 십자가와 자신의 삶은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항상 십자가 위에서의 자신을 생각합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우리는 너무 자주 세상을 바라보며 사모합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죽으려 하지 않습니다. 
    교회 나올 때는 죽었던 사람들이 오히려 믿으면 믿을 수록 바짝 더 살아납니다. 겸손했던 사람들이 직분을 받을 수록 더 바짝 혈기가 살아나고 고집불통들이 됩니다. 
    이것은 예수와 함께 죽는게 아니라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길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만찬의 예식을 통해 주님과 함께 죽고 죽어가는 의식을 치루어내야 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사명과 사랑 때문에 내려오지 못했습니다.

    십자가 아래에 있는 원수들이 조롱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고 자신의 정체를 증명해 보라는 것입니다. 옆에 함께 달렸던 강도들도 같이 야유합니다. 
    그것은 육신의 고통만치나 괴로운 것입니다. 강도 같이 취급하여 두 강도의 중앙에 세워서 온갖 조롱을 다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왜요? 능력이 없어서 못 내려오셨을까요?

    예수님은 아직도 하나님의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그분은 나사로를 죽음에서 끌어내신 분이십니다. 38된 앉은뱅이도 일으켜 세우신 분이십니다. 반신불수의 굳어져 버린 손도 펴게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러한 분이시거늘 비록 작은 창에 가깝다고는 해도 이 못을 뺄만한 능력이 그분에게 없으셨을까요? 그분의 능력마저 십자가의 못은 박아버렸을까요? 그래서 능력이 없거나 십자가의 못에 깊이 박혀서 못내려 오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을 나무 십자가에 달려있도록 한 것은 대못이 아니라 사명감, 구원의 사명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왜 오셨습니까? 
    세상을 구원하려 오셨습니다. 그분은 본래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셨지만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짐승 취급을 받으시고 그의 동족들은 그를 수없이 비난했고 공격했고 훼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없이 그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그의 사명의 길을 완성하시기 위함입니다. 어떠한 조롱도 훼방도 그의 사명을 막지를 못했습니다. 
    그분이 지금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와 버린다면 그 모욕을 견디지못해 천군천사들을 부르신다면 주님은 인류구원이라는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그 어떤 것보다 강합니다. 우리의 직분은 그 어떤 것보다 우선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힘들거나 짐을 벗어던지고 싶을 때가 있더라도 우리의 사명을 생각하고 교회 안에서의 직분을 생각함으로 참아야 하며 견디어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가 오고 성숙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는 것은 사명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모든 원수마저도 사랑하려고 하셨던 그 사랑이 나무 십자가에서 못내려오도록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 모욕 가운에서 견디도록 한 것은 못이 아닙니다. 그 못보다 더 강한 사랑의 못이 십자가에 달려있도록 했습니다. 사랑의 못은 그 어떤 못보다 강합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사람들 때문에 고통당하는 일을 듣습니다. 
    구역장들 가운데는 구역원들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면려회장들은 협조해주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힘들어 합니다. 교육부서장들은 교사들로 인해 괴로워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받은 사명과 직분 때문에 별의별 소리를 들어도 참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도 웃으며 대할려고 합니다. 
    그들이 참는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명 때문에, 사랑 때문에 참습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도 별의별 소리를 다 듣습니다. 
    어떤 소리들은 `정말 저 분들이 나를 목사로, 영적인 지도자로 인정하고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만큼 나를 노엽게 하고 가슴을 멍들게 합니다. 
    이번 주일 교회에서 만나면 그만 두지 않으리라, 어떤 경우에는 주일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전화기를 들고 야단치려 합니다. 
    그러나 참습니다. 주님을 생각하며 참습니다. 그 사람들을 생각하며 참습니다. 내가 자주 성을 내는 사람도 아니고 직접 대놓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아닌데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얼마나 당황하고 힘들어할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 때문에,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 때문에 나는 자신을 다시 한번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내가 성질이 없어서가 아니고 교회 사임을 두려워해서가 아닙니다. 그 사명과 사랑이 나를 십자가에 마음과 입술과 전화기를 들려던 손마저 못박게 합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구역장과 부장과 회장들, 그리고 강 목사의 마음 속에 있는 사랑의 못의 크기를 알아야 합니다. 사랑의 못의 능력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여러분들은 허구헌날 어린아이들에 불과할 것입니다.

     

    <결 론 >

    오늘 우리는 성찬예식을 갖습니다. 
    단순히 2천 년 전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생각하며 눈물의 감상에 좆으려고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희생적인 삶과 인격과 정신. 
    바로 그것을 다시 한번 보기 위해 여기에 모였습니다. 그분의 거울에 우리 자신의 길을 비춰보기 위해 여기에 모였습니다. 
    예수님은 강도로 취급을 받았지만 그 모욕을 말없이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못은 너무 커서 어떠한 비난과 조롱에도 그분을 십자가에 달리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그 어떤 감정보다도 커야합니다. 우리의 사랑의 못은 그 어떤 미움보다도 크게 자라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성찬예식에 참석한 모든 분들 위에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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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시리즈 2013.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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