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지 3시간쯤 지났을 때입니다. 갑자가 골고다 언덕을 어둠이 삼키기 시작했습니다. 해가 그 빛을 잃었습니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깜깜하게 되었습니다. 심판과 저주 그리고 고통과 죽음의 빛깔이 하늘로부터 땅에 뒤덮입니다. 그리고 또 3시간이 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걸머진 채 6시간쯤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시간이었습니다. 절규하는 몇 어절의 음성이 골고다 언덕을 뒤흔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어찌나 그 음성이 마음을 뒤흔들었는지 48절을 보시면 긍휼의 끝자락이라고 가지고 있던 어떤 한 사람이 스펀지와 같은 해융에 신포도주를 적셔 갈대에 끼워 고통을 덜어주려고 합니다.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골고다 언덕을 메아리 치는 그 절규는 불쌍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여섯 시간이나 지나서 이제는 입을 열어 신음조차 내기 어려운 형편이었을 텐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는 이 음성은 벼락과도 같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고난주간을 시작하는 첫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설교 후에는 성찬식이 있습니다. 조금 있다가 주님의 살인 떡과 주님의 피인 포도주를 여러분의 손으로 직접 받게 되는데 그 떡과 포도주에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는 이 절규가 배어 있는 것을 아십니까?
이 절규는 단순한 고통을 호소하는 음성이 아닙니다. 그리고 긍휼의 감성을 자극하게 하여 눈물 흘리게 하는 신파조의 호소가 아닙니다. 인류 전체가 죄악과 불의로 인하여 심판과 저주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무섭습니다. 절대로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무서운 심판과 저주가 예수님께 쏟아진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가장 필요한 시간임에도 부루구하고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 버림받은 데에 대한 절대 고독으로 나타났고 무겁고 처절한 고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2-6)"
우리가 함께 나누는 이 떡에 그리고 포도주에 주님의 찔림이 있고, 주님의 상함이 있고, 주님의 멸시 당함이 있고, 주님의 질고가 있고, 주님께 내려진 징벌이 있고 주님께 가해진 살을 후벼파는 채찍이 있습니다. 주님이 담당하신 이 고통의 십자가를 성경은 한 마디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성찬예전에 대하여 말씀하는 중 27절 이하에서 매우 중요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 말씀을 어떤 분들은 죄 지은 사람들은 성찬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해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당시 헬라 세계 사람들에게는 연회가 있었습니다. 술을 마시고 떠들고 음식을 나누는 세속적인 잔치입니다. 성찬은 이런 잔치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성찬을 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감사하지도 않고 경외하지도 않으며 형제와 자매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도 없이 참여하는 것을 막는 말씀입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기억과 감사가 없는 자세를 꾸짖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주의 성찬에 참여합니다.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감사가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구원하심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우리 안에 있는 주 앞에 부끄러운 모습들을 발견하십니까? 아멘 하실 수 있다면 여러분 성찬에 참예할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참회의 마음이야말로 성찬에 가장 합당한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야말로 성찬을 대하는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입니다.
지난 주 우리 교회는 헌혈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함께 참여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도 헌혈을 하려고 가보니 이미 집사님 한 분이 헌혈을 시작했었습니다. 그래서 다음에 그 뒤에 누워 헌혈을 시작했는데 집사님께서 헌혈하시는 것 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래서 간호사에게 물었더니 혈관이 굵은 편이고 혈액순환이 잘되고 있어서 랍니다. 그래서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저는 팔뚝이 굵은 사람이 아니라 핏줄 굵은 사람입니다.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의 목표는 인기 있는 목사가 아닙니다. 큰 교회를 목양하는 목사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유능하다고 인정받는 목사가 아닙니다. 이런 목회를 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목표는 아닙니다. 신앙이 건강해서 신앙의 심장이 강력한 펌프질을 하고 신앙의 혈관 속에 예수의 피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목사가 되길 원합니다 제 살이 제 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주님 보시기에 내 의지대로 내 고집으로 목회 하는 목회자가 아니라 겸허하게 엎드려 주의 뜻을 구하는 자세를 평생 잃지 않는 목회자가 되길 원합니다.
저는 헌혈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 몸이 건강하듯 제 신앙이 건강하게 해 주시고 신앙적 신진대사가 활발하게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제 몸은 시간이 지나면 후패해지겠지만 신앙의 건강은 오히려 더욱 젊어 가게 해 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혈관에 무엇이 흐르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까? 혈액 순환이 잘 되어서 건강한 몸을 가진 자처럼 여러분의 신앙이 건강합니까? 오늘 성찬을 통하여 여러분 심령 안에 참다운 참회가 일어나길 바라고 신앙적 신진대사가 잘 되어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으시는 역사가 일어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이 절규는 패배자의 처참한 절규만은 아닙니다. 이 절규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이미 죽음 안에 생명을 두셨습니다. 부활을 예비하셨습니다. 우리는 성찬을 통해 다른 사람의 죄를 걸머지고 죽음을 당하는 숭고한 희생을 깨닫습니다. 동시에 영원히 빼앗기지 않는 생명있음을 감사하게 됩니다.
주님의 떡과 주님의 잔을 받으면서 예수님의 처절한 죽음에 대한 연민과 그것이 나 때문에 일어났다고 하는 죄책감으로만 눈물 흘린다면 이것은 잘못입니다. 그것 때문만이 아니라 심판대에 서서 저주받아야 마땅한 우리를 하나님의 생명을 얻고, 천국잔치의 주인공이 되게 하셨다고 하는 이 감격 때문에 눈물 흘리는 것입니다. 성찬의 자리는 죽음을 이기는 자리입니다. 하늘의 소망을 간직하는 자리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음 안에 가두어 놓으려 했지만 그 죽음이 예수님을 삼키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여러분 안에 아무리 어려운 시련과 고통이 있다할지라도 성찬을 대할 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결코 이 어려움과 시련과 고통 앞에 패배하지 않으리라. 부활의 고백과 확신 안에서 참 승리를 또한 확신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찬을 나누는 이 아침에 주님의 살과 피를 통하여 참다운 회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찬을 나누는 이 아침에 참 그리스도인에게는 패배를 딛고 일어서는 참 다운 승리가 있음을 확신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참된 복의 생명잔치의 주인공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