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들을 버리신 하나님의 사랑(마27:45-46)
  • 2013.06.03 21:32:12
  • 호주를 방문했을 때 어느 바닷가에서 펠리칸이라는 새를 보았습니다. 그림에서만 보다가 1미터도 안되는 가까운 거리에서 보니 퍽 신기하였습니다. 키는 1미터 정도 되었고 육중한 몸에 조금은 둔하게 보이는 새였습니다. 날아 오르거나 내릴 때 뒤뚱거리는 것이 웬지 어색하게 보이는 새였습니다. 부리 아래가 주머니처럼 늘어나는 새로 아마 여러분도 사진으로 보셨을 것입니다.이 새는 다른 짐승에서 볼 수 없는 아주 감동적인 생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미가 새끼를 돌보는 애정이란 모든 동물이 가지고 있는 본능이지만 펠리칸은 유별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먹이를 특이하게 생긴 부리 주머니에 담아 새끼들에게 날라다 주는 것도 대단한 것이지만 그것 이상의 파격적인 것이 있습니다. 펠리칸은 먹이가 궁하여 새끼를 돌보기 어려워지면 자신의 가슴의 털을 뜯고 살을 찢어 새끼를 먹인다고 합니다. 아무리 새지만 정말 이런 모성애는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런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새끼가 병약하여 죽어가는 모습을 보게되면 어미는 자신의 가슴살을 찢는 정도가 아니라 핏줄을 끊어 흐르는 피를 새끼의 입에 넣어 준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새끼를 살리고 자신은 기꺼이 목숨을 잃는다고 합니다. 본능적인 모성애라고만 하기에는 너무 위대하고 숭고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정말 대단한 새끼 사랑입니다. 

    이런 펠리칸의 모성애는 그것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본성인 사랑이 그의 작품 속에 작게나마 나타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간 사랑은 이런 펠리칸의 사랑 이상의 놀라운 사랑이요 인간의 작은 머리로는 그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제대로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놀라운 사랑이요, 감격의 사랑이요, 가슴 벅찬 사랑이요 눈물이 쏟아지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노르웨이의 탐험가 난센이 한번은 북극 근방 바다의 깊이를 재려고 동아줄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 끝이 해저에 닿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 동아줄보다 더 깊음" 이라고 기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날 더 긴 줄을 가져다가 깊이를 재 보았으나 역시 해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같은 작업을 며칠 계속하였지만 북극의 깊은 바다의 깊이를 잴 수 없었습니다. 결국 난센은 그의 일기에 이런 메모를 남겼습니다. "이 근방 바다는 하나님의 사랑같다. 끝없이 깊은 바다이다.

    " 하나님의 사랑을 잴 인간의 자는 없습니다. 우리의 소견이 좁고 짧으며 인간의 이해가 부족하여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세월이 가고 연륜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도 한없이 깊어짐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에서 견디기 어려워 절규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에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울부짖으며 기도하셨습니다. 

    한번만 한 기도가 아니라 무려 세 번씩이나 기도하셨습니다.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고난이요 힘들었기에 그렇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그의 기도에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으라고 세상에 보냈으니 그냥 죽어야 한다는 묵시로 하나님은 아들의 기도에 전혀 응답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결국 아들은 십자가를 지시게 되었습니다. 채찍에 맞아 살갗이 찢어 졌고 가시관을 쓰신 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육중한 십자가 틀을 지고 골고다까지 가는 길을 감당하지 못하여 주님께서는 여러번 쓰러지셔야 했습니다. 구레네 시몬의 도움 없이는 골고다까지 가실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골고다에 이르러 무자비한 병사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습니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형인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가장 잔인한 극형이었습니다. 캔서스대학 해부학 교수 매츠키박사는 십자가형의 고통을 의학적으로 분석했습니다. "십자가형은 온 몸의 체중이 두 손바닥에 박힌 못에 매달려지기 때문에 피부와 살이 찢겨 많은 피가 흐르고 통증이 심하다. 또한 가슴으로부터 팔에 이르는 근육들이 극도로 팽창하여 호흡장애를 가져온다. 숨을 내쉴 수가 없어 근육에 산소공급이 안된다. 

    그래서 심한 경련을 일으킨다. 이런 증세를 조금이라도 참으려고 죄수는 몸을 위로 치켜올리려고 하는데 이때마다 체중은 발등에 꽂힌 못에 의지하므로 그 고통은 가중된다." 이런 주님의 십자가를 조용히 기도하며 묵상해 보았습니다. 전혀 그 이유와 깊이를 제 작은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나님,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 측량할 수 없습니다. 어찌 이렇게 큰 사랑을 주시는지 작은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가 벅찹니다. 그러나 감사합니다. 그러나 감격합니다. 그러나 찬송합니다. 그 사랑 없이는 죄인이 용서받고 구원을 얻는 길이 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말 감사하고 감사합니다'라고 혼자 중얼거린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몸무게로 인하여 서서히 찢어지는 손에 박힌 못 주위, 이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으려고 발에 힘을 주면 찢어지는 발의 아픔이 계속 더해지며 고통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예수님은 견디고 견디다 못해 오늘 본문에 보면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고 울부짖으셨습니다. 

    말씀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아들을 버리신 것입니다. 세상의 죄를 대신하였지만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죄인으로 죽어야 하는 아들을 하나님은 철저히 외면하신 것입니다. 정말 견딜 수 없는 아픔과 아버지께로 버림받은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아들 예수님은 그렇게 절규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육체를 입으시고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고 하였습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이란 좀 더 쉬운 표현을 빌리자면 '엉엉 우시면서 부르짖고 구하였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엉엉 우셨습니다. 자신의 고통과 견딜 수 없는 아픔을 인하여 엉엉 우시면서 하나님께 아뢰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들을 외면하신 것입니다. 전혀 아들을 생각지 아니하시고 영원히 죽어야 하고 마땅히 버림받아도 전혀 항의하거나 이유를 댈 수 없는 인간들을 위하여 아들을 죽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5장 6절-8절에는 이렇게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범죄하여 버림받을 수 밖에 없는 불경건한 무리였을 때 그리스도는 이런 우리를 위하여 생명까지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을 부를 때 언제나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사랑의 표현이요 마땅한 부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나의 아버지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의 부르짖음에서는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공의를 이루기 위하여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죄를 대신한 죄인으로 철저히 벌하시는 하나님을 찾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셨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버림받아야 할 인간들을 위하여 대신 죄를 지심으로 철저히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여 언제나 사랑으로 함께 하며 깊은 사랑을 나누는 관계였던 부자의 관계가 깨어지며 철저히 버림받은 것입니다. 

    아들을 버리시는 아버지, 그렇게 절규하며 찾았는데도 대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그 깊고 높으신 사랑의 의미를 결코 우리 작은 가슴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전혀 이해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벅찬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위하여 생명을 던지는 부모의 사랑은 크고 위대하지만 인류를 위하여 자식을 버리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아무리 타당한 단어를 찾아 표현하려고 하여도 적당한 단어를 찾을 수 없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요, 인간의 가슴에는 벅찬 사랑이요,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너무 깊어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상투적인 표현 밖에는 할 수 없는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고 요한일서 4장 10절에서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스위스의 한 마을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관광버스가 승객을 가득 태운 채 산길을 내려오던 중 버스 브레이크가 파열됐습니다. 승객들은 공포로 몸을 떨었습니다. 운전사는 승객들을 안심시키며 사력을 다해 언덕을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을에 진입하는 마지막 언덕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곳에서 한 무리의 어린이들이 놀고 있었습니다. 운전사는 경적을 울리며 계속 신호를 보냈으나 어린이들은 미처 피하지 못했습니다. 운전사는 망설였습니다.

    "어린이를 구할 것인가 아니면 승객을 구할 것인가?" 운전사는 미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그만 어린이를 치고 말았습니다. 다른 승객들은 다행히 모두 구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차에서 내려보니 이미 어린아이는 죽어 있었습니다. 
    운전사는 어린이를 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람들은 운전사를 향해 심하게 나무랐습니다. "당신은 어린이를 죽게 했습니다. 당신은 살인자입니다". 그 때 한 아주머니가 군중을 향해 "운전사를 욕하지 마세요. 저 아이는 운전사의 외아들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차안의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아들의 죽음을 택한 운전기사의 모습 속에서 아들을 버린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크고 놀라운 사랑이 이 시간에도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땅히 죽어야 하고 영원히 버림받아야 할 우리 인간을 대신하여 아들을 버리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충분히 헤아릴 수는 없어도 바로 깨닫고 그 안에서 바른 신앙으로 살아가는 여러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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