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께로 돌아가는 역사(시37:23-40, 롬11:33-36)
  • 조회 수: 39, 2013.06.10 07:53:51
  • 금년 추석 연휴가 시작되어 연례 행사처럼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대이동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민족의 대이동"이란 말 그대로 너도나도 고향을 찾아 내려가고 올라가고 합니다. 내려가는 길도 올라오는 길도 고생인데 사람들은 왜 그 고생을 마다 않고 고향을 찾아 기를 쓰며 가는 것일까요? 무엇이 사람들을 고향으로 오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설이나 추석에 고향을 찾아 대이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치 거대한 자석 같은 것이 있어서 그 이끄는 힘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찾아갈 고향이 없는 사람들조차도 어디엔가 있을 고향을 그리며 가만히 있지 못하고 여행이라도 떠나는 것입니다.

    북녘 땅이 고향인 실향민들은 이 추석에 고향이 있는 북녘을 바라보며 고향을 그리거나 거기에 엎드려 절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고향을 찾아갈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고향을 찾아가지 못하는 허전함과 슬픔을 달래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이런 현상들을 분석해 보면, 인간에게는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회귀본능(回歸本能)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죽어서도 좋은 자리를 찾아 묻히려는 것도 가만히 보면 일종의 회귀본능에 의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 그 고향에서 죽어 그곳에 묻히고 싶은 마음, 이것은 본능적인 것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이 회귀본능은 우리가 어딘가 돌아갈 고향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난 고향, 우리의 존재의 근원인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지음을 받아 이 땅에 태어났는데,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되면서 모두 고향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이 경향성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본능이라 하겠습니다. 

    주께서 기뻐하시는 길

    오늘 읽어드린 로마서 말씀에 보면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와 그 역사가 모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진행되며, 그를 위하여 존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역사의 흐름은 마치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흐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를 거슬려 보려 하여도 결국 그 역사는 하나님의 뜻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따른 역사의 흐름을 끝까지 거스르려는 사람은 결국 죽음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바르게 살려면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파악하고 그 역사의 흐름을 올바로 따라야 할 것입니다.

    시편 말씀에 보면 "우리가 걷는 길이 주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면, 우리의 발걸음을 주께서 지켜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주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걷는 길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뜻을 따라 흐르는 역사를 바로 알고 그것을 거스르지 않고 따라 사는 길이 바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입니다. 그 길을 제대로 걷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발걸음을 지켜 주셔서 그가 혹 넘어지더라도 붙들어 일으켜 주시며, 그 길을 형통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죄악에 치우친 인간



    그러면 누구나 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면 되지 않겠느냐 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주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자기의 뜻과 생각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은 그것이 바로 인간의 죄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죄악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아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치 고장난 텔레비전과 같아서 영상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잘 볼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을 알 만한 것들이 우리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기 욕망을 따라 행동하므로 하나님을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은 특별한 계시가 없어도 원래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죄악에 물들어 버리므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의 욕심대로 행동하게 되면서 점점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고, 아예 하나님이 계신 것조차 잊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 자손들을 선민으로 택하시어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이며 예언서의 말씀들로 기록이 되어 오늘날 우리 손에 들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제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므로 마침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우리의 죄를 대속하게 하셨고,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역사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셨던 것입니다. 

    분명하게 나타난 하나님의 뜻



    그러면 그렇게 분명하게 계시된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배우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오늘 읽어드린 시편 37편에 보면 악인과 의인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악인들은 "칼을 뽑아 치켜들고, 또 활을 당겨서,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쓰러뜨리며, 자기 길을 똑바로 걷는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14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반해 의인들은 "지혜와 공의를 말하며,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법을 간직한 자들"(30절)이라고 하였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자기의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면서 겸손을 추구하고, 은혜를 베풀며, 정직하게 행하며, 평화를 사랑하는 그런 사람들이 의인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이심을 믿고 그를 의지하며, 그가 주신 율법과 계명을 따라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도 정직하게 사랑하며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압니다.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 대체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그 선을 따라 살기보다는 악을 따라 행동하게 되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 어떤 새로운 계명이 추가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미 주신 계명들을 잘 지킬 수 있도록 우리의 죄를 사하셨고, 성령께서 우리 속에 역사 하시어 우리로 밝히 주님의 뜻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므로 믿기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죄사함 받고 구원받으므로 내 뜻을 따르지 않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내 뜻이 크게 보였고 그것이 전부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뜻이 보이고 그것이 우리의 삶의 목표가 된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도 선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내 욕망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 욕망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중심에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배우며 교회당에 와서 설교를 통하여 오늘의 삶에 있어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듣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말씀이 항상 충돌된다는 데 있습니다. 말씀을 알기는 하지만 그 말씀대로 따라 살기에는 현실이 너무 각박하고 어려운 것입니다. 교회당에 와서 설교를 듣고 나가서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해보지만, 막상 현실에 부딪치면 말씀이 지시하는 대로 살기보다는 현실과 타협하며 적당히 살게 되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형편입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무디어지고, 나중에는 말씀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 않게 되어, 결국 믿는다는 이름만 있지 실제로는 하나님을 떠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구원의 역사를 따라 살지 않고 그것을 거슬려 사는 악인의 반열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것은 이런 하나님의 큰 역사의 흐름을 따라 살기 위함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 흐름을 거스르는 자가 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 교회



    60년대에서 9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역사는 격동기였다고 하겠습니다. 격동기란 잔잔한 바다에 바람이 불어 물결이 요동치는 것과 같은 때, 혹은 잔잔히 흐르는 물을 거스르는 장애물이 생기면서 물결이 요동치는 것과 같은 시기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흐르는 역사를 거슬려 그 물결을 인간의 욕망대로 돌려 흐르게 하려는 의도 때문에 우리의 삶이 흔들리는 시기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격동의 때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흐르는 원래의 흐름이 어떤 것인지 알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체로 그 격동기에는 큰 세력으로 몰아치는 바람 앞에 잠잠하게 입을 다물거나 그 세력을 따라 살았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격동기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역사의 흐름이 어떤 것인지를 바르게 분별하는 자가 예언자입니다. 교회가 바로 그 예언자의 자리에 있어야 했는데, 개신 교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물론 소수의 교회가 여기에 동참했지만, 대부분의 교회들은 침묵을 지키거나 그 어둔 세력에 동조하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때에 유독 한국 카톨릭 교회만은 뚜렷하게 하나님의 역사를 지지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명동 성당의 뜰은 항상 억압당하는 자들의 모임 장소가 되었고, 격동하는 역사의 중심 뜰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문제가 생기면 영락교회나 새문안교회 마당을 찾지 아니하고, 명동 성당으로 몰려갔던 것입니다. 적어도 명동 성당 뜰에 있으면 안전하게 자기들의 주장을 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추기경이 확신을 가지고 올바른 역사의 방향을 제시하였기에 천주교는 그 격동의 시기에 흔들리지 않고 바른 항해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시기에 한국 개신교는 교회 성장에 몰두하여 수많은 큰 교회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보면 사람들은 큰 교회들을 많이 가진 개신교보다는 한번도 교회 성장을 내세우지 않은 천주교회에 대해 보다 많은 신뢰심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그렇게 교회 성장을 강조하지 않아도 이제는 많이 성장하고 있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교회 성장을 목표로 한 개신 교회는 하나님의 역사의 흐름을 놓쳐버린 반면, 하나님의 의의 역사를 추구한 천주교회는 오늘날 크게 성장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90년대 들어 한국 개신교는 큰 위기에 직면하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년 열리는 교단 총회의 가장 큰 잇슈는 누가 총회장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요란스럽게 총회장이 되어도 그가 하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공연히 분주하게 총회장이란 이름으로 여기저기 좇아 다닐 뿐, 교단의 나갈 방향을 바로 잡고, 한국 사회에서 그 교단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인식하는 노력에 소홀한 것입니다. 역사의식이 없는 일부 장로들이 교단의 신학과 정책과 인사를 좌지우지하는 형편없는 교회로 떨어져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과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의 방향을 잘못 짚어 다른 길로 들어서게 되면 참으로 큰 수치와 낭패를 보게 되며, 마침내는 돌이킬 수 없는 파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올바른 선택을 위하여



    더욱 중요한 것은 이제라도 우리가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역사의 큰 흐름을 되찾아 들어가 그 흐름을 타는 것입니다. 지나온 30여년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누구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지나온 날의 잘못을 반복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무지하고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21세기로 접어드는 문턱에 서 있습니다. 중요한 역사의 변환기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지난날들의 무지와 우매함을 회개하고, 이제는 올바른 역사의식과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나가야 할 올바른 길을 선택하여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거스르려 해도 결국은 이 역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진행되며, 그에게로 귀결될 것입니다.

    인도의 테레사 수녀가 지난 9월 5일 세상을 떠나 13일 어제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빈자의 어머니' '살아있는 성녀' '세기말의 천사'라는 찬사를 붙이는데 인색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가 '사랑의 봉사회'를 통해서 인도의 가난한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을 헌신적으로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겸손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였습니다. 세계가 그녀를 성녀로 부르는 것은, 그녀가 행한 가난한 자들을 위한 봉사와 헌신이 선한 일이며, 사람이면 누구나 행하여야 할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테레사의 장례식에 참여한 세계 각국의 대통령이나 정치 지도자들은 그녀를 성녀라고 추앙하면서도 그가 걸어간 봉사와 사랑의 삶을 그들의 정치에서는 전혀 실현하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곡식을 정치적 무기로 삼아 사람들이 굶어죽어 가도 나누어 주려하지 않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볼모로 삼아 정치 흥정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북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데도 그 정권은 개방화 정책을 통한 세계 여러 나라들의 도움을 거부하고 있으며, 우리 나라나 강대국들은 그것을 볼모로 북한과 유리한 정치적 입장을 흥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그 뜻을 따르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 뜻을 거슬려 사는 우리 인간의 무지와 어리석은 욕심을 우리가 냉철하게 바로 보고, 이 무지와 어리석음을 깨우칠 사명이 교회에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여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모든 인간을 본향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가 똑바로 보고 그 부르심을 좇아 지혜롭게 행하며, 바른 역사의식을 가지고 오늘의 사람들을 일깨우는 예언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인간이 그럴듯하게 꾸민 인간의 왕국이 아무리 거대하여도 결국은 무너지고 한낱 유적으로 남을 뿐입니다. 인간의 왕국만 아니라, 거대하게 지어졌던 교회들도 역사의 유적으로 돌아간 것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비잔틴 시대에 기독교가 활발하게 큰 건물도 짓고 그 문화를 이룩했지만, 오늘날에는 몇 개의 기둥만 남은 유적이 되어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될 뿐입니다. 그 시대가 올바로 하나님의 역사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발달된 과학이 아무리 신기한 것을 발명하고 그것으로 전에 이루지 못하던 놀라운 일을 이룩한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를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 훗날 또 하나의 구경거리가 될 뿐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커져도 올바로 그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전달하지 못한다면 역시 훗날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남을 뿐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그가 주관하시며, 그가 그 역사를 심판하실 것이며, 그를 위한 역사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역사의 흐름을 올바로 인식하고 충실하게 그 역사를 따라 살아가기를 힘 써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런 의인들에게 약속하신 모든 은총을 우리가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붙잡아 인도하시며, 그 자손이 복을 받게 하시며, 땅을 차지하게 하시며, 그 미래를 보장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추석을 맞아 고향을 찾으면서 진정으로 돌아가야 할 본향이 있음을 생각하고, 그 본향에 이르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충성되게 봉사하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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