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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요한복음 11:17-27/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님 [주일낮]
  • 조회 수: 673, 2013.06.17 06:55:02
  • 이 세상이 슬픈 것은 죽음 때문입니다. 어린 자녀를 두고 죽어 가는 여인을 보면 한없이 슬퍼집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남겨두고 먼저 떠나가는 사람을 볼 때 우리는 너무나 슬픕니다. 우리들도 가까운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별하는 슬픔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저도 어린 시절에 사랑하는 아버님과 이별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바로 사랑하는 오라비를 죽음으로 사별한 후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흐느끼는 두 자매의 이야기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나사로라 이름하는 오라비를 두고 있었습니다. 이 세 남매는 서로 사랑하며 아껴주는 행복한 가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아름다운 분위기를 사랑하셔서 자주 방문하시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가정은 예수님과는 개인적으로 매우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들에 대한 기사가 여러번 기록되었지만 부모님이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이 세 남매는 어렸을 적에 부모님을 여의고 자신들의 힘만으로 살아오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사로는 부모님의 역할까지 감당하면서 두 여동생을 잘 돌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여동생은 오라비를 부모님처럼 믿고 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나사로가 병이 들어서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마르다와 마리아의 슬픔은 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것이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빠가 갑자기 병이 들자 급히 예수님 에게 사람을 보내어 고쳐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소식을 전해들으시고도 나사로 에게 바로 가지 않으시고 이틀이나 더 유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나사로는 죽어서 장사지냈습니다. 장사지낸 이후에 예수님이 나사로의 집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오늘 본문 말씀이 바로 방문하신 예수님을 마르다가 영접하는 장면을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슬픔에 잠겨있는 마르다 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요11:23)

    이 말을 들은 마르다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11:24) 

    마르다는 마지막 날에는 다시 살 것을 믿지만 지금 살아날 것이라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반응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도 살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아마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니오! 믿을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믿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믿음은 기적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요11:43)

    그러자 죽은 나사로가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베를 동인채로 무덤에서 걸어나왔습니다. 그의 몸은 살아났으나 사흘동안 그를 감싸고 있던 베옷은 이미 나사로의 썩은 물로 더럽혀진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요11:44)

    나사로는 살아났습니다. 새로운 생명을 얻었고, 나사로의 가정은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었고, 울음이 찬송으로 바뀌었고,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었고, 원망이 감사로 바뀌었습니다. 이 가정은 기적을 체험하였으며, 죽음도 이기는 부활의 생명을 경험하였습니다. 이 모든 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여러분은 이러한 생명의 예수님을 믿습니까? 
    죽음도 정복하시는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어떤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하는 예수님을 믿습니까?
    이러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이제 새 천년은 우리의 가정도 나사로의 가정이 될줄 믿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될 줄 믿습니다. 울음이 바뀌어 찬송이 될 줄 믿습니다. 낙심과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될 줄 믿습니다. 불평이 변하여 감사가 될 줄 믿습니다.
    믿는 자에게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간들에게 죽음을 가져다 주는 원인은 '죄' 때문입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인간에게 죽음을 주는 것, 슬픔을 주는 것, 아픔을 주는 것, 고통을 주는 것의 모든 원인은 죄(罪)입니다. 죄가 우리를 죽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실패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죄만 이기면 우리는 모든 슬픔과 절망과 아픔과 실패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세상 사람 중에서 죄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죄를 이기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십자가만이 우리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며 속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패하지 않으려면 십자가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고통을 이기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길만이 인생이 살 길입니다. 
    그런데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계속 실패하고 좌절하고 고통하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안식을 누리고, 쉼을 얻어야 한는데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슬퍼하고, 고통하고, 낙심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죽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기에 역사하는 힘이 없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는 신앙이 없습니다. 이름만 있고 실상은 죽은 성도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계시록에 나타난 사데교회가 바로 그러한 성도들이었습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

    왜 죽은 믿음을 가졌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해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신앙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켜 행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데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고, 성령님을 좇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생각을 좇았고, 자기의 이익을 따라 갔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순종할 수는 있습니다. 지키는 것과 순종하는 것은 다릅니다. 지키는 것은 내 힘으로 지키는 것이고, 순종하는 것은 성령의 힘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예를들어서 설명하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합니까?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는 있습니다. 내 마음으로는 죽어도 사랑할 수 없지만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하겠다는 마음은 먹을 수 있습니다. 순종해야 하겠다는 자세는 가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그 사람이 원수를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순종의 자세가 바로 기도하는 삶입니다. 실제로 기도의 삶을 통해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원수를 사랑하고 변화 받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의 자식을 두 명이나 살해한 젊은이를 자신의 아들삼고 사랑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손양원 목사님이 태어나면서부터 천사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손양원 목사님도 우리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다른 것이 있다면 그분은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추운 겨울에도 시멘트 바닥에 무릎꿇고 밤을 세워가며 기도하였고,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서 끊임없이 순종하고자 힘썼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에게 성령님은 충만한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의 능력이 원수까지 사랑하도록 만드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서울구치소에서 근무하였던 박효진 장로님은 이런 간증을 하셨습니다. 1991년 초순이었다고 합니다. 서울구치소에는 수 많은 죄수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최고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다름아니라 사형수라고 합니다. 법정 최고형을 받았다고 해서 최고수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매우 흉악한 범죄자들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들을 건드릴 수 없다고 합니다. 그 최고수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을 끼치는 사형수가 있었는데 그는 유두영 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박효진 장로님은 사형수인 그를 불쌍하게 여겨서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어느날에는 그를 불러다가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형수는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장로님은 구치소에서 죄수를 다스리고 관리하는 간부였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한푼의 이익도 없는 일에  제복을 입고 사형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인간적인 감정으로는 박효진 장로님도 결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박장로님은 말 안 듣는 죄수들을 두들겨 패고 못살게 굴었던 교도관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은혜 받으니까 자기의 힘으로 죄수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장로님의 모습을 보고 유두영이라는 사형수는 변화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날 이후 이 사형수는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는 특히 545장 "하늘가는 밝은 길이"를 애창하였다고 합니다. 접견을 나갈 때도 운동을 나갈 때도 항상 성경을 가슴에 안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러갔습니다. 마침내 사형집행날이 다가왔습니다. 박효진 장로님은 유두영이라는 사형수를 위해서 자원해서 집행관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형수가 죽어가던 그날 유두영은 사형장으로 끌려오면서 쉴새없이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장기를 기증한 후에 마지막으로 이렇게 유언하였다고 합니다. "소장님, 그리고 검사님, 제 마지막 부탁은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다 제가 믿는 예수님을 믿으시는 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늘 즐겨부르던 "하늘가는 밝은 길이"를 부르면서 죽어갔다고 합니다.

    자기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거부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전해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니 인간적인 감정으로는 두들겨 패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 자신의 감정과 마음을 순종할 때 성령님이 사랑하도록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살인마 앞에서도 무릎을 꿇을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성령님을 의지하고 순종할 때 하나님이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키는 것과 성령님이 지키도록 힘을 주시는 것과는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성령님께 순종할 수 있습니까? 성령님을 좇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좇는 사람은 성령님을 좇아가지 못합니다. 자기의 이익을 좇는 사람도 성령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성령님을 좇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성령님을 좇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성령님을 좇는 사람은 말씀을 항상 가까이 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며 말씀을 상고하는 사람은 성령님이 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권세를 주십니다. 세상을 이길 힘을 주십니다. 실패를 이길 힘을 주십니다. 미움과 다툼을 이길 능력을 주십니다. 죽음을 이길 힘을 주십니다. 

    이제 새해에는 자기의 생각이나 감정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자기 중심적인 삶은 실패뿐입니다. 성령님을 중심에 모실 때 성령님께서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십니다.  성령님을 좇아 가려면 끈임 없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연습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연습은 이미 아는 것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만으로는 교만하게 할 뿐 유익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체험해야 합니다. 계속 순종을 연습하고 연습하는 사람만이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연습하십시오. 말씀을 연습하십시오. 이 말씀이 참으로 그러한가 연습하고 실천해 보십시오. 이러한 삶은 우리들의 심령을 새롭게 합니다. 우리들의 영혼에 능력을 주십니다. 믿음을 더욱 크게 만들어 줍니다. 믿음이 크면 역사하는 힘이 커집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라고 오늘 나에게 물어 보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고백하시겠습니까? 아니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니 나를 믿는 자는 모든 환경과 삶을 다스리며, 정복하고, 번성하며 충만한 역사가 일어난다. 이것을 믿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마르다처럼 "내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믿음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마르다의 믿음의 고백이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리는 기적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마르다의 믿음이 나사로의 가정에 행복과 기쁨과 부활의 소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의 믿음이 이 새해에는 역사하는 힘이 크게 나타나 모든 고통과, 낙심과, 한숨이 변하여 기쁨과, 감사와, 찬송으로 변화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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