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닭 인생, 계란 인생(요 11:23-27)
  • 조회 수: 193, 2013.06.17 07:16:12
  • 저는 개인적으로 모태신앙이기 때문에  평생 부활절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부활절 날마다 생각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 예수님이 부활 하셨지!"  "그것을 믿는 것이 부활이지, 그런데 나와는 무슨 상관이 있는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분명히 믿어요, 그런데 나에게는 어떤 영향력이 있는가?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현재의 부활이라고 합니다. 삶의 부활 인생의 부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활절이라고 해서 우리가 부활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미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보는 은혜를 많이 보여 주셨습니다. 한번은 니고데모를 만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어디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겁니까? 아! 물론 여기서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즉 부활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닭은 두 번 태어납니다. 우선 계란으로 태어나고, 다음은 병아리로 태어납니다. 물론 한 번 태어나고 끝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계란으로 끝나는 경우이지요. 그러나 본래는 두 번 태어날 운명입니다. 계란으로 태어나면 21일 동안 어미닭이 따스하게 품고 있습니다. 그러면 껍질을 깨고 병아리가 나옵니다. 바로 두 번째 태어남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부화라고 말합니다. 

    부활절에는 계란을 돌리는 풍습이 있습니다. 오늘 예배가 끝나면 여러분에게도 계란이 전해질 것입니다. 부활절 계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바로 껍질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 바로 거기에 부활절 계란 풍습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막았던 돌이 바로 계란을 상징합니다. 그 돌이 치워지고, 다시 말해서 그 돌이 부서지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듯이, 계란이 깨지고 참 생명이 피어나는 것이 부활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란 상태에서 병아리로 다시 태어나는 것과 부활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침 말도 비슷하지요? 부화와 부활. 요사이는 그런 것이 없는데 예전에는 중간 알을 보신 알이라고 많이 먹고 다녔습니다. 어정쩡하게 부화된 알이었습니다. 완전히 태어나지 못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고 말씀하셨을 때, 그 '다시 태어남'이 바로 부활인 것입니다. 닭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두 번 태어나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다시 태어날 때, 곧 부활할 때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된다,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결코 육체가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는 것을 가리키고 있지 않습니다. 곧 미래의 부활이 아니라 현재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생활할 때는 첫 번째 태어난 상태였습니다. 그 상태였기 예수님을 배반하고 뿔뿔이 흩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다 예수님 부활 사건을 경험하고 그들은 다시 태어났습니다. 두 번째로 태어났습니다. 곧 부활한 것입니다. 부활의 삶을 살았던 그들은 모두가 흔쾌히 순교의 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궁금하지 않아요?  어떻게 자신의 삶과 자녀를 버리고 선교를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아무리 써도 모릅니다. 거듭나 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다시 태어났습니다. 바울은 (갈2:20)에서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역사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힌 사실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힌 것은 강도 두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옛 자아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의미이지요. 그리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바울도 옛 자아가 죽고 새로운 자아로 부활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나 제자들뿐만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두 번 태어날 운명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태어날 때 진정한 생명이 있습니다. 한 번 태어나는 것으로 끝나는 인생이 있고, 두 번 태어난 인생이 있는 것입니다. 한 번 태어난 인생은 계란과 같습니다. 그 안에는 생명을 잉태할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두 번 태어난 인생은 닭과 같습니다. 그 안에는 생명을 잉태할 생명이 있습니다. 곧 그가 계란을 낳습니다. 그리고 그 계란을 21일 동안 품어 진정한 생명체를 만들어 냅니다.  한 번 태어난 인생과 두 번 태어난 인생이 갖는 질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첫 번째 태어난 몸으로 인생을 사는 것과 부활한 몸으로 인생을 사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삶의 질의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의 인생은 심각합니다. 번뇌와 집착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후자는 그의 삶에 늘 깊은 웃음이 배어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무구함이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늘 가볍고, 또한 자유합니다. 나비 따라가다 길을 잃는 경우가 있습니다. 평범한 것들을 즐길 수 있으므로 그에게는 모든 것이 선물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 되고, 매 순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호흡마저 즐깁니다. 

     그러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요? 계란에서 병아리가 태어나려면, 계란 껍질이 깨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계란은 죽어야 합니다. 계란이 죽으면 병아리라는 부활이 이루어집니다. 계란이 죽지 않고서는 부활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가 많이 맺힙니다. 밀알의 죽음이 부활의 열매로 이어집니다. 배추벌레 한 마리가 있습니다. 열심히 먹어 살이 오르면, 어느 날 고치가 됩니다. 고치는 배추벌레의 죽음입니다. 또 어느 날 고치는 한 마리의 아름다운 나비로 변합니다. 나비는 
    고치의 부활입니다. 배추벌레는 그 상태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자신의 입에서 실을 뽑아 스스로를 묶습니다. 자유를 묶고, 싱싱하고 맛있는 배추잎의 기억을 잊어버립니다. 좁은 공간 안에서 스스로를 죽이는 겁니다. 거기서 창공을 나는 아름다운 나비로 부활이 이루어집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육신의 생명이 완전히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형태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죽음으로부터 현재의 부활이 이루어집니다. 

    현재의 부활은 존재의 변형입니다. 계란이라는 존재에서 병아리라는 존재로, 배추벌레라는 존재에서 나비라는 존재로, 옛 자아에서 새로운 자아로 존재가 변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전의 존재는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자리에 새로운 존재가 대신 들어서게 됩니다. 따라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이 미래의 문제가 아닙니다. 죽음은 이미 과거에 일어났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 날, 다시 태어난 날, 두 번째로 태어난 날, 자신은 이미 죽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입니다. 자신의 낡은 정체성이 죽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의 죽음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진실한 자신의 모습이면서 한 번도 제대로 살지 못했던 모든 것들의 부활이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 앞으로 죽음은 없습니다.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가지 살아온 날들에 대해 어느 정도 만족하십니까? 이는 외면적인 것들에 대한 만족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좋은 부모를 만나 누리게 된 좋은 환경이나, 좋은 학교를 다닌 것들에 대한 만족도가 아닙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만족도를 의미합니다. 자신의 내면, 자신의 인격,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풀어가는 모습, 성실성, 근면성, 의지력 등과 같은 것들에 대한 만족도입니다.  과거 자신의 삶의 모습에 대해 낮은 만족도를 생각하시는 분은, 앞으로는 그 만족도가 높아지기를 바랄 것입니다. 또한 그를 위해 적지않은 노력도 기울일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바람이나 노력과 관계없이, 과거의 만족도를 대체로 그대로 유지하게 됩니다. 과거의 만족도 수치와 거의 변함없는 수치를 유지하며 여러분의 미래가 전개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의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든지 없든지 이는 명확한 사실입니다. 

     자기 과거의 삶에 대한 만족도가 낮은 사람은, 앞으로도 그 낮은 만족도가 자신의 미래에 펼쳐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참으로 끔찍하지 않습니까? 참으로 참담하지 않습니까?  만족도가 앞으로 높아질 가능성은 완전히 없는 것일까요? 아니 있습니다. 그 길이 바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한 강사가 학생들에게 퀴즈를 냈습니다. 그는 속이 비어있는 커다란 통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큰 돌들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큰 돌들이 통에 가득 찼습니까?" 학생들이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강사는 조그만 조약돌들을 큰 돌틈 사이로 부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다 찼는지를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학생들은 이번에는 속지 않았습니다. 강사는 다시 작은 조약돌 사이를 모래로 메워 나갔고, 모래를 다 채운 다음에는 주전자로 물을 부어 통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이것을 보고 느낀 점을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학생 하나가 대답했습니다. "틈은 늘 있기 때문에, 하려고 들면 인생 속에서 더 많은 것들을 채워넣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강사가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그게 핵심이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이 통 속에 큰 돌을 먼저 집어넣지 않았다면, 이것들을 다 집어넣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들 인생에서 이 큰 돌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소중하고, 그래서 우선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돈을 많이 버는 일입니까? 지식을 많이 쌓는 일입니까? 영화를 많이 보는 일입니까? 그런 것들도 인생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들로 여러분의 인생이 가득 채워지게 되면, 여러분 안에 큰 돌이 들어갈 틈은 없을 겁니다. 큰 돌은 버려진 채 여러분의 인생을 마감하게 될 것입니다. 큰 돌은 반석입니다.  큰 돌이 우선 든든하게 자리를 잡아야, 
    비로소 반석 위에 세운 집이 됩니다. 따라서 큰 돌을 우선 채워 반석의 기초를 다지는 일, 그것이 가장 소중하고 우선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바로 존재의 변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받은 두 번째 삶을 사는 것입니다.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부활이라는 말의 의미는,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부활하신다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생전의 부활의 의미도 있습니다. 아니 생전의 부활의 의미가 더 강합니다. 다시 말해서 살아있는 지금 현재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앞으로 부활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나는 지금 부활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헬라어 원어로 보아도 시제가 미래가 아닙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I will be the resurrection."이 아니라 "I am the resurrection"인 것입니다. 바로 옛 자아가 죽고 새 자아로 다시 태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인생에 허락된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24절에서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압니다."고 고백합니다. 곧 미래의 부활을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현재의 부활을 말씀하고 계십니다.지금 현재 부활의 삶을 살고 있으니, 거기 생명이 약동함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이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이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거듭 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은 곧 '영생'입니다. 사람들은 이 영생을 육체적으로 영원히 사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게 아니라 영생은 우선 영적인 생명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으니, 나중에 육신의 옷을 벗더라도 영적인 생명은 영원히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네가 이것을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만약 제게 물으신다면 저는 흔쾌히 "예"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신 것과 같이, 저 자신도 부활이요 생명임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아침 여러분에게도 묻고 계십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지금 현재 부활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앞으로 자신에 대한 만족도가 꾸준히 상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을 채워야 할 가장 소중하고 우선 되어야 할 것은 큰 돌입니다. 바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존재의 변형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모두 깨어나야 합니다. 자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자아의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합니다. 옛 자아를 죽여야 합니다. 새로운 자아로 부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원래의 나를 되찾는 것입니다.

     여러분 깨어나십시오. 새로운 자아로 부활하십시오. 아니 원래의 자아를 되찾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죽어도 살고,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곧 구원입니다. 영생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인 것처럼, 여러분도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우리들 자신이 현재 부활의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과 같이 위대하고 복된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 큰소리로 외쳐보겠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댓글 0 ...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27 admin 257 2013.06.17
26 admin 257 2013.06.17
admin 193 2013.06.17
24 admin 314 2013.06.17
23 admin 260 2013.06.17
22 admin 334 2013.05.28
21 admin 309 2013.05.28
20 admin 259 2013.04.12
19 admin 229 2013.03.31
18 admin 205 2013.03.30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