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빌라도의 비겁(요18:28-38) [고난주간]
  • 2013.06.20 08:12:44
  •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이번 주간은 고난주간 입니다. 이러한 기간을 당해서 오늘은 주님의 고난에 대한 빌라도의 태도를 생각하면서 현대인의 신앙태도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우리는 빌라도가 어떠한 인물이었는가를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로마의 총독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허락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을 외울 때마다 본디오 빌라도라는 말을 번번이 사용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가 훌륭한 쪽의 이름이 아니라, 악한 사람 쪽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유의해야 합니다.

     그러면 빌라도가 기독교 역사 속에서 치욕적인 이름을 남긴 이유가 무엇입니까? 빌라도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빌라도의 비겁이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어떠한 면에 비겁했습니까? 
     1. 빌라도의 비겁은 세상에 욕망 때문에 진실을 포기한 데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대단히 유능하고 탁월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로마 황제의 특별한 인정을 받을 정도로 출세가도를 달려온 인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 총독을 임명되었던 것입니다. 유대 총독은 탁월하고 유능한 지도자만이 갈 수 있는 직책이었습니다.

     당시의 정치 상황으로 볼 때 유대인들은 나라를 찾기 위해 계속적인 폭동이나 음모를 꾸미고 있었으므로 유대인들을 달래기 위해서는 유화정책(宥和政策)을 써야 했습니다. 그 정책의 일환이 유대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정치적으로는 억압을 받고 있었으나 종교적으로는 자기들의 율법대로 마음껏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유대 총독을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선민(選民)이라는 대단한 자부심을 마음껏 살리면서도 반역활동을 전혀 못하게 하는 정보망을 펴야 했습니다.

     또 총독은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해서도 충분한 지식을 갖추어야 하는 최고도의 정치 능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빌라도는 명석하고 기민한 판단력이 있어서 어느 상황, 어떤 문제도 처리할 수 있는 유능한 지도자였기에 그 나라 총독으로 적합한 인물로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였고 출세가도를 탄탄히 달리고 있는 유망주였습니다.  자, 그런데 그의 앞에 대단히 성가신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것은 유대 지도자들이 빌라도를 찾아와서 예수란 자를 십자가에 못박게 해달라는 청원을 한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사형집행권이 없었습니다. 사형집행권 만은 로마 정부에게 있어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크게 범한 죄로 사형을 집행하려고 할 때는 로마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려는 죄목은 신성모독 죄였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자기가 하나님과 같다'는 주장을 하는 죄는 신성모독 죄로 유대 율법에서는 사형을 피할 수 없는 큰 죄였습니다.

     그러나 로마법에는 신성모독 죄란 사형에 해당되지 않는 줄 알고 있기에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 대신에 왕을 사칭한다는 정치적인 죄목으로 고소했습니다. 눅23:2 "고소하여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라고 했습니다. 로마의 입장에서는 자기를 왕이라고 사칭할 때는 반역죄에 해당되므로 사형을 할 수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비록 귀찮았으나 예수님을 심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빌라도의 심문이 시작되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이 사실이냐?' 37절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느니라" '그러면 그 나라는 어떠한 나라인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빌라도는 전에 전혀 들어보지 못한 하나님 나라와 놀라운 진리의 말씀에 접하게 됩니다.

     빌라도는 심문하다 말고 난데없이 '진리가 무엇이냐?'고 질문할 정도였습니다. 빌라도는 그의 명석한 두뇌, 기민한 판단력, 그리고 많고 다양한 죄수를 심문한 경험을 통해서 볼 때, 예수님에게는 전혀 죄가 없고 한없이 진실한 분이라는 결론을 얻게되었습니다. 마침내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세 번이나 했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을 풀어 주려고 무척 애썼다는 사실을 본문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무서운 흉악범인 바라바와 예수님과 함께 세우고는 '내가 누구를 놓아주랴?'고 묻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우에 보통 같으면 아무리 예수님에 대해서 못 마땅할지라도 흉악범과 비교할 수 없으므로 예수님을 풀어주라고 외칠 것입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이미 뇌물을 먹었으므로 계속 '예수를 못 박으라'고 소리칠 뿐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이번에는 더 심한 방법을 썼습니다. 예수님을 심하게 매질하고 가시관을 씌워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을 군중들 앞에 세웠습니다. 군중들의 동점심을 유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피를 본 이리처럼 더 사나운 이빨을 들어내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더욱 더 살인적인 고함을 질러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 지도자들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주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는 것을 보고 더 강한 방법으로 빌라도를 압박하였습니다. 요19:12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빌라도의 가장 큰 약점을 찌른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발견하지 못한 빌라도 총독은 자기의 권한으로 얼마든지 예수님을 풀어놓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이 지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점점 함성을 지르다 못해 그것이 발전하여 민란(民亂)이 일어난다면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던 빌라도에게는 막대한 지장을 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세상 욕망인 출세길이 방해받지 않기 위해 비겁하게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그는 대야에 물을 떠오게 한 후,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이 핏값을 당하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미쳐버린 군중들은 '그 핏값을 우리에게 돌리소서'라고 외치는 것이 아닌가? 그 결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로 인해서 나라를 빼앗긴 채 수 천년동안 가장 무서운 형벌을 받았던 것입니다. 여하튼 빌라도는 진실이 무엇인가를 뻔히 알면서 세상의 출세를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비겁하게 내주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출세 때문에 진실을 거부한 빌라도는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계속 출세를 했습니까? 아닙니다. 후에 빌라도는 어떤 예루살렘 사건에 연루되어 총독직에서 쫓겨났고 로마로 소환되었으며, 요세프스라는 역사가에 의하면 칼리쿨라 치세 하에서 자살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좁은 길을 버리고 욕망의 넓은 길을 택하다가 성경말씀대로 멸망을 자초했던 것입니다.  

     때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세상 것 때문에 양다리를 걸치고 사는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이라는 두 주인을 섬기려고 합니다. 세상에 나가서는 마음대로 죄를 먹고 마시고 죄를 도박하고 죄에 취해 있다가 주일날 교회 와서는 교인처럼 행세합니다. 어느 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무엇인지 뻔히 알면서도 세상의 것, 세상의 친구와 친척의 비난이 무서워서 주일을 범하고 불의를 따르므로 하나님의 진리를 벗어나고 교인들도 있습니다. 두 토끼를 다 쫓을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이런 신자들을 뜨뜻미지근한 신자로 여기어 토하여 내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갈멜산에서 하나님과 바알신 사이에 서서 눈치만 보고 있는 백성들을 향해서 엘리야는 외치기를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쫓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쫓을지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처녀에게 두 군데서 중매가 들어왔습니다. 한 총각은 성실치 못하나 돈이 많은 부자 집안이고, 다른 총각은 아주 진실하고 성실하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이었습니다.

     이 처녀는 둘 사이에서 누구를 택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탄식처럼 한다는 소리가 '두 사람하고 다 살았으며 좋겠다. 하루는 진실한 총각하고 살고 하루는 돈 많은 집에 가서 살면 좋겠다.'고 하더랍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말입니까? 이 처녀가 지혜로운 처녀라면 지금은 가난하지만 성실한 총각하고 결혼하면 어느 날 돈도 생기는 날이 올 터인데 두 사이에 끼어 머뭇거리거다가 다 놓치거나, 아니면 오늘의 욕망에 따라 진실하지 못한 사람을 택한다면 빌라도처럼 비참한 결말을 맞을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때로 '이것을 택할 것인가, 저것을 택할 것인가?'하는 선택의 기로(岐路)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 우리 기독교인의 선택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세상 기준대로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선택하면 의식주 문제, 세상에서 필요한 것도 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나 세상을 기준해서 선택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타나지 않음으로 실패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간석제일성결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장자옥 목사님의 책에는 이런 간증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70년대 월남전쟁이 한참 치열할 때, 아들이 그곳에 가 있는 어느 여자 자매님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상담하기를 '목사님, 아들이 혹시 부상당하지 않을까 밤마다 걱정에 싸이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좋지요?' '예, 자매님, 성령님은 우리의 빌 바를 아시므로 자매님의 기도를 성령님께 맡기십시오. 성령님께서 대신 기도해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 자매님은 아직도 믿음이 깊지 못하므로 기도생활을 많이 하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아마, 처음에는 그 자매님은 목사님의 말씀대로 매일 기도하고 맡길 것인가 아닌 가로 갈등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기로 하고 매일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그 아들이 베트콩과 전투를 하다가 전방에서 날아오는 포탄을 피해 3미터 앞으로 뛰어가려고 하는데 누구인가 엄청난 힘으로 어깨를 누르면서 '그 자리에 엎드려라.'하고 명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아들은 엉겹결에 그 말에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바로 그 순간, '꽝'하는 소리와 함께 좀 전에 자기가 뛰어가려면 바로 그 지점에 포탄이 떨어졌습니다. 그 청년은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아무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기도가 이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이여, 때로 지금은 불리해 보이고 손해가 되어 보인다 할지라도 넓은 길을 버리고 단호하게 좁은 길을 택하십시오. 그 때 그 순종의 좁은 길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기쁨, 은혜의 복으로 채우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빌라도의 비겁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한 데 있습니다. 
     비겁이란 선한 것을 선택하는 용기가 없다는 뜻입니다. 빌라도에게는 로마인으로서의 너무나 귀한 기회를 만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절호의 찬스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많은 시간을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대단히 위대한 분임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는 세계 역사상 한번 나타날까 하는 큰 성자라고 생각을 했을 것이요, 예수님이 스스로 자기를 소개하시듯이 영원한 진리의 나라 왕일 수도 있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 맑고 깊은 눈, 한마디마다 폐부를 찌르는 말씀들, 뒤에서 고함을 지르는 군중들의 살인적인 위협에도 태산처럼 흔들림이 없이 서 있는 저 초연한 모습이 그에게는 큰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에 비해 빌라도 자신은 로마의 막강한 권세를 쥐고 있는 총독임에도 이 혼란과 민란의 위기의 와중에서 사뭇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아마, 그 와중에서 그래도 어느 만큼 안정을 얻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저 호수 같은 고요한 눈과 흔들림이 없는 태산같은 초연함 탓이었을지 모릅니다.      

     여하튼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큰 감동을 받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빌라도는 말로써는 한 마디로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고 느꼈던 우의적(友誼的)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잔인하고도 급작스럽게 그리스도를 십자가 형벌에 내주었다는 점이 바로 그의 비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이것을 옳은 줄 알았으나 실제로는 그 반대로 행하고 말았습니다. 빌라도가 진정 용기가 있고 주어진 선한 기회를 잘 결단했더라면 예수님을 진리의 왕으로 영접했을 것이요, 그러면 일시적으로는 어려움을 당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강하신 도우심으로 예루살렘 통치에서도 그 판도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냐? 세상이냐?'라는 기로에서 세상을 택함으로 영원한 기회를 순식간에 상실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어리석음을 벌하지 마십시다. '예수님이냐, 세상이냐' '좁은 길이냐, 넓은 길이냐'를 택할 수밖에 없을 때에 당장 큰 손해가 보인다 할지라도 지체하지 말고 예수님을 따라 좁은 길을 택하십시오. 그 길만이 생명과 영원을 얻는 길인 것입니다.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디메오는 절대절명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수님을 영접한 결과 눈이 뜨는 기적을 만났고, 삭개오는 예수님이 여리고에 오시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고독하고 어두운 삶이 변하여 밝고 빛나는 삶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니고데모는 모든 자들이 예수님을 외면하는 날에도 예수님을 위해 무덤을 제공하는 선한 용기를 보임으로 하나님 앞에 큰상을 받았을 것이요, 그 후손들이 많은 복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대단히 명석하고 탁월한 사람이었으나 자기 앞에 온 기회를 놓치므로 영원을 놓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역사 속에 남게되었습니다. 여러분이여, 기회는 언제나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실 때 지체없이 결단해야 합니다. 유명한 부흥사였던 무디 선생님은 시카고에서 전도 집회를 열었는데 회개에 대해서 설교하다가 '시간이 너무 갔으므로 내일 다시 계속할 터이니 여러분들이 집에 가셔서 회개할 것을 많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하고 설교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에 시카고에 난데없이 대화재가 발생해서 많은 사람들이 불타 죽었는데 그 날 밤에 설교를 들었던 많은 사람들도 회개하지 못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그 때 무디는 밤을 새워서라도 회개를 못 시킨 것을 후회했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들이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오늘 이 시간, 아니면 이번 고난 주간에 철저히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심으로 모두 중생의 은혜를 받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빌라도의 비겁은 성령의 지시에 순종하지 않은데 있습니다. 
     마27:19에 보면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을 재판하는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전언하기를 '그 사람은 옳은 사람입니다. 아무 상관도 마옵소서. 어제 밤에 내가 그 사람 때문에 애를 많이 썼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지시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아내가 전해준 성령님의 지시를 무시하다가 역사에 오점을 길이 남기는 큰 과오를 범하게 되고 그의 말로도 비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가들이 밝힌 사실을 통해 보면 빌라도의 부인은 클라우디아라는 여인이었는데 후에는 열렬한 예수교 신자가 되었고 많은 선한 업적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방교회에서는 그녀를 성녀(聖女)로 정하고 축일(祝日)로 10월 27일에 지키고 콥트교회에서는 6월 25일로 기념하여 지킨다고 합니다. 남편 빌라도는 성령님의 지시를 무시하다가 결국 출세는커녕 체포되는 몸, 자살하는 몸이 되었으나 그의 아내는 성령님의 지시에 순종함으로 영원한 길을 걷는 자, 많은 교인들이 흠모하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세상 길, 넓은 길을 떠나 예수님이 열어 놓으신 구원의 좁은 문을 통해서 영원한 길인 좁은 길을 갈 때에 인도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때로 지시하시고, 때로 경고하시고, 때로 능력으로 특별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롭고 신실한 성도들은 그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언제나 명심할 것은 그 성령님의 지시에 순종하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때로 성령님은 우리에게 성경말씀으로, 혹은 감동함으로, 어느 때는 주의 종을 통해서, 어느 때는 어떤 사건을 통해서, 어느 때는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혹은 심히 떨리고 두려운 마음을 주심으로 지시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것을 무시하고 순종하지 않다가 큰 어려움, 큰 시험에 빠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영적인 눈, 영적인 귀를 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R.A 토레이 목사님이 영국 브라이톤이라는 곳에서 전도집회를 가졌을 때에 그 집회를 돕던 한 동역자가 어느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식사를 나르는 어느 웨이터에게 자꾸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러다가 '나 같은 게 뭘'하는 생각과 바쁘게 일하는 종업원에게 전도한다는 것이 성가스러워서 그냥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자꾸 마음이 걸리어서 다시 식당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웨이터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하도 안 나와서 주인에게 물으니, 주인의 말이 너무나 충격적입니다.

     '손님, 이미 늦었습니다. 그 웨이터는 손님에게 봉사를 한 후, 이층으로 올라가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전도하려던 분은 하나님 앞에 너무나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이여, 우리는 현대를 사는 빌라도가 결코 되지 마시고 세상에서 많은 손해를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길을 택하며, 예수님을 진리의 왕으로 영접하며 그가 만드신 좁은 문을 들어가 성령님이 따라 좁은 길로 가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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