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을 응하게 하심(요19:38-42) [고난주간]
  • 2013.06.20 11:12:36
  • 지난 8월 5일자 국민일보 23면에 시온산에 물이 흐른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최근 시온산 정상에서 떨어지던 물방울이 현재 작은 시냇 물처럼 흐르고 있다고 합니다. 성서와 고대 유대인 문헌에서는 메시아가 오기 전 시온산에서 방울져 떨어지던 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한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구약 스가랴서13:1절에 보면 "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해 열리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14:8절에 "그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엘3:18절에 "여호와의 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고고학자들과 지질학자들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물방울이 모여 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인 "바위의 돔"아래로 흐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현재 이슬람 사원이 선 이곳은 원래 솔로몬 왕의 성전과 예수가 방문했던 성전이 있던 시온산이라고 인정되고 있는 장소입니다. 현재 시온산 정상지역을 관리하는 와크프라는 이슬람 종교회의는 물의 흐름을 멈추게 하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산 정상으로부터 물을 다른 곳으로 흩어버리는 특수펌프를 장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신비로운 시냇물은 계속 흘러내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슬람 종교회의의 한 관계자는 "고대 이슬람 작품들을 보면 이것이 유대인에게 좋은 표시고, 이슬람 교인에게는 나쁜 징조임을 말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징조가 곳곳에 여러 가지 사건과 기상 이변 등으로 알 수 있습니다. 준비하셔야 합니다.

    본문은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신 예수님의 육체가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려 했던 로마군병들의 날카로운 창날에 의해 깊은 상처를 입고 물과 피를 쏟아내는 장면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깊게 묵상하고자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잊고 있는 신앙의 주제가 있다면 그 중 하나는 십자가일 것입니다.
    우리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할 때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아가자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증거하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많은 기독교 교리 중 한 요소로만 취급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생명 그 자체입니다.

    십자가가 중심이 되지 않는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은 죽어 버린 이데올로기에 불과합니다.

    그토록 긴 구약의 역사가 하나의 시점을 보고 달려 왔습니다.

    그리고 신약 시대에 구원을 경험했던 수많은 성도들이 그 한 시점을 주목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가고 역사가 바뀌어도 변화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십자가를 통해서 멸망 받은 백성들을 구원과 생명의 자리로 옮겨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과학이 발달하고 새로운 문명의 물결이 세상의 풍조를 움직이고 있는 이 때에 십자가의 복음이 더욱 미련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적인 교만 때문에 십자가의 복음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 시대에, 구원을 주시는 십자가의 복음이 지혜 있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해 보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수 없으리 만치 현세적인 삶에 몰두해 있기 때문에 십자가의 복음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대부분은 비록 십자가 형벌을 받으시는 골고다 언덕에는 함께 있지 아니하였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체포와 심문과 고난의 과정들을 현장에서 어느 정도 목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더욱이 사도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목 박혀 죽어 가실 때 운명하시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죽음이 죄인 된 우리를 위한 고난임을 주님께서 이미 가르쳐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주님의 고난의 현장에 있었으나 십자가를 경험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오순절에 있었던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하여 그 십자가 사건을 영적으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이루어진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오시자 그들은 구약 속에 드러나 그리스도와 구원의 약속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토록 오랜 동안의 인류의 역사가 오직 한 지점을 보고 달려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구약에 예언된 말씀이 비로소 응하게된 사실을 확인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체험하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인들의 습관에 의하면 십자가에서 달려 죽은 죄인의 시체를 그대로 매달아 놓고 장례를 하지 않은 채 내버려둡니다.

    그러면  새들이 날아와서 뜯어먹고, 개가 와서 핥는 비참한 현장이 되고 만답니다. 생명이 긴 사람들은 십자가에 매달려 못이 박힌 채로 일주일씩이나 꿈틀거리며 살아 있다고 합니다. 또 지나가는 사람들이 침을 뱉게 하여 저주받은 인생으로 치부하는 것이 당시 로마인들의 습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모세 법을 따라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을 매장 할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신21:22-23절에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완전한 저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으셨고 그 결과로 저주의 죽음을 죽었으며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을 두고 유대인 지도자들 가운데 유월절이 가까워오니 명절이 오기 전에 빨리 시체를 매장하자는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이것을 두고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스펄전 목사님은 "종교적 거리낌은 죽은 양심 속에도 살아 있는 법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미 타락한 양심이요, 하나님을 대적한 양심이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양심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종교적인 거리낌은 그 마음에 아직도 남아있어 안식일이 되기 전에 그들 스스로가 예수님을 속히 장례 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종교지도자들은 빌라도를 찾아오게 되었고 그의 허락을 받아 다리를 꺾어 죽음을 재촉한 후 장례를 치루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양편 강도의 다리를 먼저 꺾고 예수님에게 가보니 이미 예수님은 돌아가신 후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다리를 꺾이지 않고 돌아가셨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군인들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 물과 피가 나왔다고 했습니다.

    요한은 이 장면을 목격하면서 이것은 성경의 예언(출12:46, 민9:12)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35절 상반절 "이를 본 자가 증거 하였으니"

    예수님의 양편 강도의 다리를 꺾이고 예수님의 옆구리는 창에 찔려 물과 피를 쏟는 모습을 본 사람이 증거를 했다고 했는데 이른 본 자는 다른 말로 하면 목격자입니다. 분명한 목격자가 사실을 확인하고 증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시어서 완전히 죽은 사실을 목격자는 우리에게 증언했습니다. 이 목격자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사도 요한입니다.

    35절을 다시 보면은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가 본 것이 참인 줄 확신했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이 사실을 믿게 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까지 따라왔던 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을 가리켜 "사랑하시는 제자"(26절)라고 하셨고 21:24절에도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에게 증거가 참 인줄 아노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당시에 증인이 두 세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신17:6, 19:15, 민35:30).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증인은 성부의 증거가 있고 성령의 증거가 있으며 성자 자신과 요한의 증거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잠시 기절하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으신 것입니다. 완전히 죽으셨다는 것은 우리의 죗값을 치루신 것이 되고 또한 부활의 가능성 때문에 중요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이것을 본 요한이 우리들로 하여금 이 사실을 믿게 하려고 기록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죽음에 대한 성경의 언급

    33-34절을 함께 읽기를 원합니다......................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니 물과 피가 나오더라고 했습니다.

    물과 피에 대하여서는 해석이 아주 다양합니다.

    스위스의 유명한 신학자 오스카 쿨만은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나온 물은 세례를 의미하고 피는 성찬식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어떤 학자는 물과 피를 아담과 하와 혹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물과 피를 흘리고 죽으심으로 인하여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함께 사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것 역시 좀 신비적 해석입니다.

    그런가 하면 영국의 스트라우드라는 의사는 예수님의 죽음을 의학적으로 연구한 결과 예수님은 손과 발에 못을 박을 때 엄청난 충격으로 심장파열이 일어나 물과 피가 쏟아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은 사망의 권세를 이긴 승리의 죽음으로 실패자의 죽음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런고로 고통이 수반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심장파열을 일으킬 정도로 공포에 사로잡힌 죽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물과 피를 흘리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단지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었던 것입니다.(36절)

    예수님의 죽음은 상징적이거나 은유적인 해석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 있습니까?

    그것은 자기 뜻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이루는 사람일 것이며 이보다 아름다운 일이 또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예언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므로 여기에 다른 해석은 붙일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안식일 되기 전에 (유월절이 되기 전에) 예수님의 다리를 꺾기 위해 유대인 지도자들이 빌라도에게 가서 청원을 한 것은 예수님께서 아직 죽지 않은 것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양옆에 있는 강도들이 다리를 꺾고 난 다음에 예수님을 보니 이미 예수님은 죽은 뒤였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참된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 당시 교회 안에는 노스틱주의(영지주의)가 팽배해 있었는데 이들은 예수님의 참인간 되심을 부인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구조를 이원론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 혼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구분했는데 하나님은 선하시므로 육적인 인간으로 세상에 오실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노스틱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인간 되심을 거절했는데 이와 같은 악한 사상이 교회에 들어옴으로 인하여 이것을 반증하기 위해서 요한이 이 글을 썼던 것입니다.

    공간복음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요한복음을 썼던 것은 바로 이 노스틱주의자들 때문이었습니다.

    요1: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의 말씀은 노스틱주의자들에 대한 엄청난 반증으로 그들에게 대항하는 말씀입니다.

    고전15:2-4절에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을 다른 말로 해석하지 않고 성경대로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요한도 그랬고 바울도 예수님의 죽으심은 성경을 응하신 일이라고 했습니다.

    시34:20절에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슥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 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이 말씀은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겠다는 부정적인 표현과 옆구리에 창이 찔릴 것이라는 긍정적인 표현을 통해 예수님이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것은 둘 다 십자가상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성경을 이루신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은 것은 예수님이 유월절 양으로 죽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출12:46절에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

    민9:12절에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 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

     

    하나님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월절을 지키는 방법을 말씀해 주시는 가운데 잡은 양의 뼈를 하나도 꺾지 말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뼈가 꺾이지 아니할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성경은 누구에 의해서 조작된 것이 아니며 편집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유기적인 영감을 주시므로 기록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지시기 위해서 애굽 사람들에게 열 가지의 무서운 재앙을 내리시는 중에 마지막에 동물의 맏새끼와 사람의 맏아들을 죽이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3일동안 집에만 있던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고 하셨는데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양을 완전히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명을 구원받은 날로 민족적으로 큰 명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을 바로 이것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죽음의 천사가 우리를 넘어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피묻은 손으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깨끗케 해주셨으므로 이제 죽음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도 없게 된 것입니다.

    슥12:10절에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 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슥13:1절에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을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서두에서 저가 국민일보 기사를 말하면서 이 말씀을 재림에 징조에 맞추어서 쓴 가사를 말씀해 드렸습니다만 이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실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여기에 "샘이 열리리라" 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의 뜻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흘리실 보혈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도요한은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샘은 또한 보혈로 씻음 받은 성도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고도 하고, 또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보혈의 샘이 다윗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린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이와 같은 축복의 샘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도 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인간이었고, 참으로 고난 당하시고, 참으로 죽으시고,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군병들은 두 사람의 다리는 꺽었으나 남은 자는 죽을 것을 알고 그이 다리는 꺾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리를 꺾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그들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예언된 그대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 주셨습니다.

    그는 뼈 하나도 꺾이지 아니한 유월절 어린양이셨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 드리십니까?

    그가 뿌리신 피는 여러분의 보증이 되셨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 모두에게 생명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내 생각으로 지식으로 믿으지지 않는 말씀있더라도 믿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 말씀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성취되었습니다. 앞으로 모은 예언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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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2013.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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