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숨은 믿음의 사람들(요19:38-42) [고난주간]
  • 2013.06.20 11:15:26
  • 사람은 두 종류가 있다고 봅니다.
    부정적인 사람과 긍정적인 사람입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어떤 사건을 보면서 부정적인 사고 봅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사람은 아주 좋지 않는 사건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봅니다.
    오늘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게 되는 사건도 여기에 관련이 되는 두 사람을 아주 부정적인 사람으로 내 몰아 붙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저는 좋은 면을 보면서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에 일어난 이들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때는 유대인의 명절 가운데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 때였고 또 안식을 하루 앞둔 날이기 때문에 이 안식일에 시체를 십자가에 그냥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에게 그 시체를 치워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은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다리를 꺾어서 치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운명하셨으므로 죽음을 재확인하기 위해서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니 거기서 물과 피가 쏟아져 나왔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모든 것이 우연같이 여겨질지 모르나 36절에 보면 이 모든 것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응해진 것이라고 사도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시34:20, 출12:46, 민9:12, 슥12:10)

    이렇게 되어서 예수님의 시체를 서둘러서 장례를 치르게 되는데 참으로 유감스러운 것은 베드로를 비롯해서 제자들이 나타나지 아니함으로 제자들 없이 장례를 치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만은 두려워서 도망했다고 해도 장례식 때에 만이라도 나타났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특히 예수님으로부터 병 고침 받은 사람들이나 죽은지 나흘만에 다시 살아난 나사로와 같은 사람들은 나타날 것도 같은데, 모두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겨우 여인 4명과 사도 요한만이 예수님의 시체를 인계 받아 장례를 치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들이 모두 너무나 가난해서 갑자기 예수님의 시체를 묻을 곳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장례를 치르려면 상당한 돈이 들지마는 그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무덤은 주로 동굴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동굴을 하나 만들어서 가족들이 죽으면 차례차례 집어 넣었습니다. 그런데 자연적인 동굴이 있을 경우에는 좀 나은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백돌이나 대리석으로 많은 돈을 들여서 동굴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자손손 그 동굴에 시체를 보관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체를 어디에다가 장사지낼지 몰라서 어려움 당할 때 아리마대 요셉이 만들어 놓은 새 무덤에 예수님을 먼저 모시게 되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가문을 위해서 사용할 소중한 무덤을 예수님께 드리는 귀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가운데서 흐뭇한 장면이 몇 군데 있습니다.
    하마터면 예수님의 장례식이 사도 요한과 네 여인만으로 대단히 초라하고도 쓸쓸하게 지낼 뻔했는데 의외로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그는 용감하게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내용으로 막15:43절에서는 요셉이 "당돌하게 시체를 요구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돌하다는 것은 보통 용기가 아닙니다.
    아리마대 요셉을 설명할 때, 눅23:51이나 마15:43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요, 고관이요, 부자임을 성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기로 할 때에 가편 투표를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눅23:51).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은 가능한한 못박지 말자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전형적인 경건한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당돌하게 감히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했고, 그리고 무덤을 제공했습니다.

    굉장한 용기요 헌신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아리마대 요셉이 파 놓은 무덤에 들어간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사53:9절에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라고 한 것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부자의 무덤에 들어가게 되실 것을 이미 예언하고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본문 38절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던 사람"이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드러나게 예수님을 믿거나 예수님을 따르지 아니하고 사람들에게 눈치 채이지 않게 마음속으로만 믿었던 것입니다.

    그는 비록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드러나게 예수님을 믿지는 아니했지만 막15:43, 눅23:51절에 보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진실하고 경건한 유대인이었던 것입니다. 아마 지금도 북한 땅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을 보자 제자들처럼 낙심하고 도망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담대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했습니다. 막15:43절에 보면,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당돌하게"시체를 요구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었습니다.

    요셉이 이에 어떻게 반응할지, 그리고 산헤드린의 미움과 징계를 무릅쓰고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나아가서 예수님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에 나타난 또 한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니고데모입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가 요한복음 3장에서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아리마대 요셉처럼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고 예수님이 과연 구역성경에 예언된 그 메시야인지 알고 싶어서 아무도 모르게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온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 왔을 때 나이가 예수님보다 훨씬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도리를 모르는 그에게 예수님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중생의 도리를 모르느냐?"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이 때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책망을 순순히 받고 돌아갔습니다. 웬만한 사람 같은 예수님을 보고 "젊은 사람이 심하구만!"하면서 혈기를 내고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겸손히 책망을 듣고 깨닫는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곁을 떠난 후에도 계속해서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가 비록 용기가 없어서 드러나게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는 못했지만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모습을 보자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고 뒤늦게 나마 담대하게 나서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장례할 때 필요한 물품 향품과 세마포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것은 옛날에 귀족과 왕족 정도의 수준에 있었든 사람들이 장례할 때 필요한 물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는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셨지만, 돌아가신 후 장례 치를 때에는 최고로 왕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고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지막에 충성을 바친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 살아 생전에는 언제 어디서 말씀을 들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니고데모도 한 번 밤중에 찾아온 것 이외에는 더 이상 자세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는데, 두 사람 다 고관이요,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요, 존경받는 지성인이며, 특히 하늘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오늘이나 내일이나 메시야가 올 것을 간절히 기다리는 철저한 성서적 신앙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으로는 숨은 교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감정적인 사람, 지적인 사람, 의지적인 사람입니다.

    감정적인 사람은 조금만 자극을 주면 당장 예수 믿겠다고 쉽게 결단을 합니다만, 신빙성은 없습니다.

    언제 또 다른 자극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지성적인 사람은 결단을 쉽게 하지 않습니다. 속으로 깊이 깊이 생각하고, 일단 결정을 내렸어도 자기 체면, 위신, 지위 등을 생각해서 말을 잘하지 않습니다. 물론, 분명한 것은 합리적 이론에서 확신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확신에서 합리적 이론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깊이 생각을 한다고 해서 예수가 메시야라는 결론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도마는 의심이 가장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져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가 없었지만, 일단 믿음 위에 선 뒤에는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의심이 많다고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의심을 위한 의심일 때가 문제이지,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경우에는 가장 확실하고 귀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비판 없는 믿음은 비판 없이 무너집니다. 그러나, 비판 있는 믿음은 비판 앞에서 튼튼하게 서서 신앙을 변증할 수 있습니다. 지적인 신앙은 확끈하지는 않지만 조용한 중에 깊이 들어가고, 특히 환난 때에 견고하게 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성도들은 두 가지 현상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어떤 드라마틱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극적인 변화로 분명하게 중생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태부터 신앙의 분위기 속에서 자라서 특별한 감동 없이 믿음이 있는 것 같기고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는 희미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대개 후자에 속화는 사람은 전자에 비해 자기의 신앙이 든든하지 않다고 걱정하는 것을 불 수 있습니다.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후자의 신앙은 어떤 계기, 즉 사건을 만나면 저 깊숙이 자리잡고 있던 자력이 나타납니다. 반드시 야단스럽게 화끈하게 믿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조용한 중에 깊이 든든하게 자라나는 것이 지성적 신앙입니다.

    분명하고 저력이 있으므로 시간이 갈수록 확실해 집니다.

    물론, 여기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인정은 하면서도 충성이 없고, 자기를 부정함으로 소극적이 되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결정적 사건 앞에서는 신앙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두 강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하는 일을 맡았던 군사들을 지휘한 백부장은 십자가 위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보고,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27:54)라고 했고, 누가복음에서는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눅23:47)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라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도 십자가 사건 앞에서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거나 오천명을 먹였을 때에, 메시야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이적을 보고도 그것을 메시야의 증거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보고서는 그 분이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받아들입니다.

    십자가 중심 신앙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들도 다시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병 고침을 받았으니 감사하고,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다가 다시 병들면 어찌합니까?

    돈을 좀 벌었다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감사합니까? 그러다가 손해 보면 어떻게 됩니까?

    병 고침을 받았기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람은 약간 걱정입니다.

    죽을 때에는 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돈을 많이 벌게되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고 감사를 드리지만, 그러다가 손해를 보게 되면 하나님이 떠나신 것으로 생각이 되어서 낙심한다면 이런 신앙은 참으로 문제가 많은 신앙인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믿는 사람은 환난과 시험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가장 귀한 증거요,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는 증거의 초점은 십자가에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세상적인 축복이나 어떤 이적에서 찾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찾아야 합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기적을 통해서 메시야이심을 안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였습니다.

    물론, 생각은 다 있었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말하기를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사람이라면 당신이 행하는 이적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이미 인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용기가 없고 위탁이 없을 것입니다.

    지적으로 인정은 하나 전적인 위탁이 없었단 말입니다.

    이제,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 모습을 보고 정말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임을 확증하게 됩니다.

     

    사람의 참 모습은  죽음에서 드러난답니다.

    진실은 죽음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니, 끝까지 보아야 하고 마지막 말을 들어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사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끝나느냐는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의 주위에서 보면, 살아 생전에 멋있는 사람 같았는데, 마지막에 가서 실망을 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끝을 잘 맺도록 소원하는 것은 중요한 기도제목입니다.

    에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 지휘관인 백부장과 함께 지키던 사람들이 예수가 죽으시는 모습을 보고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죽여 놓고서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중생의 도리를 말씀하시다가 마지막에 결론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느니라"고 니고데모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풀이하면 "내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것을 보아야 네가 정신을 차리겠구나, 그 날이 되어야만 네가 알겠구나" 하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 말씀이 사실화되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을 보고서야 모든 것을 다 알게 됩니다.

    이제서야 예수가 누구며, 이적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에게 헌신합니다. 깨달은 이상 더 주저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지성적 신앙, 숨은 신앙이 십자가 사건 앞에서 빛을 나타나게 됩니다. 이 엄청난 사건 앞에서 체면, 명예, 지위를 다 포기하고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만약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를 동정했다가는 예수님과 공동 운명에 들어갈찌도 모릅니다. 그래서, 모두 도망간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아리마데 요셉과 니고데모는 이 위험한 시간에 모든 체면을 다 버리고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 합니다. 얼마나 중요한 신앙입니까?

     

    아리마데 요셉과 니고데모는 앞으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릅니다.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릅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의 자격을 박탈당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담대하게 나서서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장례를 치렀습니다.

    본문 40절에 보면..........................................

     

    베드로와 두 사람과 신앙을 비교해 보십시오.

    베드로-"다른 사람이 다 주를 부인할지라도 나는 부인하지 않겠다. 죽을찌언정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다"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은 주를 따르겠다든지, 부인하지 않겠다는 장담을 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조용히 숨어서 비밀로 주를 믿다가 십자가 사건 앞에서 주님과 운명을 같이 하고, 귀한 일을 하게 됩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더 이상 숨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돌하게 빌라도에게 시체를 요구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예수처럼 죽어도 상관이 없다는 각오를 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십자가의 승리입니다.
    말없이 죽으신 예수님이지만 이미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을 사로잡아 참 제자 되게 하신 것입니다.
    환난이 있을 때에 거짓 신앙은 무너져버리지만 숨어 있는 신앙은 용기 있게 나타납니다.

    참된 신앙이란, 환난과 핍박 속에서 자기 모습이 나타나고 큰 위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겨자씨 만해도 살아 있는 믿음은 결정적인 시간에 드러나게 되고 열매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도 이 두 사람과 같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요셉을 변화시켰을뿐만 아니라 니고데모도 변화시켰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들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므로 변화되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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