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 마르다(요한 19, 28-30) [고난주간]
  • 2013.06.20 11:03:07
  • 제가 성지 순례 이야기를 조금씩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수난절에 맞추어 드디어 예루살렘 이야기 입니다. 예루살렘 성 맞은편에 올리브산, 또는 감람산이라고 부르는 조그만 산이 있습니다. 그 산의 아랫 자락에겟세마네 동산 기념교회가 있습니다. 예수님 기도하시던 큰 바위를 중심으로 아름다은 성전이 건축되었습니다. 성전 안에는 사람들이 모여 미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미사 뒷자락에서 동행했던 일행 중 하나인 전도사님 부부가 닭똥 같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기도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저는 사실 어떤 느낌에 젖어 볼 시간도 없었습니다. "지금은 일단 부지런히 보아두자"하고 애써 감정을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도사님 부부의 얼굴이 자꾸 눈에 뜨이면서 눈물이 솟기 시작했습니다. "저사람, 괜히 주책없이 울어가지고 나까지 울려!" 투덜대면서 사진을 계속 찍었습니다. 한쪽으로는 흐르는 눈물을 닥아내고, 한쪽으로는 카메라를 연신 찍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소가 주는 경건성이 저의 부질없는 분주함을 압도해 버렸습니다. 그 바위 위에 예수님께서 "아무개야 잠시도 깨어있을 수 없냐? 날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없겠느냐?"하고 외치는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아 그냥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만감이 교차 했습니다. 그 시간 그렇게 기도하고 싶을 수가 없었습니다. '기도 고파요.'하는 표현이 절로 나왔습니다. 눈을 감자 깊은 평화가 제게 찾아왔습니다. 잠시 후에 누가 등을 쳤습니다. "빨리 나오래요!"라는 재촉이 떨어져 "주님, 이따가 만나요."하고 기념 교회를 나왔습니다. 드디어 예루살렘 성안에, 버스로 들어가며 우리 일행은 "거룩한 성"을 합창했습니다. "예루살렘, 예루살렘, 오 거룩한 성아, 호산나 노래하자 호산나 부르자" 합창을 하면서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차에서 내리자 마자 주차장 까지 늘어선 매우 긴줄의 인파가 있었습니다. '여기 줄서서 언제 기다리나' 절로 한숨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가이드가 오더니 우리를 따로 불러 그 줄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줄 섰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제지를 합니다. 가이드가 아랍 말로 몇 마디한 후에, 우리는 인파를 헤쳐 당당하게 앞 으로 나아 갔습니다. 알고보니 그 줄은 회교도들, 또는 관광객들이 지금은 회교도 들의 최고의 성지가 된(옛날 예루살렘 성전 터) 회교성전을 순례하는 줄이었습니다. 회교도들은 이 성전을 한번 방문하는 것이 일생의 소원이고 의무라고 합니다. 성지를 순례하고 난 다음에는 이름까지 새로 지어주고 대우도 달라진다고 합니다. 제가 보는 그들은 매우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루에도 몇번씩 정해진 시간만 되면 이 성전이 있는 방향을 향해 절을 합니다. 그러다가 코를 땅에다 박고 기도를 합니다. 양치는 목동이건, 햇빛이 작열하는 사막이건, 들이건, 도시안 시장이건 그들의 철저한 철칙이었습니다. "우리가 저 사람들의 반의 반만 신앙을 갖게 되더라도..."하는 부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유대인의 기도처인 통곡의 벽에 들렀습니다. 이곳은 예루살렘 성벽 중 다 허물어지고 유일하게 남아있는 부분인데, 아래에서 3-4단 정도가 옛 성벽입니다. 구약에 "이 성전을 보고 기도하거든 이 기도를 들어 주시고..."라는 구절이 있어 사람들이 이 통곡의 벽에 이마를 대고 기도하기 위해 순례하는 유대교의 성지이기도 합니다. 줄이 쳐저있어 남자 기도처와 여자 기도처가 구분 되어 있었습니다. 머리에는 키파라는 모자를 쓰고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전부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기도 박람회와도 갔았습니다. 다른 언어, 다른 복장의 사람이들이 경건하게 기도하는 그 음률이 저절로 기도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되게 했습니다. 저도 무너진 벽에 이마를 대고 기도했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기도의 제목들이 생각나는 대로 교우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벽에 무수한 기도문들이 꽂혀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부러 그곳까지 기도하러 오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기도문을 인터넷으로 접수받아 통곡의 벽에 꽂아 놓는 대행업체 까지 있다고 합니다. 비아 돌로로사, 예수님 십자가행의 14처, 매우 의미있는 장소들이지만 지금은 장터가되고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상업화된 도시 길이었습니다. "원달라"를 외치며 이것 사라, 저것 사라고 조르는 사람들 틈으로 예수님께서 쓰러지신 곳, 여인들을 만나 "네 자녀를 위해서 울라"고 말씀하신 곳 등을 알리는 조그만 알림간판 역시 상품의 하나 처럼 걸려있습니다. 마침내 에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신 것을 기념하는 골고다 기념 교회에 닿았습니다. 이 곳은 비잔틴 시대에 희랍신전이 있는 자리가 옛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자리라는 증언에 의해 희랍 신전을 허믈어 내고 그 밑에 큰 바위를 발굴하여 그 바위를 중심으로 성전을 건축했다고 합니다. 성전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 상이 서있는데 흔히 보는 카도릭의 십자가 상이었습니다. 그 주변의 예수님의 흔적이 없을까를 살펴보았는데 별다른 흔적이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마치 사당 같이 촛불켜고 촛농이 녹아내려 지저분한 모습, 우리 민화 같은 그림 초상이 요란해서 예수님의 흔적은 찾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십자가 상, 그 아래 큰 바위가 노출되어 있었고 그 바위에는 나무 기둥을 꽂을 만한 자연스런 구멍이 보였습니다. 그 바위 구멍, 그것은 예수님께서 달리셨던 십자가가 꽂혀있던 그 구멍, 바로 그 구멍이었습니다. 바로 그 구멍을 보는 순간 눈물이 주루룩 흘러 내렸습니다. 순간 가슴이 두방망이 질을 했습니다. 그리고 겉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쏫아져 내렸습니다. 주변을 보니 모두가 눈시울이 빨개 졌습니다. 누군가 "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자연스럽게 찬송을 흥얼거렸고 곧 합창이되었습니다. 독일 사람, 미국 사람, 프랑스 사람 모두가 따라했습니다. 자연스럽게 합창이 되었습니다. 각각 다른 말로 불렀지만 이들이 흘리는 눈물 만큼은 하나였습니다. (다같이 찬송-"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를 부름) 제가 그 골고다 기념교회를 나오면서 전혀 눈물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왜 울었어? 예수님이 반가와서 울었어? 불쌍해서 울었어?"하고 짖궂게 물었더니 "글쎄, 십가가의 그 자리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막 나오데..."라고 답변을 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십자가만 보면 눈물이 나오고 심자가 만 보면 기도가 나오지요.

    요즈음 강동송파가 첨예한 지역이 되었습니다. 제가 강동송파의 총선시민연대의 상임대표를 맡고있어 요즈음 열심히 낙선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일복이 터진 사람인 것 같습니다. 하필이면 강동지역이 낙선운동이 표의 결과로 나타날 수 있는 핵심지역이 되었습니다. 낙선 대상자 86명 중, 아예 당선 가능성 없는 사람도 많고, 영남, 호남에서는 아무리 명단이 발표가 되더라도 소용이 없이 여전히 지역주의로 나타날 것이고 쟁점이 되는 지역들이 수도권 인데 강동을에 김중위, 종로에 이종찬, 부천 이사철, 구리 이건개 정도가 표로 나타날 수 있는 낙선 대상자들입니다. 서울에서의두 곳 중에도 이곳은 더욱 의미가 있는 지역이기에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샌드위치 맨 처럼 양쪽에 글씨가 쓰여있는 조끼를 입고 음식점과 경로당을 돌기도 하면서 주민들과 대화를 합니다. 선거라는 것이 참 치사한 운동입니다. 도망가는 사람을 붙들어 이야기를 해야하고 별로 원치 않는 상대의 쌀쌀한 눈살을 대하며 외쳐야하니 정말 스타일 구기는 쑥스러운 일입니다.
    한쪽으로 내가 왜 이렇게 열심히 하나? 생각해봅니다. 이렇게 한다고 내표가 한표 나올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우리 교인이 한사람이라도 늘을 것 같지도 않고, 내 주머니 털어 사람들 밥사먹이고 돈 써가며 이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어디서부터 내가 살짝 돌기 시작했는가? 아무리 보아도 저분(십자가를 가리키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분 만 아니면 내가 이렇게 무너지지 않고 체면차리며 편하게 지날 텐데... 자꾸 그 양반이 내 안에서 충동질 치는 바람에 공연히 욕먹어 가면서 이런일을 하는 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십자가가 무엇인가?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십자가의 피공로로 구원을 얻고, 예수를 영접하면 구원을 얻는다는데, "내가 예수를 영접합니다. 십자가의 피공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가? 열려라 깨! 하고 주문을 외우면 문이 열리는 것 처럼, 이런 고백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주문인가? 하나님은 이 주문에 꼼짝없이 묶여서 우리에게 구원을 내려 줄 수 밖에 없는 존재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로봇이란 말인가? 예수께서 "인자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러 왔다"(막10,45)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한사람의 죽음으로 앞으로 오는 모든 세계의 속한 사람들이 자동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가? 그 사실을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단번에 완성되는 우주적 구원의 드라마이며 단 한번으로 모든 구원을 결정짓는 완결판인가? 우리는 단지 주문을 외우거나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면 되는가?
    아닙니다. 내용없는 십자가는 단지 악세사리일 뿐입니다. 주문 외면 구원이 떨어지고 십자가의 부적을 부착하면 하늘나라가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우리의 주문대로 가만히 앉아서 신통력을 행사하는 도사가 아닙니다. 그러면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지금 물리적 십자가가 있숩니까? 우리가 매일 "십자가, 십자가" 하고 고백하지만 요즈음 거리에 누가 십자가를 지고 다니는 사람있습니까? 사실 십자가는 로마시대에 정치범을 다루는 형틀인데, 지금은 로마도 없고, 십자가도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시대에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꼭 하지 않아도 되는 일, 그 일의 한 자락을 굳이 내가 지고가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외면하고 갈 수도 있는 일, 그 일을 부득불 내가 나서 걸머지고 가는 것이 십자가 아닙니까?
    누군가 치워야할 이 역사의 짐덩어리를 내가 팔 걷어 부치고 한쪽으로 치워놓는 것이 우리의 십자가 인 것입니다. 오늘 이런 십자가는 약간 맛이 간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제 일에 손익 게산이 전혀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 십자가를 지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길이 예수께서 가신 길이기에 우리는 그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는 놀라운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지난 주일 예배를 마치고 바로 총선시민연대 전국대표자 회의가 있어 동두천 쪽에 외떨어진 수련관에 모였습니다. 회의장에 도착하자마자 보안을 위해 핸드폰도 맡기고 나가지 못하게 차 열쇄도 맡겼습니다. 지난 번 낙천자 발표시 기자회견을 하고 발표하기로 하였는데 사전에 명단이 유출되어서 회견 전에 명단 보도가 나가버린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밤이 꼬박 새도록 회의를 하고 다음날인 월요일 총선시민연대에서는 낙선 대상자 86명을 발표했습니다. 
    대상자 한명 한명을 검토하면서 밤을 꼬박 새우고 토론을 했습니다. 각 지역 총선연대 대표들이 강한 사투리로 발언을 했습니다. 역시 극성 스럽기는 단연 대구 대표였습니다. 두 사람이 나와서 서로 번갈아 이야기하며 거의 독점하다시피 반복되는 주장을 했습니다. 사회자와 다른 대표들의 핀잔을 받아가며 발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광주 대표도 이에 못지 않았습니다. 역시 다른 사람들의 눈총을 받았습니다. 발언 태도나 강한 사투리 억양이 번갈아 가며 피곤한 회의를 더욱 길게 만들었지만, 그 내용을 보면 감동스럽기까지 합니다. 대구 대표건, 광주 대표건 이 사람은 꼭 넣어야 된다는 것이고 중앙 총선연대의 입장은 그 정도의 증거로는 명단에 넣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대구 대표는 이 사람이 말끝마다 "이 정부가 대구 공장 다 부도내고 전부 호남으로 빼돌렸다"고 하는 사람인데 왜 안넣느냐는 것이고 광주 대표 역시 이 사람 말끝마다 "호남인이여 단결하자"를 외치며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사람인데 꼭 넣어야한다 발언이었습니다. 강한 억양의 사투리 틈새로 영남도 호남도 아닌 다른 실체가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민족이란 실체가 만져졌고 민주시민의 양심이 느껴지는 깊은 감동이 있었습니다. 한 지역에서는 7선 의원인데 개인 재산이 320억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세입자들의 전세금을 반환하지 않고 버티다가 고법 판결이 나서야 전세금을 반환하는 아주 나쁜 악덕 인사라는 것입니다. 그래 이 지역에서 만장일치로 우선적인 낙선대상자로 올린 사람인데 다른 사람은 들어가고 이 사람 빠진 것이 무슨 이유인가를 따졌습니다. 대구 대표도, 광주대표도 모두가 일등 대상자를 빼놓은 것에 반발했습니다. 그 사람을 잘 아는 그 지역의 정서로는 분명히 그들이 더 더욱 나쁜 사람들입니다. 다른 대상자보다 훨씬 나쁜 사람이다는 그 지역의 강력한 주장있었으나 그들은 법으로 걸린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들은 투표를 통해 이들은 낙선 대상에서 제외 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낙선 대상자를 86명 선정하기는 하였으나 증거가 없어 선정하지 못한 더욱 나쁜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으로 압니다. 시민운동이 국민의 80%의 지지를 받니 뭐니해도 과연 몇 석을 갈아내고 표로 나타내 보일까는 지극히 의심 스럽습니다. 오늘의 이런 정치상황을 보면 예수님은 "목마르다!"라고 외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마지막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에 "목마르다"고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는 사람이 제일 많이 애원하는 것이 "목마르다"는 애원입니다. 십자가는 손과 발에 못을 치더라도 이 것으로 목숨을 잃지는 않습니다. 금방 피가 응고되고 대신 사막의 뜨거운 햇빛에 온몸을 말려냅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극도의 갈증 속에서 서서히 죽어 가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보름, 한달씩 목숨이 유지되며 십자가 밑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을 한방울 만 혀에 찍어 달라는 애원을 하다가 숨지는 것입니다. 마치 생선을 햇빛에 말리듯 사람을 말려 죽이는 잔인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목마르다고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시편 69,21의 말씀을 가리키는데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 그들은 나에게 독약을 주고, 목이 말라 마실 것을 달라고 하면 나에게 식초를 내주었습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신포도주는 예수님의 갈증을 적셔주기 위해서 드렸던 것이 아닙니다. 신 포도주는 예수님의 목을 축이는 것이 아니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더욱 갈증을 유발시키는 독약과 같은 것을 적셔드린 것입니다. 목이 마른 상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이지요, 목이 말라 애원하는 분에게 그런 것을 내 놓는 현실이 바로 목마른 현실입니다. 이런 일은 예수께서 예비된 길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라고 하고, 마지막 탄성과 같이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우리의 "다 이루었다"는 나의 주머니가 채워져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는 자신을 덜어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다 이루었다"는 나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는 오히려 배반당하고 찢기우고, 조롱당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 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너희에게 복이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너희의 받을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같이 박해를 받았다."(마태 5)

    그러면 우리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내 몫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아직 우리는 상받을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목을 채우는 일보다는 목마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그들을 위한 음료로 내어주시고 그들을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는 나무 꼭대기에 매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목마르다"라고 소리치며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남의 메마른 가슴에는 샘물을 파주면서 자신은 끝내 목말라야 했습니다.

    파송)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여러분은 무엇에 목말라 하십니까? 조롱처럼 신 포도주가 여러분 입에 물려질때라도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구원을 가져다 주는 신기한 부적입니까? 여러분 몫의 십자가를 기다리는 구원의 현장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골고다의 십자가들이 지금 부르짖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목마르다" 고 저렇게 큰 소리로 외치고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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