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때리더라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다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서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성도 여러분 인간의 참 모습은 극단 상황에서 보다 선명하게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평안할때는 진실이 숨겨질때가 많습니다. 또 일이 잘되고 무사할때는 의가 감추어질때도 많습니다. 선 인지, 악 인지, 의인 인지, 죄인 인지, 사랑 인지, 미움 인지, 알수 없게 혼돈 될 때가 있습니다만은, 극단 상황에 오면 그 진실이 보다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광과, 칭찬과, 부귀와, 그리고 분에 넘치는 형통과 성공 뭐 이런때는 무엇이 의 인지, 악 인지 알수가 없 습니다. 그저 거짓된 자도 영광을 누리고 그리고 위선도 진실한 선처럼 통할때도 있습니다만은 재난이 있고, 가난과, 질병과, 실패와 수욕, 고독, 그리고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될때 이제 모든 거짓은 다 물려 가고 진실만이 선명하게 나타나게 되는 줄 압니다. 특별히 무제한 가운데서 극단적 고난을 당하게 될때에 그 존재 자체가 확실하게 노출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본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분 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대로 묻혀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에 말대로 말하면 hidden word 숨겨진 말씀이다. 숨겨진 하나님에 말씀으로 그대로 묻혀 있었습니다만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기 시작 할때 예수님에 모습이 드려납니다. 예수님께서 사역 하실 때 병 고치시고, 불쌍한 사람들을 방문 하시고, 하나하나 돌보고 계실때 좀더 확실하게 주님에 모습이 드렸났습니다만은 결정적으로 주님이 주님 되고 그가 하나님에 아들 되는 것은 역시 십자가 사건에서 엿볼수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예수님에 교훈 십자가를 생각지 않은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에 이적 별로 문제 될것이 없습니다. 그 의미가 대단한 것 아닙니다. 문제는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그에 교훈과, 그에 능력과, 그에 본능들이 다 새로운 의미로 나타나게 되고 제 해석 되게 되는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나서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빌라도 법정에 서신 사실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 사도 바울은 디모대후서 6 : 13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빌라도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신 예수그리스도 빌라도 앞에 서신 선한 증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시간이 결정적 시간 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에 아들 되심과 예수가 누구신지 또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하나님에 자녀는 어찌 해야 되는지 예수에 제자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또 읽고, 또 읽고 깊이 명상해 보세요. 그러면 앞이 환하게 보일 것 입니다. 주님과 나만이 아는 신비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도 그렇게 표현합니다만은 저도 같은 단어를 쓰고 싶습니다. 예수님에 humanity 인간에 모습 예수님에 인간 존재에 모습이 바로 빌라도 앞에서 확 들어나게 됩니다. 분명해 집니다. 아주 선명해 집니다.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에 모습을 조용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흔히 말하기를 빌라도 법정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건 하나에 대명사가 됐습니다. 빌라도 법정 죄 없는 자를 죄인으로 만들어서 십자가에 못박은 잘못된 죄판에 의인을 죄인 만드는 재판을 혼히 역사적으로 말하기를 빌라도 법정 이렇게 말합니다. 잘못된 죄판에 대표적인 아주 극치적 상징 이라고 보겠습니다. 그런데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에 모습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엄청난 말씀이 있습니다. 두고두고 들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개개인에게 주시는 확실한 말씀이 그 속에 있습니다. 이제 그 말씀을 듣을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빌라도는 예수를 알아볼 길이 없었습니다. 그 처럼 세상에 취해 있고, 권력에 취해 있고,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를 알겠습니까? 아무리 봐도 예수를 알 길이 없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니 이 사람을 보라 이 사람을 보라 도대체 알 수가 없는 사람이요. 어디 이런 사람이 다 있냐 말이예요. 이런 사람 들어 본 일도 없고 만나 본 일도 없는 거지요. 역사에 딱 한 번 있는 사건 앞에 빌라도가 딱 만났는데 지금 이렇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신학적으로 생각해 보면는요 이것은 바로 팍스와 샬롬에 대결 입니다. 팍스와 샬롬이 만나는 시간입니다. 팍스라는 말은 영어에 peace라는 말에 원어 입니다. 라틴어 인데 팍스란 곧 뜻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조용한 평화입니다. 평화는 평화데 힘으로 이루어지는 평화입니다. 강한 권력자가 있으면 모두가 조용합니다. 감히 입 벌리는 자가 없습니다. 감히 못된 생각도 못 합니다. 공동 묘지에 조용함 같이 조용 합니다. 이게 평화입니까? 대모가 없어요. 거기는 파업도 없어요. 성명서도 없어요. 소리 지르는 일도 없어요. 조용합니다. 마치 수용소에 고요함 같이 강제 노동 수용소에 고요함 같은 고요함 입니다. 이것이 로마가 지향한 평화 입니다. 평화요 팍스요 여기에 전통한 사람이 바로 빌라도 입니다. 그 대표자 입니다. 힘으로 이 나라를 다스리고 이 사회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힘에 상징으로 이 땅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조용했고 또 앞으로도 제발 조용하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을 그는 평화 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 앞에 섰습니다. 그는 지금 죽음앞에 섰습니다. 모순된 재판 앞에 섰습니다. 결과를 다 알고 서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마음은 고요했습니다. 조용히 명상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 얼굴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들끊는 생각도 없고 번요 분요 한 마음도 없습니다. 이미 결론을 다 가지고 조용히 섰습니다. 침을 뱉든지 가시 관을 씌우든지 홍포를 입혔다 벗겼다 하든지 갈대로 치든지 말든지 무슨 일을 해도 상관하지 안고 조용히 서 계시는 침묵하는 예수님에 모습을 봅니다. 빌라도가 이것을 알리가 없습니다. 이 이상한 사람좀 보라 이 사람을 보라 그렇습니다. 빌라도가 이해할 수가 없지요. 특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죽음 앞에서에 담담함 입니다. 빌라도는 죽는 것은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죽음에 뒤에 영원한 생명을 말하니라 부활에 아침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죽음 앞에 고요함이라 조그만 어두운 그림자도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여기에는 구차한 변명도 없습니다. 살아볼려고 요리조리 몸부림 치지도 않습니다. 뭐 이렇게도 말해보고 뭐 저렇게도 재주를 부려보고 한 마디 일변용이 없이 죽음앞에 담담히 섰습니다. 십자가에 죽음 앞에 서신 예수님에 모습 거기에 위대한 힘이 있지 안습니까? 또한 빌라도는 듣어서 압니다. 그가 얼마나 능력을 행했다는 것을 병 고친 사람, 고친 받은 사람, 죽었다가 살았다는 이야기, 바다를 고요하게 한 이야기, 많은 사람이 따른다는것 왜 빌라도가 모르겠습니까? 옳은 정보를 통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결정적 시간에 능력이 나타나지 안느냐는 거예요. 예수님에게 가시관을 씌우는 사람이 그 가시에 찔려 자빠져야 되는게 아니예요. 예수에게 침을 뱉는 사람이 벼락을 맞아 죽는 것 보아야 되는거 아니요. 어째서 조용하냐 이 말이요. 능력인 사람인데 왜 이 시간만은 무능하게 아무 능력도 없이 초라하게 이대로 서 있느냐 이거죠. 그런가하면 시기와 질투 때문에 예수님이 여기 끌려 왔다는 것을 빌라도는 잘 알고 있어요. 죄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고 재사장과 바릿세인들 서기관들이 이들이 음모를 해서 자기 인기가 떨어지니까 예수님이 높아지는 것 알고 이것을 잡아왔구나 잘 알고 있어요. 빌라도는 또 예수님도 알고 계세요. 그런데 한 마디쯤 변명할 것 같은데 말이 없습니다. 저 사람들 때문입니다. 시기 질투 때문입니다. 이건 사실 이기만큼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야 될것 아니요. 그 말 한 마디도 말이 없어요. 우리는 때때로 진실을 밝히겠다고 들다가 진실이 점점 더 멀어집니다. 예수님 말씀 말씀이 없어요. 특별히 부당한 대우를 받습니다. 분명히 성경은 모순입니다. 왜 죄 없다고 했습니다. 죄 없는것을 너희에게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때리는것 입니까? 왜 가시관을 씌우는 겁니까? 이렇게 부당한 매를 맞습니다. 죄 없다고 하면서 왜 매를 치는 것입니까? 그래도 대답이 없습니다. 이것이 팍스와 샬롬에 만남이올시다. 예수님으로서는 이렇습니다. 누가복음 구장 오십일절에 보면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 했다고 했습니다. 이미 결심된 거예요. 이미 작정된 일이예요. 그런고로 이 시간에 구차하게 이러고 저러고 할께없어요. 시종일관 그대로 가는 것 입니다. 마태복음 20 : 28 보면 "인자한 것을 섬김을 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요. 섬기려 하고 도리어 자기 생명을 대선물로 주려고 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섬기려 왔습니다. 제물로 왔습니다. 대 선물로 왔습니다. 그렇다면 시작이 그러면 끝도 그래야 합니다. 세상이 몇번 곤두박질을 하던 말던 그렇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때때로 이것 때문에 갈등이 생깁니다. 자 섬기겠다고 하면 끝까지 섬기지요. 이 사람을 봉사 하겠다고 하면 봉사하면 되지 이제와서 왜 봉사 받을려는가 뭐 알아주느니 안 알아주느니 바로 요 별것도 아닌 이것 때문에 당신에 마음은 어지러워 지는 거예요. 예수는 섬기려 했으니 섬기고, 죽을려고 왔으니 죽으면 되는거지 여기에 누가 어떻게 하느냐 상황이 어떻게 변하느냐 그런 것 저런 아랑곳이 없었더란 말이예요. 예수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밀알 한알이 땅에 떨어져 줍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 결심 한대로 행하고, 말씀 한대로 행하고, 가르친 데로 자기가 가는 것 입니다. 말은 하고 행동이 없고 시작은 해놓고 끝이 없는 거예요. 이래서 문제가 있고, 이래서 평화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은 지금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이렇게 출발 했고, 이렇게 끝낼 것이니까 말입니다. 여러분 이 침묵에 깊은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빌라도는 지금 예수가 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도 계속 그 얘기를 합니다. "무제하다 무제하다" 그러면 무제하다는 것을 알면서 지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빌라도 앞에 무슨 말을 해야 됩니까? 아 모르는 자는 알리겠지만 알고 행취 않는 자에게 왜 또 말이 필요합니까? 여러분 가끔 보면 필요없는 말이 많아요. 다 아는데 말이요. 이제는 결단만이 필요할 뿐이요. 여기에 무슨 구구한 말이 필요합니까? 그런고로 빌라도 앞에 말이 없어요. 말이 있다면 속에 있습니다. "너가 아는데로 행하라" 알고 여러 가지 이유에 위해서 행취 못하고 벌벌 떨고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빌라도 앞에 이제 더이상 할 말은 없습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생명을 다 위탁해 버렸습니다. 바로 어젯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에 뜻대로 하옵소서 그 아버지에 뜻대로 하시옵소서 아멘 하는 순간 모든 일은 다 끝났습니다. 그 후로 상황히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누가 배신을 하든 누가 침을 뱉든 누가 욕을 하든 그런 이야기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나와 하나님 하고 관계에서 이미 일은 다 끝났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침묵입니까 이것이 침묵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그런 말을 많이 봅니다. 뭐 무슨 교인들이 혹은 어떤 교회에서, 혹은 어떤 상황에서 보니까 성명서가 많이 나와요. 성명서 신문에 성명서를 내 나는 생각합니다. 기독교인 에게는 성명이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변명 거리란 없는 거예요. 무슨 성명이 필요합니까 오직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이 당시 사람들은요 이렇게 사람을 죄 없이도 때려 죽이기도 하고 그러면서 그 때리고 그 다음에 꿈틀거리고 괴로워하고 뭐라고 소리지르고 하며 반항하고 그걸 줄기는 거예요. 박수를 치면서 줄기는 것이예요. 이것이 옛날 사람들에 잔인한 오락이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조롱 거리로 만드는 거예요. 가시관을 씌우고 홍포를 입히고 갈대를 찔리고 유대인에 왕이요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리고 뺨을 때립니다. 어쩌나 보자 이거지요 예수께서 이 시간에 그들에게 구경 거리를 제공할 마음은 없어요. 이제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이런떼는 뭐라고 말하나 보자 이 만큼 고난을 당하고 괴롭히면 어떤 자세로 나오나 보자 이래서 예수님께 매질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 이에 대해서 말씀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아무 말씀도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오히려 두려워 했다고요 지금 제 방에 하나 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러시아에서 유명한 화가가 그렸다고 하는 그림 하나를 보내온게 있는데 거기 보면은 예수님과 빌라도가 둘이 딱 만나는 시간 큰 얼굴로 둘이 딱 만나는데 예수님 조용합니다. 빌라도는 군복을 입고 투구를 썼습니다만은, 그 앞에서 지금 벌벌 떠는 모습입니다.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은 나름대로 화가가 그려놓았습니다. 여기에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는 영적 군세가 있습니다. 빌라도는 세속적 권세를 쥐고 큰 소리는 지르는 것 같더라. 그 얼굴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 모습이 어디 있습니까? 일본 사람이요 카톨릭 문학가인 기독교 문학가라고 볼 수 있는 소위 유명한 엔또슈사크가 쓴 침묵이라는 책을 보신분이 아마 많을 것입니다. 그 책에 내용을 다 말씀 드리지는 못합니다만은 세반스티안 노드리얼 이라고 하는 포르투갈 신부가 일본에 찾아와서 선교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에 보도미에 이에야스가 기독교인을 모조리 잡아 죽이게 됩니다. 큰 핏박에 수만명이 죽었습니다. 그 순교 사화를 역사적 사료를 가지고 기록한 그런 내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사람들을 죽일 때에 나가사키 영주인 이노우에가 고완 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뭐냐면 후미에라고 하는 것입니다. 후미라는 것이 바른다는 그림이라는 것이지요. 후미에 그림을 밟는다 그런 뜻 입니다. 후미에라고 하는 그런 이상한 제도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사진을 대략 이렇게 동판에다 그린거예요. 동판에다가 그린 그 그림을 이런 판자 쪽에다가 또 붙혀 놓고 이걸 땅에다가 논 다음에 뭐 확실한 그림도 아니지요. 대층이 사람에 얼굴 처럼 그려놓고 이 예수님에 그림이다. 예수님에 얼굴이다. 이렇게 해놓고는 이걸 밟고 지나가는 사람은 살려 주고 이걸 밟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은 죽인다 이겁니다. 그래가지고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그 그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을 밟는다는 것은 신앙을 배반한 것이 됩니다. 사실 이것을 처음에 만들때는 될 수 있는데로 많은 기독교인을 살려주기 위해서 아니 뭐 이것 아무것도 아닌 그림이니까 밟고 지나가면 산다. 살려주기 위해서 만든 법인데 의외로 사람이 이렇게 많이 죽을줄 몰랍답니다. 여기서 바로 이 후미에라고 하는 이 사건 앞에 로드리어 신부가 딱 서게 됩니다. 그는 밟으면 살고 지나가면 그가 그림 앞에서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럴때에 로드리 신부에 귀에 예수님에 말씀이 들려왔답니다. "나를 밟아도 괜찮다 나는 본래 밟히기 위하여 세상에 온 것이 아니냐 그런데 나 를밟는 너에 마음이 몹시 아플거야 오늘날 까지 나에 얼굴을 밟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너에 마음도 아플거야 밟히긴 하지만 나는 너가 마음으로 아파해주는 그 사랑으로만 충분하다 밟바라" 이러한 음성이 들려왔답니다. 로드리에스는 말했습니다. "주여 당신이 언제까지 침묵하고 있는것을 나는 원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대답하십니다. "내가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너와 함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을 바닷가에다 세워놓고 십자가 형틀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물이 들어와서 민물이 차올때 사람들은 물 속에 빠져 죽게됩니다. 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신부가 소리를 지릅니다. "하나님이여 언제까지 이렇게 침묵 하십니까? 왜 보고만 계십니까?" 다시 주님에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에 고난에 동참하고 있느니라" 여러분 하나님에 침묵, 예수님에 침묵, 빌라도 앞에 서 신 예수님에 모습을 자세히 보세요. 여기에 우리를 향한 주님에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기다림이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용서가 있습니다. 오늘도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아픔 고난에 내가 동참하고 있노라" 여기에 신비로운 역사가 있습니다. 저 부활에 아침을 바라보며 평화롭게 조용히 침묵하시는 주님에 모습 깊이 생각하고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따라가야 할 길입니다. 여러분 말을 이젠 고만 하십니다. 조용히 주님과 함께 고난에 길을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