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 앞에서(요19:1-16) [고난주간]
  • 2013.06.20 10:25:20
  • 어떤 사람이 자기의 사상 때문에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군인이 독배를 가지고 와서 이 사람에게 건네주고는 그 사람 앞에 엎드려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왜 죽어야 합니까? 저는 나라의 법에 의하여서 수행할 따름입니다. 피할 수 있으면 이 자리를 피하십시오." 이때 이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나라의 악한 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하고는 독배를 마시고 그 인생을 마쳤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사상과 철학 앞에서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사상과 철학을 위하여 성실하게 그 인생의 길을 걸어왔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위하여 생명까지도 던지는 모습을 그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역사를 통하여 또한 이 세상에 수많은 학자들의 사상과 철학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것을 주장하고 강의하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사상과 철학 때문에 어려움이 오고 손해가 나고 고난이 오면, 그 사상과 철학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사상을 위하여서 성실히 살지 못하고, 그리고 자기의 사상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저와 여러분들은 주님 앞에 서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와 죽음에서 자유 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삶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아들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살아가는 신부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려움이 없고 좋은 일이 있을 때, 또한 어느 정도 평범하게 살아가면 주님 앞에서 믿음의 정절을 잘 지키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믿음 때문에 어려움이 오고, 고난이 오고, 손해가 나면, 우리는 그 믿음을 매우 가볍게 버리고 살아가는 경우가 없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은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환경이나 어려운 환경이나 기쁘든지, 슬프든지, 고난이 오든지, 좋은 일이 있든지, 언제든지 주님 앞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관원이었고 지식이 있었던 부자청년은 예수님 앞으로 와서 엎드렸습니다. 그는 영생의 길을 걸어가기 위한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결국 물질 앞을 결코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그의 몸이 엎드렸지만 그는 물질 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의 평생이 주님 앞을 떠난 멸망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군대에게 포위되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제 죽음이 경각에 다해 있는 상황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시편 27편을 보면, "주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요 생명의 능력입니다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며,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그는 죽음이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도 여호와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그는 왕이 되어 큰 성공을 했을 때에도 언제나 여호와 앞에 섰습니다. 잘못하여 죄를 지었을 때도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들! 여러분들은 지금 주님 앞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 앞을 떠나 다른 곳에 서 있습니까? 먼저 자신에게 정직하게 질문해 보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누가 그리스도인입니까? 누가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바꾸어 설명을 드리면 주님 앞에 있는 것 같은데, 언제나 주일마다 나와서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사실은 믿음을 잃어버리고 불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주님을 떠나가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서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앞에 선 이유가 무엇이었느냐 하면, 예수님을 죽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없앨려고 그들은 주님 앞에 섰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자기의 종교적인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제거할려고 주님 앞으로 왔습니다. 제자들은 어떠합니까? 이 제자들은 예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가고 주님을 위해서 죽겠다고 말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육신이 약하여서 주님 앞을 떠나 버렸습니다. 군병들은 어떠합니까? 예수님 앞에 있기 있었지만 주님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예수님을 죄인 취급했고, 채찍질하고, 손바닥으로 때리고, 침 뱉았던 사람들이 군병들입니다. 군중들이 있었습니다. 유다 백성들, 예루살렘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오늘 종려주일인 것처럼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호산나" 찬양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옷을 벗어서 깔아주었던 군중들입니다. 이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선동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서는 사람들로 바뀌어져 버렸습니다. 위에서 선동하는 사람을 따라가 버렸습니다. 우리들에게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없습니까? 제자들과 같은 모습은 없습니까? 군병들과 같은 모습은 없습니까? 군중들과 같은 모습은 없습니까? 그 4종류의 사람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 있다면, 주님 앞을 떠나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 앞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빌라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6절 말씀을 제가 다시 한번 봉독 해 드리겠습니다.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니라"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넘겨주었다'라고 오늘 본문의 말씀이 기록합니다. 결국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십자가형을 가장 최후로 결정하고 사형언도를 한 사람은 빌라도입니다. 본문의 말씀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빌라도는 주님 앞에 있었지만 주님을 떠나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최종적인 결정을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빌라도는 어떤 사람입니까? 앞뒤의 문맥 전체를 살펴보면, 두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빌라도의 마음은 두 갈래로 갈리어지고 있습니다. 그의 한 쪽 양심적인 마음에는 어떤 생각이 있었느냐 하면, '주님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일 수 없고 놓아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 마음 한 쪽의 생각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의 말씀 4절과 6절에도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 "놓아주어야 된다"고 수없이 이야기 했습니다. 18장에도 그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있고 군중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라고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8절 말씀을 보십시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였다." 한 쪽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 있는가 하면 대제사장들과 하속들, 그리고 무리들이 예수님을 죽이라하는 그 말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여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한쪽은 양심적으로 예수님을 죽이지 말아야 된다는 생각이 있고, 한쪽에는 저 사람들을 볼 때 예수님을 죽여야 된다는 두 마음으로 가득차 있던 사람이 빌라도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 당시에 로마제국은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고,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대개 식민지에 대한 정책이 관대하였습니다. 자기 민족이 자기 나라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했고, 자기 민족이 가지고 있는 신앙은 자유롭게 지키도록 했습니다. 성경에 읽어보면 로마군인 중에 유대교를 믿는 사람이 있지 않았습니까? 신앙의 자유를 주었고, 주거와 삶의 자유를 주었습니다. 매우 관대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만은 엄격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민란이 일어나서 폭동이나 내란이 일어나면 로마 군대를 파견하여 가차없이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민란을 통한 내란이나 폭동이었습니다. 그 지역에 내란이나 폭동이 일어나면 총독은 가차없이 파면이 되어졌습니다. 빌라도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한쪽이 양심적으로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지 않고 살려야 되겠다는 생각이 있고, 한쪽의 생각에는 자기의 지위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여야 된다는 두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의 지위를 집착하는 마음을 따라감으로 말미암아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고 있습니다. 누가 예수님 앞에 서 있지 않는 사람입니까? 두 마음을 품어서 주님의 뜻과 전혀 다른 마음으로 선택을 해서 그 길로 걸어가는 사람, 그 사람은 주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입니까? 누가 주님 앞에서 믿음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그 사람은 오직 주님의 뜻을 따라가는 한 마음을 품는 사람입니다. 두 마음을 품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에게 오는 고난을 회피합니다. 언제나 자기에게 유리한 삶을 결정하는 사람이 두 마음을 품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선택합니다. 자기의 환경이나 여건을 통하여서 손해나 나고 고난이 오고 환란과 핍박과 눈물과 어려움 이 있어도 주님의 뜻대로 사는 믿음을 선택하는 한 마음을 가지는 사람, 이 사람이 주님 앞에 선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 때문에 베드로가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재판을 받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산해드린 공회라는 것이 어떤 곳입니까? 우리 나라로 말하면 대법원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굉장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지식이 있는 사람들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만들어진 재판 아닙니까? 그 앞에 선 베드로 참으로 보잘 것 없습니다. 어부 출신입니다. 지식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담대하게 말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의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준 적이 없도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이 있다"라는 것을 자신 있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 때문에 감옥에 가지요. 또 죽을 날짜까지 받습니다. 베드로는 한 마음입니다. 생명을 각오하고 주님께 자기의 전부를 내놓는 것입니다. 비자 앞에서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와 전혀 다른 모습이지 않습니까? 비자 앞에서 예수님을 3번 부인한 베드로는 두마음이 있었지요? 두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로마 감옥에서 마지막 여생을 보내면서 복음을 증거하는 바울 곁에 누가와 데마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누가는 어떤 사람입니까? 바울과 끝까지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개성이 강한 사람입니다. 그 바울과 끝까지 함께 있는데, 이 사람은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는데 동역자가 되고 바울의 병을 치료하는 의사의 역할을 했습니다. 누가는 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울을 향하여 한 마음이 있는 것뿐만 아니라 누가는 겸허하게 예수님 앞에 서 있는 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읽어보십시오. 누가가 기록한 것인데 자기 이름은 한번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주님을 위하여 한마음을 가지고 있는 누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데마는 어떠했습니까? 바울의 선교에 동역했습니다. 바울을 도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 곁을 떠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바울 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두 마음을 품어서 주님 곁을 떠나 버린 사람이 데마였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회피하지 않고 주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구 입니까? 그 사람은 예수님을 향하여 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다른 마음이 전혀 섞이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오늘 이 시간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주님 앞입니까? 주님 앞을 떠나 다른 곳에 서 있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지위 때문에, 옆에 있는 사람 때문에, 환경 때문에, 자식 때문에, 건강 때문에,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 때문에, 두 마음이 되어서 주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는 빌라도의 죄를 우리가 짓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몸은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두 마음을 품으면서, 죄를 지으며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종려주일 이 예배를 드리면서 내일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의 바로 전날 예배를 드리면서 저와 여러분 모두가 다 두 마음을 가지고 있는 빌라도의 죄가 있다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중학교 밖에 졸업을 안했습니다. 20년 동안 구두 공장에서 직공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조그만 양화점을 차려 놓고 구두를 만들어 팔기도 하고 구두를 고쳐주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드디어 60이 가까이 와서 트럭을 하나 사서는 구두행상의 여행을 시작합니다. 이분이 왜 구두 행상의 여행을 하는가? 이분은 중학교만 졸업하고 일평생 구두 고치는 사람으로 살았는데, 구두 만드는 사람으로 살았는데 이분의 마음속에는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초등학교 때에도 중학교 때에도 늘 시를 쓰는 연습을 했습니다. 시를 꼭 써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구두를 만들고 구두를 고치고 구두를 파는 일을 하면서도 언제나 시를 썼습니다. 93년 2월에 '문학 공간'이라는 잡지를 통해서 등단을 했고 그때가 50세를 넘었습니다. 94년에는 '그리움으로 바라보는 영혼'이라는 시집을 내었고, 지난해에는 '고개 넘어 아버지 집'이라는 시집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이분이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을 책에서 읽어보았습니다. "나는 시를 쓰고 싶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안해도 좋다. 못 먹어도 좋고, 병들어도 좋고, 잠자지 않아도 좋고, 오직 시만 쓸 수 있으면 된다."라는 고백을 했어요. 시를 쓰는 한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이러한 고백을 합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는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런 고백을 합니다. 바울의 만년 고백입니다. "너희을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이 바울은 주님을 향한 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예배를 드리면서 모두가 다 주님 앞에서 오직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며 오직 주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주님의 말씀만을 순종하여 나가는 한마음을 회복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의 고난에 회피하지 않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향한 한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까? 바꾸어 설명을 드리면, 두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주님을 떠난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입니까? 본문의 말씀에 나타난 빌라도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마 그 시대적 상황으로 보면, 상위 그룹에 사는 사람입니다. 유다의 총독이었다고 하는데, 총독은 그 당시 상황으로 보면 로마의 황제 다음으로 가는 높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도 빌라도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내가 너를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다" 식민지의 총독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굉장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권력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리고 빌라도의 가장 좋은 점은 현명한 아내를 두고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에게 행복한 것이 많이 있겠지만 현명하고 지혜로운 아내와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그는 유대인이었다고 마태복음이 기록하고 있는데, 그는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서 간절히 부탁을 했습니다. "예수님하고는 상관하지 말아라. 주님에게는 무슨 결정도 하지 말라"는 부탁을 합니다. 옆에 가장 사랑하는 아내가 현명하고 지혜로운 아내와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앞에서 말씀 드렸습니다만 18장에서는 "바라바를 놓아주랴? 예수를 놓아주랴?" 왜 그랬습니까? 이 빌라도의 마음속에 예수를 놓아주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바라바는 극악한 강도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예수를 놓아주자 라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3번이나 "예수님은 죄가 없다. 그래서 예수는 죽을 이유가 없다." 그렇게 판단한 사람입니다. 굉장히 현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빌라도는 이렇게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 군중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큰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살릴 수 있었는데 그는 최후의 결정을 잘못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좋은 조건을 가지고 살릴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나에게 있는 모든 조건들을 선용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주님 앞에 살아가는 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바꾸어 말씀드리면, 주님 앞에서 한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내게 있는 모든 조건들을 통하여서 주님의 일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내게 있는 모든 환경과 조건과 은사들을 가지고 악하게 사용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빌라도의 죄를 짓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한가지 알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내게 있는 좋은 조건들을 선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중간쯤 갈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내게 있는 좋은 조건들을 선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 조건들을 통해서 악하게 사용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무슨 말인가 하면,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하지 않으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주님을 향한 한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에게 있는 모든 조건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주님의 일을 이루어가고, 복음의 문을 여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두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좋은 환경과 조건을 통해서 빌라도처럼 복음의 문을 막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줍니다. 그런 일을 하게 되어집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제가 다시 한번 소개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먼 발치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막달라 마리아는 그 당시에 아직까지도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마리아는 예수님만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향한 한마음밖에는 없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 이외에 그에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불순물이 조금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재산 전부 -제가 몇 주전에 설교했던 값진 향유-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을 수 있었던 거예요. 무슨 말씀인가 하면, 자기에게 있는 모든 조건들 재산 전부를 예수님의 발 위에 부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향한 한마음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의 비유 가운데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5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이 5달란트 남기는 것을 원했고, 2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2달란트를 남기기를 원했습니다. 그 비유를 보면, 5달란트로 5달란트를 남긴 사람이나 2달란트로 2달란트를 남긴 사람이나 똑같이 칭찬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세요. 글자 하나 안 틀리고 칭찬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5달란트 받은 사람은 3달란트를 남기면 안됩니다. 4달란트를 남겨도 안됩니다. 5달란트를 남겨야 됩니다. 2달란트 받은 사람은 2달란트 남기면 됩니다. 1달란트 받은 사람은 1달란트만 남기면 돼요. 예수님의 비유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내가 5달란트의 은사를 받았으면 5달란트를 다 주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됩니다. 2달란트 받았으면 2달란트를 1달란트를 받았으면 1달란트만 봉사하면 됩니다. 여러분들 나는 누구입니까? 다른 사람에 비해서 더 좋은 조건을 가지지 않았습니까? 빌라도처럼 우리에게 더 좋은 상황과 조건과 환경과 건강과 시간과 물질과 여러 가지 진리가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것을 주님을 위해서 선용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선용하지 않고 잘못 사용하고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 자신의 영혼의 모습을 정직하게 보시기 바랍니다.

    이집트에서 피라밋을 발굴하게 되는데 소장품을 발견하면서 밀알이 썩지 않고 발굴되었어요. 그런데 그 밀알을 보고 어떤 사람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저만 아는 못된 인간처럼 밀알은 썩지 않고 살아있었구나! 수천년 전에 그 밀알이 썩었다면 그 동안 수천 가마의 밀알의 조상이 되었을텐데. 그런데 이제 겨우 자기 한 몸만 달랑 나타내고 있구나!" 어떤 시인이 그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님을 향한 한마음을 가진 사람, 내게 있는 모든 조건을 통하여서 헌신할 수 있어야 됩니다. 주님께 헌신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럴 때 그는 주님 앞에 선 사람, 빌라도의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그 헌신을 하지 못하면 빌라도의 죄를 짓는 두 마음으로 간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바울은 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여러분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결국 이 빌라도가 어떻게 된지 아십니까? 사도신경을 외울 때마다 그것을 외웁니다. 아마 주님 오실 때까지 그 사도신경을 고백할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고백합니다. 그곳에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이것을 아마 천국 갈 때까지 이 세상 끝날 까지 우리 그리스도인이 외울 것입니다. 어떤 설에 의하면, 기원 후 36년에 사마리아인을 학살했다는 빌라도의 죄 때문에 파면을 당합니다. 그때 이 빌라도는 너무 억울해서 자살을 하는데 그 시체를 산 속의 연못에 던졌는데 그 시체를 까마귀가 뜯었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의 유명한 장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생즉사요 사즉생이라"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요, 죽으려고 하면 산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한 번밖에 없는 종말론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죽으면 삽니다. 우리 모두가 다 예수님에게 한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서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하여 사용할 줄 아는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입니다.

    안경을 껴보면요 -저도 이제 눈이 나빠져서 안경을 낍니다. 아직 이 강단에서는 안 낍니다만은 이제 책이 아른아른해서 잘 안보여요.- 그런데 도수를 맞지 않으면 사물이 제대로 안보여요. 도수가 잘 맞아야 제대로 보이지요. 도수가 맞지 않는 안경을 끼고 자기를 보고 세상을 보고 하나님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이 시간 성령으로 내 눈에 알맞은 안경을 받으시고 자기를 보고 하나님을 보고 세상을 정확하게 볼 줄 아는 영적인 눈을, 영혼의 눈을 뜨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들! 나에게 빌라도의 죄가 없습니까? 우리 모두 두 마음에서 한 마음을 가진 사람, 나의 전부를 주께 드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앞에 서는 사람이 되어서 날마다 우리의 삶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생명의 길을 걸어가시는 주의 제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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