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요19:17-27) [고난주간]
  • 2013.06.20 10:31:15
  • "(17)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18)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22)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 하니라 (23)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

       우리는 지금 고난의 잔을 마시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의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막10:38) 주님은 유월절 전날밤 주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들과 마지막 성찬을 나누시면서 이잔을 받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나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죄씻음과 구원이 이 잔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은 고난의 잔을 마시는 예수의 모습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고난의 잔이 무엇이었습니까 ?

      첫째: 주님께서 친히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가신 것을 보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 십자가는 자기 몫인 십자가였습니다. 그 십자가는 너무 무거웠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견디지 못하셔서 쓰러지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엄청난 땀방울을 흘리도록 만들었습니다. 너무 무겁고 감당하기에 어려운 짐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종의 모습입니다 멸망할 죄인들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자요 개혁자인 본훼퍼는 "교회란 타자를 위해서 존재 할 때만 참 교회일 수 있다" 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타자인 인류를 위하여 자기를 내어놓은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주님은 그의 땀을 내어놓으셨습니다. 그의 피를 모두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 분은 교회의 머리십니다. 그분이 만드신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고난의 잔을 마시는 예수님은 타자를 위해서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시게 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감당하신 사건중심으로 생겨진 성서의 난 기사에 의하면, 몇  종류의 모습을 알게 됩니다.

    첫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이요.

    둘째는 십자가 특혜자 (Cross Benifactors).

    셋째는 예수 대신 십자가 운반자 (Cross Carriers)이며.

    넷째; 회피자, 빌라도를 볼 수 있습니다.

     1)우선 십자가 회피자로 빌라도를 들수 있다.

     우리가 본 받아야할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입니다.

     2) 십자가 특혜자는 예수 곁에서 십자가에 달린 강도이다.

     3) 십자가 운반자는 구레네 시몬이다. 구레네 시몬의 두 아들이 초대교회의 중요한 지도자가 되었음은 십자가 운반자의 진정한 보상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마가복음은 그를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지적했고, 이 두 아들의 이름은 로마서 15:13과 행 19:33절에 초대교회 지도자로서 소개되어있다.

       <고난의 잔을 마시는 나의 주님! 그것은 나 때문에 마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맞으신 채찍의 수는 / 내 병듦의 수이며/

    주님이 쓰셨던 가시관의 가시 하나 하나는 / 내 허물 그 자체 였습니다.

    군중들에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정죄는 / 나에게 합당한 것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의 고소는/ 내가 받아야할 고소였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지셨던 무게는/내 죄악의 무거움이었고

    주님이 짊어지신 십자가의 크기는/ 나의 모든 죄였습니다

    주님이 당하셨던 아픔은/ 나의 당할 고통이며

    주님이 담당하신 죽음은 나의 죽음/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주님이 받으신 저주는 나의 당할/ 지옥의 형벌이었습니다.

    내가 누구며 나의 받을 징벌을/ 십자가로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나를 미워하였지만/ 주님은 삼일만에/ 나를 안아주셨습니다.

     

    둘째. 본문은 아버지를 뜻을 위해서 끝까지 참으신 예수님을 보여 주신 말씀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십자가의 형벌을 받는 사형수들의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12시간씩 메달려 있기에 너무 고통스러워 울부짖다가 미쳐서 죽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십자가에서 죽은 사형수들의 입안에는 부러진 이빨이 몇 개가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이를 견디어 내려고 이를 갈며 애를 쓰다가 이빨이 부러지는 것입니다. 참아내신 모습만 보이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참아내시는 모습, 십자가의 못 박힌 후에도 참아내신 것입니다. 끝까지, 죽기까지 참아내신 것입니다 왜 이 모습으로 보이셨나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눅22:51)에서 참음의 십자가를 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야고보서는 (약5:7)에서 귀한 열매를 바라는 농부의 십자기가 길이 참는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다림의 미학을 가르쳐 주십니다. 곧 참음의 신앙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야고보서 5장 7절에서 8절까지에 보면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고 기록되어 있다. 참는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은 주님 주시는 능력입니다. 참는다는 것은 순리대로의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다. 만일 농부가 밭에 씨를 심어놓고 날마다 싹이 나지 않는다고 그 씨를 파보면 결국 씨는 죽고 말것이며 농부는 가을에 곡식을 얻지 못할 것이다.

      실락원을 쓴 밀튼은 말하기를 "기다리는 자는 근로하는 자이다"라고 말했다. 어쩌면 제대로 때와 차례를 기다릴 줄 아는 것은 정말 근로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하고 위대한 일이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말하기를 봄은 기다림에서 온다고 갈파했다. 돈키호테를 쓴 스페인의 소설가 세르반테스는 그의 소설속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Roma no fue construida en un dia). 우리에게 큰 문제는 조급함이다. 오죽하면 우리의 속담에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다"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100세가 된 소련의 노파가 우유 한병을 사기 위하여 두주일을 나와 줄을 섰다는 얘기는 우리에게는 바보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덜익은 청국장으로 냄새를 풍겨대는 우리를 보고 그들은 과연 뭐라고 할 것인지. 아침에 기도하고 저녁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인위적 교인도 있다. 그러나 기도는 그 자체가 응답이므로 오래 기다린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까지 기다리자는 것입니다. 주님은 인내하는 자들을 복되다 하십니다. 욥의 인내를 복된 인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나의 모습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셋째, 아버지의 뜻을 따른 예수는 한마디도 불평하시지 않으신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너무나 온전하신 모습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도 한마디의 불평이 없으셨습니다. 십자가가 무거워도 말이 없으십니다. 강도들의 조롱 소리에도 불평의 말씀 한마디도 할 수 없었습니다. 홍포를 빼앗기면서 불평의 말한마디 하시지 않았습니다  해노버는 "이상적인 환경이 아니라고 불평말자. 이상적인 환경만이 좋은결과를 가지고 온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도 타락했음을 기억하자" 감사로 주의 길을 가야 할텐데...!  우리는 사순절의 뜻깊은 계절에 이러한 주님을 모시고 닮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야 하겠습니다.

                                 

      미국의 어느 저명한 목사는 특별하게 생긴 검은 뚜껑의 책을 한 권 가지고 있었는데 그 책에는 "교인 불평록"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었다. 그것이 무엇에 쓰이는 책인가 하면 그가 담당한 교회의 교인 중에서 목사를 찾아와 다른 어느 교인의 비행이나 과오를 이야기하려고 하면 목사는 그 불평하는 교인에게 공손히 말하기를 자, 여기 불평록이 있으니 말씀하시는 대로 내가 여기 적어놓겠습니다. 그러고 끝에 사인이나 해주시오. 내가 시간이 나면 그의 잘못을 정식으로 문제삼아 바로 잡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하고 목사는 그 책을 펴 놓고 펜을 손에 들고 받아적을 태세를 갖추고 기다린다. 그러면 불평하러 왔던 사람은 으례 당황하여 말하기를, "아니오 뭐 기록에 남기고 사인까지 할만한 이야기는 못됩니다."하고는 무안해서 돌아가고 말았다. 그래서 이 목사가 40년이란 긴 세월동안 교회를 받들어 오지만 그 책에는 단 한 줄도 기록된 일은 없었다고 한다. 불평하기는 좋아하지만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지지는 못하겠다는 것이 사람이다. 신약성서의 저자 중에서도 특별히 말조심을 강조한 사도는 야고보였다. 그는,"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를 더디 하라고 가르쳤고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을 굴레씌우리라"고 하였다. 말(馬)에 재갈을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사공이 작은 키를 가지고 배를 조정하여 광풍에 헤치고 나가듯이 인간의 혀도 작은 것이지만 큰 것을  자랑한다고 지적하였다.(약 3:5-8, 1:26, 사 30:27)

      우리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을 똑바로 바라보며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참아내신 그 모습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끝까지 원망이나 불평하시지 않으시고 나와 여러분의 대속의 주님 되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순절에 자신의 십자가 바로 지고 따라갑시다. 주를 위해서 참아내는 신앙으로 어둠의 죄악을 이겨갑시다. 주님처럼 불편한번 하시지 않고 목이 마르다, 다 이루었다 이 모습 우리 그리스도인의 최후 모습이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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