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무나 놀라운 이야기(요20:1∼9)
  • 조회 수: 283, 2013.06.20 11:37:04
  • 지금 전쟁을 치르고 있는 유고슬라비아에서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브르크 라손이라는 판사가 집안에서 전기를 만지다가 감전이 되어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장례를 치렀는데, 이 죽은 사람이 한밤중에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유고슬로비아는 무덤을 평장을 하고 돌로 덮어두는데, 이 사람 살아나서 결사적으로 그 돌들을 밀치고 나와서 집으로 뛰어갔습니다. 하얀 수의를 너풀너풀 날리면서 집으로 뛰어가서는 너무 좋아서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들어갔는데, 그만 이 죽었던 판사가 한 밤중에 수의를 휘날리면서 뛰어들어온 것을 본 그의 아내와 여동생이 기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 이렇게 자기 아내와 여동생이 기절을 하자, 또 바로 옆에 사는 자기 친구인 의사의 집으로 뛰어갔는데, 그만 그 판사를 본 친구의사도 놀라서 기절을 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다음날 이 브르크 라손 판사의 소문이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집으로 몰려왔다고 합니다.) 

      2000천년 전에 죽은 예수- 그 예수가 십자가에 죽은 것을 많은 사람들이 확인했는데, 그리고 무덤에 장사지냈는데, 그 예수가 살아났다고 하는, 이 놀라운 소식도 수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면서 삽시간에 온 세상에 퍼져나갔습니다.

    처음 본 막달라 마리아에서부터, 그 소식을 듣고 무덤으로 뛰어간 베드로와 요한으로부터 퍼져나가기 시작한 이 소식은 예루살렘에서 온 유다로 사마리아로, 그리고 온 세상으로 퍼져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이 소식이 전해진 것입니다.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 이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어찌하여 2000년 동안 온 세상에 퍼져나갔고,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그칠 줄 모르고 퍼져나가고 있는 것일까? 이 예수께서 다시 산 이야기가 유고슬로비아의 판사 브르크 라슨이 다시 살아난 이야기와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더구나 이 이야기 때문에 초대교회의 수많은 성도들이 목슴을 바쳐 이 이야기를 믿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왜 이 이야기로 인해서 수십만 아니 수백만의 사람들이 부귀도 영화도 다 버리고 전 생애를 바쳐 선교사가 되었을까? 

    오늘 우리는 이 놀라운 주님의 부활을 통해서 그 원인과 까닭을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의의 승리, 선의 승리를 우리에게 보여준 까닭입니다. 

    예수가 죽은 것은 당시 의로움의 패배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불의가 정의를 이긴 것이었습니다. 악이 선을 이긴 것이었습니다. 배신한 가롯 유다, 그리고 간교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기회주의자 빌라도와 군중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진리라는 것이 무슨 놈의 힘이 있느냐? 무엇이든지 힘으로 밀어붙이면 되는 것이고,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이겨놓기만 하면 끝나는 것이야." 정말 그런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 실의와 절망에 빠져서 예수님이 죽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진리는 힘이 없구나. 선하게 산다는 것이 어리석구나." 더 나아가서 그들은 "하나님은 없을지 몰라.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런 부조리한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가 있어." 그런 좌절감에 빠져 그들은 초라하고 비참한 몰골로 다 고향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좌절과 절망의 3일이 지난 후였습니다. 3일은 기독교적으로 완전한 숫자입니다. 완전한 절망, 완전한 체념, 완전한 실패, 그런 3일이 지나고 났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놀라운 소식이 들린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소식이 들린 것입니다. 무슨 소식입니까? 죽으신 예수가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3일 만에 무덤에 갔던 막달라 마리아가 허겁지겁 뛰어와서 이 소식을 알려주더니, 그 말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갔던 베드로와 요한이 또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들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위 실증주의자라는 도마는 그 말을 듣고 말했습니다.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이런 마음은 도마만의 마음이 아닙니다. 오늘 여기 있는 우리들도 사실은 도마의 마음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실은 이 설교를 하고 있는 저도 대학교 다닐 때만 해도 그런 부활을 톨스토이 식의 정신적 부활정도로 생각했지, 정말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유치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제자였지만 도마가 "나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나를 만져보라."고 하셨을 때, 도마는 그 주님을 보고서야, 털썩 무릎을 꿇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고 고백을 했던 것이며, 그리고 나서는 도마가 제일 먼저 선교사가 되어 그 소식을 전하려 저 먼 인도까지 가서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불의가 진리를 이길 수 없음을 알았고, 어둠이 빛을 가릴 수 없음을 알았으며, 무엇보다도 "죽어도 다시 산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믿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그렇게 보입니다. 불의가 더 잘되며, 안 믿는 자들이 더 잘되고, 악이 선을 이기는 것 같이 보이는 부조리한 세상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때로 진리에 대해서 회의합니다. 바르게 산다는 것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 걱정이 있습니다. 

    무신론자인 볼테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진리는 옳은 것이지만 힘이 없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볼테르의 말에 동의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의 부활은 이러한 사탄의 거짓말을 일격에 무너뜨린 의의 승리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이런 예언을 하셨습니다. 창세기 3: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귀는 진리의 발을 물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결국 마귀의 머리를 부서뜨릴 것이다." 마귀가 일시적으로 이긴 것 같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속아서는 안됩니다. 결국 진리는 마귀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세상을 살아볼수록 세상은 시골 밭의 축도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주인이 분명 밭에다가 알곡을 심었습니다. 그런데 밭에는 심지도 않은 가라지들이 자랍니다. 자라도 알곡보다도 더 무성하게 자랍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라지가 언제까지나 무성할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이제 머지않아 주인은 이 주인의 뜻이 아닌 가라지들을 다 뽑아버릴 것입니다. 뽑아버릴 뿐 아니라, 그 가라지들을 다 불 속에 던져 불태워버릴 것입니다. 

    여러분! 바르게 사는 것은 약하게 보입니다. 진실은 종종 거짓이라는 가라지에 덮여서 보이지 않는 것 같이 보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손해보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 이 세상에 권세 잡은 사탄의 계락입니다. 의는 강합니다. 진실은 힘이 있습니다. 믿음이 능력입니다. 단 진실은, 믿음은, 의는 하나님을 믿기에 기다릴 뿐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여유가 있어서 기다릴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후4:8에서 간증하기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못해서 고난을 받는다면 우리가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또 우리가 너무 연약해서 고난을 받는다고 해도 우리는 견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살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정의로운 편에 섰다가 손해를 보았거나 성실하게 살았는데 고통을 당했다면 우리는 어떠해야 합니까? 낙심? .......의심......? 아닙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사탄에게 속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들에게 의의, 믿음의, 진실의 최후승리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끝까지 성공하려면 의롭게 사시길 바랍니다. 크게 승리하려면 믿음으로 사시길 바랍니다.

    예수의 부활은 이 약속입니다. 

    둘째로, 예수의 부활은 육신의 죽음이 끝이 아님을 우리에게 증거해줍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한번 따라합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들은 죽어도 살겠고...."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죽음이 생명의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사관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든 것이 끝이라고.... 혼백이 무주구천을 헤맨다고.... 윤회한다고...... 그냥 물질로 돌아간다고.....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들이 다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 세상은 모든 것이 섞여있습니다. 빛과 어둠이 섞여있습니다. 선과 악이 섞여있습니다. 의와 불의가 섞여있습니다. 믿는 자와 불신자가 다 섞여 삽니다. 

    그러나 이제 죽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모든 것들이 다 나누어지게 됩니다. 의와 불의가, 믿는 자와 안 믿는 자가 나누어집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잠시 섞여있을 뿐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윤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무주구천을 헤매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후에 영원한 삶이 있습니다. 단 존재의 양식이 다르고 삶의 형태가 다르지만 우리의 이 인격은 계속되는 영원한 삶이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그 죽음 후의 영원한 삶을 소망하면서 살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문호 씨에스 루이스는, 자기의 살이라도 베어줄 수 있는 친한 친구 찰스 윌리암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 찰스 윌리암스가 갑자기 먼저 죽게 되었습니다. 루이스는 이 슬픈 장례식장에서 조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조사에서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천국이 내게는 아주 가까워졌습니다. 멀리 생각했던 천국인데 그곳에 내 친구 챨스가 가 있으니 이제 천국은 아주 가까운 내 이웃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일년이 못되어서 그의 아내 죠이가 죽고 말았습니다. 루이스 부부는 금실이 좋기로 소문이 나있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것입니다.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잃고 또 아내마저 잃어버린 그는 이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천국은 내 집처럼 되었습니다. 아내 조이가 거기서 살고 있고, 친구 챨스가 거기에 있으니 나도 얼른 가서 그들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죽어도 산다는 믿음은 모든 슬픔과 어려움을 소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신내리 선교사의 "나도 내 집에 있지요." 

    동물원의 새들 중에 북극지방에서 잡아온 새는 언제나 북쪽을 바라다보고 앉아 있는다고 한다. 바울은 빌립보서3:20에서 이렇게 말한다."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이 땅은 인생의 끝이 아니다.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있고,영원한 삶이 있다. 하루살이는 내일을 모른다. 그래서 모닥불에 뛰어든다. 베짱이와 매미는 내년을 모른다. 그래서 노래만 부른다. 그러나 새는 내일을 알고 내년을 알기 때문에 집을 짓고, 바다를 건너서 날고, 일을 한다. 

    우리도 내일을 믿기에 모닥불에 뛰어들지 않고, 노래만 부르지 않고, 선을 행하고 믿음으로 살고, 억울해도 부조리하게 보여도 참고 살아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제 이 놀라운 이야기를 사실로 믿는다면 우리들은 구체적으로 인생의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주님이 죽으셨을 때에는 제자들이 다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그러나 부활하신 것을 사실로 알게되자 제자들의 인생은 180도 방향이 전환되었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꾸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겠다. 슬픔이 기쁨으로 바꾸어졌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꾸어졌다. 옹색하던 사람들이 너그러운 사람으로, 겁쟁이들이 용기 있는 사람들로 바꾸어졌다. 생각도 바뀌었고, 행동도 바뀌었고, 가치관도, 모든 것들이 다 바뀌었다. 죽어도 다시 산다는 이 사실이 저들의 모든 것들을 다 변화시켜버렸던 것이다. 부활을 믿는 자들에게는 사실 누구에게나 이런 변화가 일어난다. 

    우리는 톨스토이의 부활이라는 작품을 잘 안다. 그 책이 왜 그렇게 감동을 주느냐?

    1.그 책은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네홀류도프공작- 그는 겉으로는 근사하나 속으로는 정욕과 안일만을 추구하는 인생이다. 그가 어린 하녀를 농락했다. 그리고도 아무런 가책을 모른다. 인간의 죄성, 죄에 대한 불감증이다.

    2. 그러나 또 하나 부활에서 보여준 위대한 사상은 인간은 그렇지만 또 한편의 구석에는 진실을 향한 양심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다. 네휼르도프가 배심원이 되어 한 살인자 여자를 판결하는데, 그 살인을 한 여자가 바로 다름 아닌 자기가 농락하고 버린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저 여자가 그런 사람이 된 원인이 자기에게도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양심이 깨어나서 그는 인생에 U턴을 한다. 즉 바르게 살겠다고 하여 양심에 모든 것들을 버리고 카츄사와 함께 시베리아로 떠난다. 

    톨스토이는 이 전환을 부활이라고 한다. 이 책을 사람들이 많이 읽었다. 당시 인류최고의 책이라고 격찬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책을 그렇게 많이 읽고, 격찬을 했지만 사람들은 회심을 하지는 않았다. 톨스토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러시아는 이 위대한 부활을 읽었지만 10년도 안되어서 부정부패로 인하여 무신론자들인 공산주의자들에게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도덕의 부활로는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변화는 감동으로만은 안된다는 것이다. 감동은 사람을 순간적으로는 움직이지만 변화를 시키지는 못한다. 사람을 바꾸는 것은 무엇인가? 사실, fact다. 오직 사실만이 사람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12명의 제자들이 다 180도가 변화되어서 새로운 삶을 산 것이다. 우리가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지 않아도 우리가 예수의 부활을 믿으면 우리의 죽은 양심이 깨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저 양심의 능력, 진리의 능력이 나타나서 우리가 나만 변화시킬 뿐이 아니라,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 소망이 있는가? 과학에? 풍요에? 아니다. 지금 그 과학과 풍요가 이 지구를 죽음의 땅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요즘, 생명복제가 논란이 되고 있는데, 생명복제는 인간의 바벨탑이요, 선악과인 것을 알아야한다. 도덕 윤리를 보라. 자식이 아비를 죽이고, 아비가 자식을 겁탈하는 인간이기가 부끄러운 세상이다.

    이 세상에 내가 살고 내 가정이 살고 이 세상이 사는 길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사건인 부활신앙으로 살아야한다. 이 부활신앙은 단지 우리가 죽을 때만 필요한 믿음이 아니다. 사람은 죽음의 관이 분명할 때 삶에 대한 관도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쾨테는 노년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부활을 사실로 믿기 전에는 나의 모든 것은 오류였다." 이 부활 신앙이 있어야만 우리는 허무를 이길 수 있다. 이 부활신앙이 있어야만 우리는 환난을 이길 수가 있다. 이 부활신앙이 있어야만 우리는 고독도 죽음도 못된 생활도 청산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산다는 이 소망 위에서만이, 참으로 바르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이기는, 죽음을 이기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놀라운 길을 가르치시려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이다. 부활신앙은 의의 최후승리를 보장합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의롭게 삽시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맙시다. 부활신앙은, 죽음이 끝이 아님을 알려줍니다. 영원을 보고 삽시다. 부활신앙은, 우리의 모든 것들을 변화시킵니다. 이 부활신앙을 가질 때 우리는 변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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